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완전한 어둠이 들이닥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캄캄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온이 몸을 밝혔다.
빛 알갱이는 나오지 않았다. 꽃밭 위에 있어서 그런지, 그는 빛을 내도 내 몸에 흥분하지 않는 듯했다.
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어디엔가 죽어 있을지 모를 작은 인간을 샅샅이 찾아다녀, 결국에는 발견했다.
“무덤을 만들어야겠어.”
「무우……덤?」
“그래, 무덤.”
그 작은 생명체를 위한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땅에 떨어져 있던 예쁜 꽃 하나가 비석이 되었다.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워 주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일이 그 생명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했다.
추모의 의미.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끔찍한,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참사가 이곳의 일상 중 하나라면, 우리 역시 그것을 견뎌 낼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가는 게 허무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달이 떴을 때 우리는 다시 꽃밭에 나란히 누웠다.
왜인지 기온은 계속 몸을 밝히고 있었다.
한동안 하늘만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망하게 죽어 버린 작은 생명을 추모하다가, 또 다시 구조의 희망을 느끼고, 그러다가 절망하여 이 낙원이라도 즐기자는 생각에 저절로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돌연 기온이 나를 툭툭 쳤다.
「윤해.」
돌아보니 그는 팔을 뻗어 먼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가리켰다.
무슨 의미지?
내가 묻듯이 눈을 끔뻑거리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뭔가를 훔치는 시늉을 해서,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 탁 때리더니 제 몸을 톡톡 2번 가리켰다. 같은 행위를 몇 번이나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들렸다.
「어때. 저 먼 하늘에서 온 별이랑 같이 누워 있는 기분이?」
아마도 자기가 저 먼 하늘에서 온 별이라 말하는 것이겠지.
솔직히, 살짝 으스대면서 말하는 게 귀여웠다.
“사랑스럽네.”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그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윤……해?」
“응?”
대답하며 그의 팔에 뺨을 비볐다. 온기가 좋았다.
그러자 점점 그의 몸에서 향기가 나고, 빛 알갱이가 많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나오는 증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나 이상해.」
“기온?”
「죽음을 본 후에는 늘 흥분돼.」
“뭐라고 하는 진 모르겠지만, 잘 들을게.”
「그때도 그랬어. 맨 처음 저 작은 인간들이 죽었을 때도, 허무함에 어쩌질 못해 한숨 쉬다가 벌러덩 누워 하늘을 봤지. 그리고 흔들었어. 내 것을.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이 삶이 견딜 수 없을 것 같더라. 허무하고, 그 허무함이 무서워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아서. 오늘도, 오늘도 그래…….」
말끝이 흐려졌다.
「그래도 오늘은 이왕이면, 네 몸에 넣어서 흔들고 싶어.」
왠지 단호한 느낌이 드는 말을 한 후에, 그는 내 뺨을 짓누르듯 입 맞췄다.
「넌 어때?」
“응?”
「넌, 너는…… 이런 나를 싫어할까?」
나는 그의 눈을 보고 웃어 보였다. 점점 더 많은 향과 빛 알갱이를 발산하는 그가 눈이 부셔서, 또 뭐라고 종알거리는 그가 너무 예뻐서, 또 내 곁에 있어 주는 그가 너무 고마워서.
정신이 아찔해졌다.
“별보다 기온 네가 더 아름다……,”
말을 다 마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가졌으니까. 혀를 뻗어 그의 입술을 열었고, 그러자 그가 순식간에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좋아, 너…… 윤해 네가 너무 좋아.」
무슨 신호인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를 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제하고 싶지 않았다. 무의미했으니까.
그 작은 인간처럼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불사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정이 아니었다. 상대가 기온이니까 가능한 마음이었다. 기온, 이었으니까.
나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담요를 벗겼다. 그 역시 내 몸에 있는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을 다 벗겨 주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알몸으로 만든 후, 눈을 마주쳤다. 눈빛은 격정을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이미 안고 있는데도 더 꽉 껴안았다. 등을 쓰다듬고 엉덩이를 붙잡아 당겼다. 이내 목덜미를 움켜잡듯 끌어당기고, 한 몸이 될 듯 키스했다.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존재는 서로밖에 없다는 듯.
우리의 몸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
「윤해, 윽!…… 하아, 윤, 해!」
그가 안을 채워 주었다. 허무하고 서글퍼져 위로가 필요했던 내 몸을 차지해, 마음껏 자신을 박아 넣고 흔들어 주었다. 등 뒤에 깔린 꽃잎들이 짓이겨져도, 격통을 동반한 쾌감에 내가 신음을 내질러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기온, 읏, 아! 아!”
유난히 키스가 잦았던 관계였다. 아래로는 처박으면서도 그는 입술로 어디든 키스하려 했고, 키스는 갈수록 더 격하고 진해졌다.
게다가 처음 관계를 맺었을 때보다 그의 몸이 더 밝아졌다. 향기와 빛들이 나를 나락으로 처박을 듯 아찔했다. 우주가 품고 있는 시름도 지금 이 순간은 우리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밤새도록 나는 그에게 물들었고, 그가 주는 쾌락에 나를 잊었다.
아니, 오늘의 끔찍한 장면을 잊을 수 있었다.
* * *
낙원에서 이틀을 보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한 번은 파랑새를 잡아먹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곧 거두었다.
“우리 돌아가자.”
「응?」
“돌아가서, 또 치킨 먹자.”
정말로 치킨이 먹고 싶었다. 동굴에서 구워 먹었던 그 맛이 좋았고, 동굴의 아늑함도 그리워졌다. 비록 나를 싫어하는 르피레가 있지만, 그래도 그곳이 내가 돌아가야 할 곳처럼 느껴졌다.
기온은 돌아가자는 날 보더니 뭐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어디론가 가자는 거지, 지금? 여길 벗어나서, 인간 세상 같은 곳 말이야?」
“기온. 생각해 보니까 거긴 내가 타고 온 헬기가 있더라. 뭐, 물론 다 망가졌지만. 이건 미신인지도 모르겠는데 그 헬기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그래야…….”
구조도 더 쉬울 것이었다. 구조헬기가 돌아다닐 확률은 없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희망을 가지는 게 인간의 마음이니까.
“얼른 돌아가서 우리 다시 닭 구워 먹자.”
몇 번이나 말, 몸짓, 표정을 보여, 내 의사를 전달했다.
뜻이 통한 모양이었다. 기온이 갈 준비를 시작했다. 가방과 물을 챙겼고, 머리를 산뜻하게 묶었다.
이제 옷으로 쓰는 담요만 허리에 두르면 된다. 낙원에서의 첫날 밤 이후 그는 내내 알몸이었기 때문에 뭐라도 걸쳐야 했다.
그런데 그는 담요를 엉뚱한 데다 썼다.
쫙 펼쳐 담요 위에다 시든 시아로파를 뽑아 두기 시작한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이걸 왜? 아. 아아…….”
묻다가 나는 저절로 깨달았다. 그는 괴물들의 먹이를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곳의 시아로파들이 다 시들고 신선하지 못했지만, 그는 그런 것으로도 괴물들에게 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별말하지 않고 담요 위에 다른 시아로파를 더 찾아서 뽑아 주었다.
가득 채운 다음 우리는 길을 떠났다.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가면서 힘들면 쉬었고, 또 힘들면 쉬었다.
밤에는 짐승처럼 서로를 안았고, 아침이면 물과 열매, 시든 시아로파로 허기를 채운 후 또 길을 마저 걸었다.
제10장. 악생(惡生)
되돌아갔을 때, 우리를 보는 괴물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다들 불만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우두머리를 맞이할 때 보이는 예의 복종의 태도가 없었다.
고울이 기온에게 뭔가 말하려고 다가왔으나, 녀석은 기온이 들고 있는 시아로파 한 꾸러미를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기온은 모두의 앞으로 시아로파를 던졌다.
「다들 알아서 먹어.」
그러자 고울이 시아로파를 받아서 괴물들에게 나눠 주었다. 표정이 어두웠던 괴물들은 시아로파를 보자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받아먹었다. 그러면서 조금은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동안 굶주렸던 모양이다. 핼쑥한 모습도 그 때문이겠지. 고울 같은 괴물들이야 배고프면 동족도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편이지만, 그런 고울에게도 주식은 필요했다. 그게 그들에겐 시아로파였다. 육식이든, 초식이든, 이 37 기지에 사는 괴물들은 적으나 많으나 꾸준히 시아로파를 먹어 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괴물들이 시아로파를 거의 해치우기까지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다 먹은 고울이 기온을 보았다. 어쩐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기온.」
「응.」
「시아로파 상태가 안 좋다.」
「그래서.」
「빛처럼 빨리 가져올 때는 좋았다.」
「어쩌라고.」
「다들 싱싱한 것을 먹고 싶어 한다.」
「…….」
「다음엔 싱싱한 것을 주면 좋겠다.」
고울이 저렇게 긴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기온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보기만 했다. 둘 사이에선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바로 그때였다.
「기온!」
어디선가 르피레의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