28화
다시 눈을 떴을 때, 기온은 보았다.
옆 침대에 윤해가 누워 있었다.
그녀도 기온과 똑같은 유리관 속에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그녀는 분명 살아 있었다. 흉부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면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었다.
기온은 바로 자신을 둘러싼 유리를 깨뜨리고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사지가 단단히 묶여 있어 불가능했다.
외쳐서라도 그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너와 같이 살아서 바로 곁에 이렇게 있다고.
갑자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기온의 사지를 붙잡아 주사를 놓았고, 그가 기절한 사이 머리에 칩을 심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때, 기온은 놀랍게도 인간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표정으로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뜻까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언어가 단어 하나까지 세세하게 파악될 정도였다.
하얀 옷의 인간들은 기온에게 글자를 보여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 기온은 낯선 글자인데도 다 읽을 수 있었다.
하얀 옷의 인간들은 기뻐했다.
‘됐어, 성공이야! 칩이 잘 이식 되었다고. 이제 소통에 문제가 없을 거야. 그래. 기분이 어떻죠? 당신은 누구죠? 지금껏 어디서 어떻게 지냈고, 어쩌다가 사고를 당한 거예요?’
쏟아지는 질문에 기온은 눈을 감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어 입술이 닫혀 버렸고, 몸은 떨렸다.
의사들은 자신들이 너무 들뜬 나머지 과하게 질문을 퍼부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곧 천천히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적대적이지 않은 그들의 태도에 기온은 조금씩 안심했다. 그러나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닫혔고,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왠지 그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면 해코지를 당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내심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인간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되며, 그들에게 진실해도 안 된다는 생각. 어릴 적 자신을 돌봐 줬다가 이상한 짓을 했던 금발 머리 여자에 대한 경험이 그런 경고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을 닫는 시간은 그리 오래갈 수 없었다.
어느 날, 의사가 말했다.
‘당신이 우리와 소통이 잘 되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나중에 저 여자 분도 깨어나서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둘은 동료 아닌지? 아니면 친구라거나.’
기온은 여전히 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윤해를 보았다. 듣고 보니 의사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쯤 깨어날 수 있습니까?’
기온이 의사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의사는 기뻐하며 답했다.
‘저희가 있는 한 죽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무사히 깨어나기도 힘든 상태지만.’
그리 희망적이진 않았다.
그렇지만 의사는 기온에게 위로해 주었다.
기온은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말해 주기 시작했다. 갈색 협곡에서의 일들과 그곳에서의 끔찍한 생활, 그리고 윤해를 만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일까지 모두.
다만, 기온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절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번개와 같은 빠르기와 발광 현상, 그리고 향기. 그것은 인간 세상에 온 뒤로 유리관에서 한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감시자들의 눈 때문에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몸에서 나는 발광 현상은 막을 수 없었다.
의사가 말했다.
‘특이하더군요.’
‘……?’
‘당신의 몸이 밤만 되면 은은하게 빛이 납니다.’
때마침 창유리로 하이퍼 문의 빛이 강하게 비쳐 스며들고 있었다. 기온의 몸은 전에도 그렇듯 빛이 났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하이퍼 문에 의해 은은하게 빛났다면 이제는 그 빛이 많이 줄어들었다.
기온은 궁금했다.
몸의 빛이 약해졌다는 것, 이건 예전 그 번개같이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아주 특이한 신체인데, 혹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가졌다거나 하는 건 없는지?’
기온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굳이 남들과 다른 능력이 있다면…….’
말끝을 흐리는 그를 보고 의사가 기대하듯 눈을 빛냈다.
기온은 처음으로 인간에게 농담을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잘생긴 점이라 할까요.’
대답을 기대하던 의사들이 얼마간 침묵했다. 의사들 중 여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고, 그건 기온의 말에 동의하는 의미였다. 반면에 남자 의사들은 어깨를 으쓱이며 별 희한한 대답을 다 듣는다고 말하는 듯했다.
‘흠. 뭐,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았어요. 아버지를 만나실 수 있으니까요.’
기온은 아버지라는 단어를 몇 번이나 되새겼다.
‘아버지……요?’
아버지. 혹은 부모.
그런데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있었단 말인가?
기온에게 부모란 존재를 정의해 준 존재는 협곡의 괴물들이었다. 자식들을 험하고 과격하게 다루거나 잡아먹던 이들. 하지만 칩을 이식한 후, 기온은 이곳의 언어와 관념을 습득해 새로운 부모상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래 자신이 알고 있던 관념과 이 세상에서의 관념에 괴리가 생겼다. 인간들의 부모는 괴물들의 부모와 달랐다.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고, 보호했다. 또 자식에게 희망이나 기대를 걸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도 있단 말인가.
기온은 놀랍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좀 두렵기도 했다.
‘정말 나에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괴물이 아닌?’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쪽도 그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습니까?’
‘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했습니까, 분명?’
‘그럼요. 어머니 아닌, 아버님 말입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만나게 해 주세요.’
기온은 간절했다. 윤해가 깨어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일평생 궁금했던 자신의 기원을 알아내는 것도 역시나 중요한 일이었다.
의사가 조건을 걸었다.
‘그럼 적응하세요. 이 모든 것에.’
‘적응……이요?’
인간 세상, 37 기지와 다른 이 세계 전반의 생활에 잘 적응하겠다는 판단이 설 때 만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만날 수는 없는 겁니까?’
‘예. 저도 마음이야 두 분이 얼른 만났으면 하지만, 아무래도 아버님의 생각은 다른 모양입니다. 어느 정도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만나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신 듯하고…….’
그로부터 얼마간 적응 훈련이 시작되었다. 지식이나 정보는 칩으로 이식받았을지 몰라도 실생활에서의 모든 것을 익히려면 훈련이 필요했다. 37 기지에서 커 왔던 기온은 비록 자신이 다른 괴물들과 다르다는 의식 혹은 우월감을 지녔지만, 그 행동에선 알게 모르게 야성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것을 모두 지우려 했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운 일들이 꽤 일어났다.
식사할 때 무의식적으로 맨손을 쓴 것.
멀쩡한 문을 두고 창틀을 넘어서 들판을 뛰던 것.
목마를 때 이시도르의 낚시터 호수에 얼굴을 박고 물을 마시는 것.
이터니티 휴게실 내의 향초가 먹는 것인 줄 알고 씹다가 들킨 것.
재단 손님이 데려온 대형 차우차우를 보고 기선 제압을 하려고 늑대 울음소리를 낸 것.
대형 TV를 볼 때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손을 TV 안에 넣으려 한 것 등.
생활을 관리하는 사람이 붙어서 일일이 설명하고 가르친 후에야 기온은 보통의 인간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후 비로소 아버지 이시도르와 만날 수 있었다. 재회의 시간은 부자의 생각보다 담백하게 이뤄졌다.
아니, 오히려 무미건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너무 젊어서 또래로 보이는 이시도르의 모습에 기온에 당황한 것 말고는 감동의 분위기는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네 애비다.’
‘안녕…… 하십니까.’
‘분명 딸이라고 했는데. 뭐, 그건 상관없지.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좀 어색하다는 건 알겠다. 불편하면 그냥 이시도르라고 불러도 좋아.’
이시도르는 아들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모두 다 말해 주었다. 제인에 관한 이야기도 숨김없었다. 덕분에 기온은 그토록 갈망하던 자신의 기원을 알 수 있었고,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기온. 그 여자가 너한테 한 말 중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게 그 이름이라고 했지? 네가 그 이름을 쓰고 싶다면 말리지 않으마. 어쨌든 이렇게 다시 돌아와 줘서 하늘에 감사할 뿐이야. 앞으로 잘 지내 보자. 아버지와 아들로서 말이다.’
기온은 아무리 애써도 여성이었던 시절이 기억나지 않았다. 성별이란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기도 하지만, 자라면서 뚜렷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게 기온이 알고 있던 정보였다. 괴물들은 가운데에 살 한 덩이를 달고 태어날 때도 있었지만, 그 살덩이는 없다가도 서너 살이 되면 저절로 생겨나곤 했으니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아버지.’
‘응?’
‘제가 또 여자로 바뀔 일은 없겠지요?’
‘그렇겠지? 왜? 바뀌면 안 될 일이라도?’
‘절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왜…….’
‘절대, 절대요.’
기온은 이시도르와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늘 바쁜 이시도르가 며칠 간 식사도, 취침도, 심지어 사우나도 아들 기온과 함께했다. 이시도르는 젊디젊은 외모만큼이나 열정과 꿈이 대단했다. 늦게나마 만난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줄 거라며 기대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기온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러한 애정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솔직히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얼떨떨해서 적응 기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이시도르가 일이 있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다.
기온은 혼자 호숫가 깊은 숲으로 가 산책했다. 산책이 진짜 목적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틈을 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