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불안해졌다. 때로 몰려오는 괴물들이 금방이라도 내 목을 조르고 돌을 던질 것만 같은 공포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기온. 나 무서워.”
다른 괴물들은 무시해도, 내 말은 무시당하지 않았다.
기온은 내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다가오는 괴물들을 찬찬히 보았다.
「너희는.」
그가 낮게 운을 떼자,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살지?」
「뭐?」
「뭐라는 거야?」
「어제가 오늘 같은, 오늘이 어제 같은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고, 동족을 해하고, 자식을 뜯어 먹으면서, 왜 계속 뭔가를 처먹고 살아 있으려 하지?」
기온이 뭔가를 묻는 듯했다.
대답한 이는 르피레였다.
「닥쳐! 그런 건 배나 채우고 생각해야 할 문제야!」
「배나 채우고 생각해야 할 문제?」
기온이 비웃으며 르피레를 보았다.
「그런 걸 대체 왜 생각해야 하냐던 놈, 아니었나?」
대체 기온이 무슨 말을 했기에 르피레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걸까.
「너희는 똑같아. 굶으나 먹으나 늘 그저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고, 더 나아질 희망은 없어.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구원은 내 몫이 아니야.」
「구원?」
르피레가 되묻듯이 말했고, 다른 괴물들도 같은 단어를 말했다.
「구원이 뭐냐!」
「구원이 뭐냐!」
「닥치고 시아로파나 달라!」
「배고파! 시아로파를 구해 와!」
하필이면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괴물들이 기온을 향해 원성을 퍼부었고, 또 때로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기도 했다.
그러자 기온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중 가장 덩치 큰 이 둘을 쓰러뜨렸다. 하나는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고, 또 하나는 눈에서 끔찍한 색깔의 물과 덩어리를 줄줄 흘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에 겁먹은 괴물들은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르피레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 * *
기온은 내 손을 잡고 동굴로 돌아왔다. 늘 그렇듯 그곳은 우리 둘만의, 방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극히 누가 들을 세라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윤해.」
“응?”
「우리, 여기 떠날까?」
“뭐라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거야. 저 멀리, 가는 거야. 저 징그러운 놈들을 피해서 어디든 가는 거야.」
신기하게도 뭘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몸짓과 은밀한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엔 헬기 주변에서 떠나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괴물들이 나를 보는 살기 어린 시선을 보니 못 떠날 이유도 없었다. 아니, 반드시 떠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어디로든 가는 거였다. 떠나면 무슨 수가 생겨도 생길 것이다.
꼬르륵. 꼬르륵.
연달아 나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붉혔다. 이런 때에도 몸은 얼른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쳤다. 먹은 거라고는 어제 기온이 가져온 흠집 난 열매 2개가 전부였다.
기온이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미안. 어제 가져온 거로는 너무 부족했지? 기다려. 가서 뭐든 구해 올게.」
그 웃음이 미안해서 짓는 웃음이라는 걸 내가 모를 수 없었다. 그는 너무 착하니까, 뭘 구해 와도 항상 나부터 챙기고 나만 먹으면 좋다고 손짓하곤 했으니까.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팔을 잡았다.
“안 돼, 밖에 비와. 나가지 마.”
「왜?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걱정하지 마. 아까 내가 그놈들 혼내 줬잖아. 겁먹어서 여기 못 들어와. 그리고 금방이니까, 오래 안 기다려 도 돼.」
“싫어. 우리 그냥 내일 여기 떠나면서 뭐 주워 먹자. 오늘은 일단 잠부터 자고. 아니, 진짜 이렇게 비오는 데 가긴 어딜 가? 너 감기 걸릴지도 몰라. 체력 좋다고 해도 막 돌아다니면 안 돼. 응?”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 내 손을 떠났다.
그가 떠난 동굴의 허전함이 두려웠다.
나는 꽃밭에 힘없이 누웠다.
빛나는 호박을 끌어안고 있어도 추웠다.
“그래. 그럼 이왕이면…… 달콤한 열매로 가져와 줘.”
이럴 때도 불쑥 나오는 식욕이 무서워졌다.
* * *
정말 먹을 게 없어도 심각하게 없는 모양이었다. 기온은 1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나는 기운이 없이 축 늘어진 채 그가 종이에 썼던 낙서나 구경했다. 그는 종종 종이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그런데 무심코 보던 그림이 뭔가 이상했다.
지금까지는 나와 함께한 나날을 일기처럼 그린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나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목욕을 하는 모습, 물을 마시는 모습, 책을 읽는 모습, 잠든 모습.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면, 나는 단발인데 그림 속 여자의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게다가 나와는 달리 항상 웃지 않는 표정이었다.
궁금했다.
기온이 본 인간이 나와 방재환 말고 또 누가 더 있단 말인가.
배가 고프니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며, 나는 종이를 바닥에 다시 내려 두었다.
그때였다. 동굴 저 멀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가 오는 소리인 듯해 기뻐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심장이 쿵 뛰었다.
발소리는 하나의 것이 아니었다.
“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달려오는 저들은 괴물들이었다. 기온에게 항의 하러 온 것이든, 기온이 나간 걸 알고 내게 해코지하러 온 것이든, 어쨌든 그들은 지금 여기로 오고 있었다.
“허억, 헉, 헉…… 헉! 헉! 헉!”
위기를 의식하자 숨소리가 가빠졌다. 진정하자고 마음을 다스리려 할수록 심장은 반대로 요동쳤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탄내 꽃밭을 지나서 강물 아래를 내다보는 곳까지 몸을 피했다.
“아……으으, 어쩌지?”
저들이 내게 오기 전에 무조건 이곳을 탈출해야만 했다. 탈출, 해야만 하는데…….
비 때문에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해선 안 된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기온……!”
그가 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그라고 해도 떼로 덤벼드는 덴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럴 때 오는 것은 그에게도 자살 행위나 다름없겠지.
단순하게 생각해야 한다.
단순하게.
문득 실소가 나왔다.
웃기지 않은가?
이곳에 온 뒤로, 한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만 족히 100번은 넘게 한 듯한데.
그런데 이젠 그게 싫다.
무섭다.
슬프고.
실성한 듯 헛웃음을 흘렸는데, 이젠 그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턱 끝이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간지러웠다.
“나, 나 먼저 갈게.”
나는 동굴 벽을 세게 붙잡았다. 눈을 감고 강물로 뛰어들려고 숨을 급히 들이마신 순간.
퍽!
무언가가 머리를 쳤다.
몸이 무너져 내렸다.
* * *
집단 전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제물로 희생되는 존재는 약하거나 외부에서 온 자.
바로 나 같은 사람일 것이다.
「저 암컷을 죽이자!」
「그냥 죽이기엔 아깝다! 더 괴롭혀!」
「한입씩 먹는 거야!」
괴물들이 웃으며 포효한다.
퍼붓는 비도 광기에 춤을 추는 듯하다.
나약한 이방인인 나는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신음했다.
“으아아아아!”
이빨이 이중으로 나 있는 녀석이 허벅지 살을 맛보듯 뜯어 먹었다. 그런 다음엔 구운 고기 먹듯 물어뜯으려 했다. 끔찍한 고통에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아, 그만! 하지 마! 아아아아! 윽, 으으아아!”
살점이 또 뜯기려 할 때, 르피레가 놈을 막았다. 그렇다고 다행인 건 아니었다. 놈이 나를 구해 주려고 막았다고는 절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난 암컷이 싫어!」
놈은 내 목을 움켜잡았다. 이번엔 목이 뜯기는 거 아닐까?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저었다.
「그런데 그 허연 새끼가 뭐 때문에 환장을 하는지는 알아야겠지!」
퍼억!
놈은 나를 바닥에 패대기쳐서 그 위로 올라탔다. 아픔에 정신이 찢겨진다. 질퍽한 땅에 닿은 등이 차갑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비에 허벅지의 상처가 난도질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고통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짝! 퍽!
르피레는 한 손을 펼쳐 뺨을 때리고, 반동으로 반대쪽 뺨을 칠 땐 손을 말아 쥐어 주먹으로 쳤다. 작은 녀석이라 해도 손힘이 아프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어금니가 부러지고 비릿한 피가 입 밖으로 철철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흑, 아으…….”
「그래, 울어 봐. 그래야 내가 세워서 널 쑤셔 주지. 응?」
놈은 제 성기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런 놈을 보고 괴물들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환호했다.
나는 울음은커녕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우오오오!」
「우아아아!」
「잘한다! 잘한다!」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