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르피레가 또 뺨을 때렸다.
「감지 마!」
입속에선 뜨거운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하도 맞아서 비가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아. 이러다 죽는 거 아닐까.
어쩌다 여기까지 왔더라.
난 분명 군 연구소의 사람이었는데.
이상한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네.
어떻게 되는 걸까.
「그 허연 새끼가 그랬던 것처럼 실컷 즐기고 다른 놈들한테 던져 주지. 널 갈라 먹든 씹어 먹든 알아서 할 테지. 어차피 시아로파도 못 먹어 죽을 거라면, 그놈에게 엿이나 주고 죽는 게 좋지 않아? 안 그래? 으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이 한 순간 멈췄다. 나는 쏟아지는 빗속에서 보았다. 그의 성기가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죽음이 두렵지만, 차라리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다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었다.
“기온…….”
이런 상황에서도 기적을 바라는 내가 우스웠다.
르피레도 웃긴지 나를 또 때리며 외쳤다.
「네 기온인지 뭔지는 이제 안 와! 널 두고 도망갔다고!」
그때였다.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 투두두두―
헬기 소리가 들렸다. 이런 악천후인데도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꿈이겠지.
꿈이 아니라면?
내 몸에 성기를 막 넣으려던 르피레가 하던 것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진짜 헬기였다. 눈부신 빛으로 우리를 둘러보는 하늘 위의 그것은 분명 헬기였다!
헬기 앞부분에 십자가가 파란 빛을 내는 게 보였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세계군 소속 연구 기관이라면, 저들은 민간 생명 공학 연구 기관 소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 속에 묻혔던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 군 연구소가 시아로파에 관심이 있었다면, 저들은 괴물들의 유전 정보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실험을 하겠다는 소식은 없어서 그저 소문에 불과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온 것을 보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탕! 탕탕탕! 탕! 탕!
헬기에서 총소리가 났다. 총을 맞은 괴물들이 하나둘 픽픽 쓰러졌고, 나는 총소리에 비명을 지르다가 멈췄다. 빗속에서도 확실히 맡을 수 있었다. 탄내 꽃에서 나는 것보다 좀 더 진하고 약 냄새가 나는 것이, 지금 쏟아지는 총알들은 마취탄이었다. 저들의 목적이 괴물 생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으아아아!」
「인간이다!」
「인간!」
「살려 줘!」
비처럼 쏟아지는 마취탄을 피해 괴물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이미 르피레도 나를 들어 제 방패로 삼으려 했다.
「빌어먹을!」
바로 그때였다.
스칵!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르피레의 머리가 폭발하듯 부서졌다. 다른 도망치는 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족히 열대여섯이나 되는 괴물들이 채 5초도 되기 전에 모두 머리가 터져 죽었다.
살육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비정상적인 빠르기의 살육은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헬기 속 사람들도 놀랐는지 마취탄을 쏘는 것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착륙했다.
나는 누가 괴물들을 죽였는지 알 수 있었다.
「윤해!」
기온이었다. 한 손엔 돌을 들고 있었고, 온몸이 피에 젖었으나 비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아름답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진 게 보였다. 괴물들을 죽인 후 그의 모습은 분노와 광기에 흠뻑 젖어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 보였다.
“기…….”
시간이 멈춘 듯했다.
헬기가 내려오는 소리만이 들렸다. 인간들은 우리 둘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는 마취탄 공격을 하지 않는 듯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하얀 놈을 생포해!”
탕!
첫 총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전이었다. 기온은 재빨리 나를 들쳐 안고 어디론가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우리에게 다시 여유를 주지 않았다.
탕!
두 번째로 총이 발사 되었다.
맞은 것은, 나였다.
「윤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몸은 땅에 다시 눕혀졌다. 하늘색으로 눈이 번뜩인 기온이 몸을 헬기 쪽으로 돌렸다. 헬기는 그때 땅에 닿아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이후.
「으아아아아! 다 죽어 버려!」
기온의 비명을 끝으로 내 의식은 멈췄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피비린내와 썩은 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고 보니 마취탄을 맞았더랬지. 팔에 스쳐 지나갈 정도의 고통이었다. 르피레가 내게 준 고통보다 덜했지만, 그래도 마취탄인지라 정신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정신이 드는 거야? 윤해, 정신이 드는 거냐고. 응?」
기온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윽.”
「윤해!」
괴물에게 먹히고 르피레에게 맞았던 부분이 미친 듯이 아프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아 견딜 만했다. 등을 대는 바닥이 차가운 것 외에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나를 둘러싼 흙더미를 보았다.
“……뭐야?”
이건 마치 시체가 땅에 파묻히기 직전의 상황이랑 같지 않은가.
“하, 하으. 하하!”
어이가 없게도, 기온은 내가 죽은 줄 알고 땅에 파묻으려 했다. 그전에 깨어난 건 정말 다행이었다.
이걸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여전히 몸을 갉아먹는 아픔에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하얀 숨소리만 탄식처럼 나왔다.
“대체…… 이게 뭐야, 응?”
물으며 그를 보았다.
그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반히 보더니 돌연 와락 껴안았다. 너무 세게 껴안아 아파서 신음이 나왔다.
「아, 미안. 이제 괜찮은 거지? 이렇게 눈 떴다가 다시 죽을 거 아니지? 응?」
그는 내 등을 두드리다가 얼굴을 붙잡고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살아난 거잖아. 그렇다고 말 좀 해 봐. 아무 목소리나 내 봐. 응?」
그의 눈물은 투명했다.
내가 깨어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란 걸 알 수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죽은 줄 알고 나를 파묻으려 했음을 생각하니 오싹했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다 허벅지가 아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안고 일어서 주었다.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이퍼 문은 빛이 거의 사라져 있었고, 해가 어스름히 뜨는 시간이었다.
괴물들이 보였다. 기온에게 머리가 터져 죽은 괴물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마취탄을 맞고 쓰러진 괴물들은 언제든 나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었다.
여긴 안전하지 않았다.
깨어났지만, 그리 기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때 내 눈에 뭔가가 보였다.
인간들이 타고 온 헬기였다.
「일단 저기로 가자.」
기온은 나를 헬기로 데려갔다. 헬기 밖에는 죽은 인간들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기온은 나를 보고 아무런 말없이 피로 범벅된 시트에 앉혔다.
「네가 깨어나서 다행이야.」
“기온?”
「몸 상태가 나쁘단 건 알아. 하지만 급해. 부탁할 수밖에 없어. 난 이걸 날아오르게 하는 걸 모르거든. 너라면 가능하잖아. 그렇지?」
“지금 나한테 이거 조종하라는 거지, 그렇지?”
극심한 피로와 고통에도 희망을 느꼈다. 헬기가 멀쩡했다. 하늘을 나는, 헬기가 내게 있었다!
기온은 헬기 안에 물과 간단한 간식을 내게 건넸다. 그 자신도 배가 고플 것이었는데, 나부터 챙기는 모습이 고마웠다. 나는 물을 반쯤 마시고 기온에게 주었다.
기온은 이미 충분히 마셨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간식은 같이 먹어 주었다.
이후,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프고 기운 없어도 지금은 좀 버텨야 해. 여긴 이제 네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도 살 곳이 안 되지. 저 괴물들은 계속해서 나타날 거니까. 그러니 얼른 떠나야 해. 떠날 수 있을 때 가는 게 좋아.」
“뭐라는 거야…….”
「그리고 살았다는 건, 다시 살아났다는 건, 참 좋은 거 아니겠어? 나 같은 놈들에게야 사는 게 지옥이었을지 몰라도, 넌 아니잖아. 돌아갈 곳이 있고, 또 그 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선택할 수도 있을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기에 이렇게 서글픈 눈을 하는 걸까.
그는 내 손을 2번이나 꽉 붙잡더니, 놓아주었다.
「그러니, 잘 가. 윤해.」
그러고는 천천히 헬기 밖으로 나갔다. 왜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금세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대로 계속 동굴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기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따라가려고 몸을 움직였으나, 쉽지 않았다. 뜯어 먹힌 허벅지가 너무 아팠다. 하긴, 혈관을 뜯기지 않았을 뿐이지 엄청난 상처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끔찍한 아픔이 온몸을 옭아맸다.
“기온!”
갈 수 없는 대신에 나는 그를 크게 외쳐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고, 그제야 나는 그 행동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도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 졌지만, 그것은 오직 나 하나에만 한정되었다고 그는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인간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 헬기에 타고 둘 다 군으로 돌아가면, 기온은 무사하지 못한다. 군에서 생체 실험을 당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오늘 새벽에 왔던 민간 업체에 팔려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기온은 뭔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무사하지 못할 건 기온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괴물들과 오랫동안 지낸 나 역시 인간 세상으로 가면 격리 하에 각종 실험을 당할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