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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23화 (23/43)

23화

계곡 쪽에서 그가 달려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시아로파 두 뿌리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축 처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대체―」

그는 달려오던 걸 천천히 멈추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시아로파의 억센 줄기도 보았다.

「그동안 어딜 다녀온 거냐!」

버럭 화를 낸다. 나를 향해 성큼성큼 오는 모습에는 원망이 짙어 보였다.

기온이 르피레의 접근을 막았다.

「르피레. 목소리가 커. 시끄럽잖아.」

그런데도 르피레는 제 하나 남은 뿔을 나에게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저 암컷 때문이지! 저 암컷이 널 데리고 도망가자고 했지? 우리는 굶어 죽든 말든, 어? 시아로파 내놔! 어디 있어! 어디 있냐고!」

「시끄럽다고 했지, 내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온이 내게 들이밀어진 르피레의 하나 남은 뿔을 그의 몸에서 빼어 낸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르피레는 고통에 몸부림쳤고, 내 얼굴엔 그의 어깨에서 튀어나온 핏방울이 묻었다. 괴물들이 웅성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고 따지는 듯한 눈빛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기온에게 늘 순종적이던 고울도 마찬가지였다. 고울은 신음하는 르피레를 보더니, 기온에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정도로 할 필요는 없다.」

「너도 눈알 하나 파 줘?」

「들어 봐라. 기온. 그래도 그동안 르피레가 어디선가 시아로파를 구해 와서 우리가 조금씩 버틸 수 있었다.」

「아하. 그럼 르피레한테 오늘 내가 가져온 양만큼 가져오라 해 보지? 누구는 정신이 나가서 이 많은 양을 가져왔다 생각하나, 응?」

기온은 고울을 올려다보며 금방이라도 한 대 칠 듯 말했다.

그러나 고울은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의 우두머리라면 우두머리답게 행동했으면 좋겠다. 다들 걱정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피곤하니까 그만 닥쳐.」

「대답해라. 지금 저 암컷이랑 함께하는 것만이 중요한가?」

「너도 참 입이 가볍다, 인제 보니?」

「그저 할 말을 했을 뿐이다.」

갑자기 다른 괴물들이 외쳤다.

「그렇다! 고울은 할 말을 했을 뿐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다!」

「우리는 시아로파가 필요하다!」

「시든 것 말고 제대로 된 것으로 달라!」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졌다. 괴물들이 우리를 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무리 기온이 강하다고 한들, 단체로 달려들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나는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기온의 팔을 잡아끌었다.

“기온, 가자. 가서 좀 쉬자. 오늘 우리 무리했어. 피곤하니까 쉬어야 해.”

그렇게 기온을 데리고 동굴 쪽으로 돌아섰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괴물들은 나를 싫어했다. 르피레만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모두가 나를 싫어했다.

내가 기온과 괴물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온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여기 괜히 돌아온 건 아닌가.

아니, 기온은 괴물들을 살리기 위해 당연히 돌아왔을 것이다.

나만 돌아오지 않았으면 되었는지도.

나만.

생각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씻자. 빨래도 하고.”

우리는 동굴 안 작은 계곡으로 갔다. 빛나는 호박을 둥둥 띄워 물을 덥힌 뒤에 거기 들어가 담요도 씻고 우리 몸도 씻었다. 뜨거움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동안 말없이 온기를 즐겼다.

아니, 즐기는 척했다.

기온은 부지런하게도 불을 피우고 담요를 그 근처에 넣어 두어 말려 주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넓은 등을 껴안고 싶어져서, 껴안았다.

“미안해.”

사과하고 싶었다. 나만 보면 웃어 주고 무엇이든 배려하지만, 그런 그가 괴물들에게 미움 받는 건 왠지 나 때문일 것 같았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미안해. 그리고 나 버리지 마. 기온. 나, 나는…… 네가 필요해.”

그러자 기온은 제 가슴에 닿은 내 손을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말뜻을 모르지만, 목소리에서 불안을 느낀 모양이었다. 몸을 돌린 그가 나를 안았다. 등을 톡톡 두드려 주면서.

「불안해하지 마.」

“기온?”

「네가 불안해하면 나도 그러니까. 난, 나는…… 여기가 어떻게 돼도 너만 있으면 돼. 윤해, 너만.」

이제 그의 두 손은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환하게 빛나는 하늘색의 눈동자가 나를 애달프게 본다.

「유일하게 닿은 내 근원이니까.」

번쩍, 우르르쾅쾅!

동굴이 부서져라 천둥번개가 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쾅! 쾅쾅!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다 씻고 동굴 끝 꽃밭에서 바깥을 보니, 바깥에 세찬 비가 몰아쳤다.

달이 이상했다. 하이퍼 문은 빛이 약하고, 하늘에서 천둥 번개는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동굴이 울릴 때도 있어서, 나는 몇 번이나 놀라 기온의 몸을 부둥켜안고 떨었다.

모르던 건 아니었다. 37 기지는 천둥 번개가 잦다고 유명한 지역이었다.

「이런 날은 차라리 일찍 자는 게 좋겠어. 자자. 윤해. 그만 떨어. 많이 무서워? 안아 줄게. 눕자.」

* * *

그날 밤 기온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나를 안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잠들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괴물들의 먹이를 조달하는 곳이 걱정이 되어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새벽 즈음이었다. 그는 잠든 내 이마에 키스하더니, 일어났다. 희미한 소리지만 그것은 인사가 분명했다.

「예쁜아. 나 다녀올게. 금방 다시 올 거야.」

* * *

‘번개가 떨어졌어. 내 낙원에, 우리 낙원에, 시아로파 정원에 말이지. 하필 거기일 게 뭐야. 그럼 다들 뭐 먹고 살란 말이지? 떠날까. 아니. 떠난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어. 여긴 어디나 다 벽이 가로막고 있는걸.’

* * *

깨어났을 때 기온은 벽에 우두커니 기대어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새벽에 잠시 어디 다녀오더니 뭐라고 혼자 중얼거린 것 같은데, 도무지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또 복통과 두통을 느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근심 가득한 그에게 걱정거리를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고맙게도 그는 내가 깨어난 기척을 느끼고 물부터 주었다. 그리고 동굴에 돌아다니는 쥐를 잡아 구워 줬다. 치킨은 아니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그 고기를 먹었고, 그에게도 주었다. 그는 나보다 적게 먹었고, 주로 쥐 고기보다 빛나는 호박의 줄기를 씹었다. 무척이나 맛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모양이었다.

* * *

그로부터 사흘 동안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온이 열매를 구해 오지 않았다. 아니, 구해 오지 못한 듯했다. 일부러 안 가져올 이는 아니었다. 시아로파가 가득 피어난 그곳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그 후에도 여기저기 다녀오는 것 같았지만, 시아로파 잎이나 열매를 구해 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큰 문제였다. 시아로파를 구경하기가 힘들어졌다. 어깨의 뿔이 뽑혀 출혈이 심한 르피레가 성치 않은 몸으로 돌아다니다가 다 시든 시아로파를 구해 오긴 했지만, 겨우 두세 뿌리였다. 저 혼자 몇 번에 걸쳐 아껴 먹으면 끝이었다.

다른 괴물들도 시아로파를 찾았지만, 그건 협곡에 비극을 일으켰다.

「저리 가! 내가 먼저 잡았어!」

「미쳤냐? 이건 내 거다! 내가 먼저 봤으니 나한테 내놔야지.」

「악! 죽을래?」

「네가 죽어서 나한테 좀 도움이 되는 게 어떠냐?」

「으악! 으아아아!」

서로 시아로파를 먹겠다고 싸우던 괴물들이 끝내는 저들끼리 먹고 먹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고울도 배가 고프면 몸집이 작은 것들을 수시로 먹었고, 가장 먼저 목숨의 위협을 받는 건 어린 괴물들이었다.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천진난만한 생물들이었다. 덩치 큰 생물들의 배고픔에 희생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희생자 범위는 점점 늘어났다. 힘없는 수컷들도 먹혔고, 지방이 많은 암컷들도 먹혔다. 시아로파를 먹지 못하니 다른 것을 더 많이 먹어 허기짐을 채우려는 것이다.

그동안 다른 괴물들을 먹고 있던 고울이 눈을 돌린 먹이는 르피레였다. 어깨 양쪽에 있던 뿔을 모두 잃은 르피레는 덩치가 작아서 원래부터 먹이로 노려질 상대였다.

하지만 르피레는 그리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기온이 비정상적으로 날쌔서 그렇지, 애초에 놈도 어깨의 뿔과 재빠른 몸짓으로 우두머리를 꿰찼던 전적이 있었다. 르피레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고울의 눈에 긴 돌을 쑤셔 박아 고울을 죽였고, 그 잔혹함에 다른 괴물들은 감히 놈을 노리지 못하게 되었다.

고울을 죽인 날, 르피레가 기온을 향해 외쳤다.

「기온! 시아로파를 달라! 그걸 주지 않으면 너는 대장 자격이 없어!」

하지만 기온은 나와 헬기에 나란히 누워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을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런 태도가 르피레의 분노를 더더욱 키웠다. 르피레는 쉬익쉬익 숨을 내쉬며 헬기로 좀 더 다가왔다.

「아니면 뭔가? 저 암컷만 몰래 먹이고 우리에겐 주지 않겠다는 건가? 대답을 해라! 대답을 해 보란 말이다!」

실로 대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놈은 전에 기온에게 두 뿔을 잃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기온이 그를 무시하고 계속 하늘만 보고 있자, 르피레를 포함한 다른 괴물들도 불만을 품고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르피레의 불만에 맞장구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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