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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27화 (27/43)

27화

[하이퍼 문에 의한 신인류 각성 일지.]

그 문서에는 여자아이들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출생 과정을 전적으로 제인의 편의에 맡겼던 이시도르는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은 태생이 아니고 난생이었다. 말 그대로 알에서 태어난 것이지만, 그 알이 좀 특별했다. 진짜 알이라기보다, 콩과의 식물 열매를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변성체라 딸로 태어났어도 하이퍼 문의 영향을 받다 보면 성별이 바뀔 수 있었다. 그것으로도 충격적인데, 하이퍼 문의 영향으로 인간을 초월한 신체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도 했다.

문서의 끄트머리에는 제인의 손 글씨가 있었다. 그녀는 앞으로 딸을 이용해 실험을 하겠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시 다시 이시도르에게 돌려보낼 것을 약속하겠다고 편지를 써 두었다. 그리고 자신을 찾거나 추적하려 한다면 바로 아이를 죽이겠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시도르는 믿지 않았다.

제인 같은 미치광이 과학자의 손에 넘어가 봤자 아이의 미래는 죽음일 것이고, 그러므로 그녀가 딸을 다시 돌려보낼 일도 없을 것이었다.

이시도르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서 아이를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렇게 1년, 또 1년, 세월이 지나도 원하던 아이의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

* * *

이시도르는 뭔가를 할 때 언제나 최고급 장비를 썼지만, 낚시는 달랐다. 그는 개인 소유의 저택 앞 호수에 자리해 평범한 낚싯대로 자주 낚시를 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낚시의 본질이라 해도 필사적이진 않았다. 그저 행운이나 기적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편이었다. 작은 물고기 하나라도 낚이면 그날은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동안 그 사악한 인간, 제인에겐 딱 한 번 연락이 왔다.

당신 딸은 죽었다고, 그러니 찾지 말라고.

하지만 이시도르는 믿지 않았고, 여전히 딸을 향한 미련을 놓지 못했다.

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어떻게 딸을 보더라도 젊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물론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으면 활동이나 일하기에 좋다는 점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어딘가에 분명 딸이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 이 멋진 모습의 아빠를 보고 기뻐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그렇게 돌아오지 못할 아이를 찾느냐고. 정말 죽었다면 그냥 새 아이를 가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지만 불가능해졌다. 회춘 약의 부작용이 와서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에게 유일한 자식이란 제인이 데리고 간 딸뿐이었다. 멍청한데 욕심만 많은 조카는 재산을 노려 이런저런 일을 시도하지만, 이시도르는 그에게만은 재산을 넘기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자신의 딸에게 이 모든 것을 넘겨주고 싶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딸을 찾으려고 애써도 소식은 없었다. 한 해, 또 한 해,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자신에게 딸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는 것은 아닐까?

적적해서 틀어 둔 뉴스에서 사고 소식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나운서가 다급하게 비보를 전했다. 한 민간 생명 과학 업체 직원들이 37 기지의 생물들 샘플을 얻으러 갔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업체 다른 직원의 증언으로, 원인은 악천후인 듯하다며 예정보다 이른 출발로 인해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고 했다.

이시도르는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들이 몸담은 업체는 과거 이시도르의 사업체 이터니티와 경쟁 관계에 있었다. 라이벌이었지만 이시도르는 그들의 도전 정신에 경탄했다. 인류가 그러한 정신을 가진 덕분에 자신이 여태 이렇게 젊은 모습으로 지낼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자신의 딸을 생각하면, 또 자신의 딸이 제인에게서 당했던 실험들을 생각한다면.

씁쓸한 기분에 담배를 하나 꺼냈다.

바로 그때였다.

저 멀리서 헬기 한 대가 공기를 거칠게 진동시키며 날아왔다.

아니, 난다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머리 부분을 아래로 향한 채 점점 가속되면서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다행히도 그것은 땅이 아닌 호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하필!’

이시도르는 자신의 고요한 호수로 날아든 헬기의 모습을 보고 조금 전 뉴스에서 나왔던 그 헬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행방불명이 된 이들이 어떻게 여기로?

의문을 느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헬기는 호수에 처박혔다.

펑!

거친 물보라를 보면서, 이시도르는 바로 핸드폰을 켰다. 하필 왜 자신의 땅에 헬기가 추락했냐는 귀찮음과 성가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뭘 고민하는가.

헬기는 경쟁 업체였던 자들의 것이다.

물에 빠졌더라도 그 전체가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었다.

이시도르는 당장 비서에게 연락했다.

“비상이야! 당장 저걸 끌어내!”

헬기는 무사히 끌어올려졌다.

누구도 헬기가 이시도르의 호수에 처박혔는지 몰랐다. 개인 사유지라고 감시를 못하게 한 덕분이었다.

추락한 헬기를 극비리에 조사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었다.

이시도르는 사람들에게 헬기를 조사하라 지시했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이들도 의료팀에게 맡겼다. 그들은 기적적으로 숨이 붙어 있었다.

약 보름 뒤, 그에게 두 팀이 와서 결과를 보고했다.

헬기 조사 팀은 건질 만한 자료가 없어서 그냥 폐기 처분했다는 보고로 이시도르를 실망하게 했다.

그러나 의사들은 달랐다. 이시도르의 오랜 파트너라 그 어떤 의료팀보다 꼼꼼하게 조사했던 그들은 아주 놀라운 사실을 가져와 밝혔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무엇부터 말씀드릴까요?”

“나쁜 소식부터 듣지.”

“타고 있던 여자의 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집니다. 회복을 기대할 수 없어서, 이대로 가다간 희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살려. 그리고 좋은 소식은?”

의사들의 리더는 따라온 동료들을 모두 물렸다. 방에는 이시도르와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리더는 소리를 죽여 중대한 소식을 알렸다.

“혹시나 했습니다. 진짜 혹시나 해서.”

“내가 뜸 들이는 거 싫어한다는 거 알 텐데.”

“예. 그러니까, 타고 있던 남성의 몸이 아무리 37 기지의 괴물이라 해도, 생긴 게 인간과 비슷해서.”

“인간과 비슷할 수도 있지.”

“단순히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습니다. 더 희한한 건, 이시도르 님과 너무 닮아서…….”

“하하. 그 친구도 잘생겼나 보군.”

시답잖은 농담을 하던 이시도르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예. 잘생겼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전 정보를 확인했더니 구십구 퍼센트의 확률로 친자로 나왔습니다. 저희 소견으로는, 제인이 데리고 갔던 그 아이가 아닐까 합니다만.”

이시도르는 원래 한 번 들은 보고는 절대로 잊거나 다시 듣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시 천천히 말해 주겠나?”

* * *

기온은 새하얗고 깨끗한 침대 이불 위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독서 중이었다.

‘메르헨’이라 적힌 책은 그림이 많았고 처음 보는 문자로 쓰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의 뜻과 내용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암울했다. 하늘 위 낙원에 오르려다가 추락한 왕자와 공주의 이야기였다.

기온은 굳은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이곳은 조용하고 아늑한 침실.

창 너머 풍경은 밝고 아름다웠다. 전에 살던 협곡처럼 우중충한 갈색 톤이 아니었다. 넓은 호수와 푸른 나무, 식물들 그리고 섬세한 조각상까지, 마치 천국의 일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지내기에도 좋았다.

때마다 하얀 옷을 입은 인상 좋은 남자가 와서 시아로파 향이 나는 초록색 액체와 음식을 주고 갔다. 지금까지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 맛있는 음식이었다.

씻는 곳은 청결했고, 볼일을 보는 환경도 편했다. 잠잘 땐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르피레나 고울 같은 괴물들이 시아로파를 달라고 성가시게 하지 않아서 참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싫다.”

기온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자신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윤해와 헬기를 타고 무작정 날았다.

날다 보니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바다였다. 윤해는 이따금 헬기의 어느 부분을 보고 초조한 듯 입술을 물었고, 기온은 얼른 이 무서운 파란 바다가 사라지고 땅이 나타났으면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땅이 나타났다. 절망적이었다. 땅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새파란 녹지였다. 윤해는 계기판을 보고 눈을 찌푸리며 끊임없이 중얼거렸으나, 기온은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어둡던 표정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몇 분 지나지 않았다.

‘어, 호수다! 호수가 보여! 그리고 커다란 건물도…… 아, 드디어!’

기쁨도 잠시, 그녀는 계기판의 어느 한 부분을 보고 또 다시 어두워졌다. 기온은 그때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알 수 있었다. 헬기의 연료가 바닥난 것이었다. 자꾸만 고도가 낮아지는 그렇고, 기체 내부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이 있었다.

윤해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기온을 보았다. 미안해하는 눈길이라는 걸 그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눈빛 하나로 모든 말이 들리는 듯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괜히 따라오게 만들어서. 결국, 이렇게 끝을…….

그 눈물이 기온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는 그녀를 괴롭히는 불안과 슬픔이 야속했다.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았다. 괜히 헬기로 가라고 부추겨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무서워하지 말라고, 앞으로 무서울 건 없다고, 나 그래도 처음으로 날아 봐서 좋았다고, 이렇게 비로소 다른 세상 볼 수 있어 좋았다고, 너를 만나서 참 좋았다고.

하지만 그 모든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건 키스밖에 없었다.

윤해.

기온.

서로 이름을 부른 후 입을 맞췄고, 이후는 추락이었다.

깨어났을 때 기온은 투명한 관 속에 있었다. 관의 위쪽에선 은은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하이퍼 문과는 전혀 다른 새파란 빛을 띠고 있었다.

문득 잊고 살았던 경험이 떠올랐다.

어릴 적, 금발 여성과 함께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살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건가?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해서 도무지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런 상태였지만 나름 좋을 때도 몇 번 있었다.

끝은 그리 좋지 않았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이런 유리관 속에서 갇혀 있다가 버려진 것 같았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또 어딘가에 버려지는 건 아닌가?

더 끔찍한 곳으로 보내진다면?

기온은 불길한 느낌에 발작했다. 도망치려고도 해 보고, 유리창을 깨려고도 해 봤다.

그것도 잠시, 의사가 몸과 연결된 관에 투명한 액체를 주입했다. 그러자 기온은 서서히 힘을 잃었다.

원치 않는데도 평온한 기분에 잠이 찾아오려 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꼈다.

나쁘지 않다고, 일단 살았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그래야 윤해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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