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에게 사육당하다-20화 (20/43)

20화

어떤 기억이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설사 말한다 해도 이해시키기 어려운 일.

하지만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그건 어릴 적에 인간과 함께 살던 나날이었다.

뚜렷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었다. 그 기억은 늘 느끼는 거지만,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졌으니까. 나는 대부분 투명한 뚜껑 아래 누워 있었고, 머리카락이 샛노란 여자가 나를 돌봐 주었다. 나쁜 기억도 있는 듯한데, 뚜렷하게 기억이 나진 않았다. 따뜻했고, 편안했으며, 괴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좋은 기억이라는 건 아니었다. 지금 지옥에서의 삶이 너무 고달프니 그때의 기억이 상대적으로 좋게 느껴진다는 것뿐.

나는 그 시절을 다시 잡고 싶었다. 인간에게 닿아, 괴물들 따위는 영원히 잊고 싶었다.

그러려면 무엇이든 시도해 봐야 했다.

탈출은 쉽지 않았다. 전부터 시도했지만, 괴물 무리를 떠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다들 심부름꾼이 없어지면 곤란해질 테니 나를 감시했고, 내 행동의 폭은 고울의 시야 그 안으로 한정되었다.

르피레가 우두머리가 된 후로 상황은 더 고약해졌다. 르피레는 내가 저로부터 조금만 떨어져도 뿔로 위협을 가하고 역겨운 벌을 주었다.

내가 노릴 수 있는 때는 단 한 번. 놈이 잠에 푹 빠져 있을 때뿐이다. 하지만 그 작고 끔찍한 놈은 잠귀도 밝았다. 내가 뒤척이기만 해도 반응해 깨어날 정도였으니까.

기회를 기다리는 어느 날이었다. 지루함이 머리를 돌아 버리게 했던 걸까.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놈에게 물어봤다.

‘넌 왜 사냐.’

‘음?’

‘이런 데서 왜 사냐고. 뭐 때문에 사냐고.’

녀석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그런 걸 대체 왜 생각해야 하지?’

우습게도 그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괴물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애초에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걸 생각했다면 이들이 이러고 살 리 없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너…… 말을 이렇게 길게도 할 줄 아는군. 하지만 이 입은 말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알아?’

그날 밤도 역겨운 행위가 이어졌다. 순종할 수밖에 없는 나는 녀석의 쾌감을 죽지 못해 만들어 주면서, 또 한 번 탈출을 생각했다.

죽음을 향한.

탈출을.

* * *

그건 우연이었다.

행위에 지친 르피레가 먼저 잠들었고, 나는 그 옆에서 쓰러지듯 잠에 막 빠져들려고 했다.

당시 협곡에 감도는 공기는 축축했다. 그 축축함이 내 기분처럼 더러웠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놓아 버렸기 때문일까. 환영이 보였다.

내 손과 팔이 희뿌옇게 빛나는 모습.

말도 안 되었다.

처음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곧 깨달았다.

손과 팔뿐 아니라 내 온몸에서 점점 빛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병에 걸린 거야.

그러니까 피부가 이렇게 발광하는 거라고.

여기 있는 다른 괴물들이 종종 변이를 일으키듯 나 역시 그런 변이를 일으키는 거겠지.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피부에서 빛이 나도, 내 삶은 달라질 게 없을 텐데.

기어이 축축한 공기가 비를 만들어 냈다.

죽음으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여전한, 내 마음에서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공기가 진동하듯 울리더니 하늘이 번쩍였다. 그리고 온 세상을 바위로 때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번개와 천둥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르피레는 짜증을 내며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날 보곤 놀랐다. 내 온몸에서 나는 빛에 놀란 것이다.

‘뭐냐, 그거. 대체 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거의 감긴 거나 다름없는 눈으로 멍하니 하늘을 보던 나는 어떤 변화를 감지했다.

바람이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도 변했다.

르피레의 목소리가 한없이 굵고 늘어지게 들렸다. 비는 멈추기라도 할 듯 천천히 떨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빗방울을 만졌다. 빗방울은 내게 닿은 후에야 내 손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오직 그 한 방울뿐이었다. 다른 빗방울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다.

세상이 멈춰 버린 듯했다. 나는 비를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려 했다. 세상 모든 게 멈췄다면 구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번개가 있었다. 땅에 꽂히기 전의 상태로. 번개는 비 내리는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땅으로 내려오려 했고, 그 장소는 바로 내 머리 위였다.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피해야 했다. 어떻게든 번개로부터 이 몸을 지켜야만 했다. 온 세상이 하나의 선처럼 보였고, 번개를 피하는 도중에 어딘가에 부딪치기도 했던 것 같은데 크게 아프진 않았다.

그렇게 번개를 피하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내가 머물던 협곡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도 협곡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한순간에 이렇게 빨리 이동하는 게 가능한가?

쿠르르릉 울리는 천둥을 들으며 내 몸을 보았다. 빛나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아니라 나 자체가 태양이나 된 듯 눈부시게 반짝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곧 비는 원래의 속도로 돌아와 나를 적셨고 내 몸도 서서히 빛을 잃어 갔다.

한참을 생각했다.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내가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 무엇인지, 이 모든 게 다 무엇인지.

깨달음의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번개처럼 빠르게 어디론가 가는 것, 그건 또 하려고 마음먹으면 가능했다. 난 그런 믿을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아니면 원래 그렇게 태어났던 거거나.

누군가가 나를, 그런 놈으로 만들었거나.

* * *

미친 듯이 웃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괴물들과 다른 점이 많았었지. 작고, 가냘프고, 힘이 없었다. 그런 점들로 인해 얕보이고 괴로웠다.

그런데 이건, 이 미친 빠르기는 아니었다. 이건 내게 장점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탈출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나는 협곡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땅, 저 너머엔 분명 내가 과거에 머물던 인간들의 세상이 나올지도 몰랐다.

지옥에 온 뒤, 처음으로 실현 가능한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안 이상, 가만히 있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또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내 의지를 시험해 보았다. 나는 갈 수 있다고, 괴물들을 떠나 저 멀리 인간들의 세상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갈 수 있다고, 그러니 얼른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몸은 힘차게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갔다. 얼마나 멀리 있든,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나는 힘차게 앞으로 향했다.

* * *

결과는 참혹했다.

부푼 마음을 안고 달려가던 도중, 한 지점에서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튕겨났다. 무언가가 있었다. 장해물이 존재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를 가로막는 벽이 분명히 거대하게 퍼져 있었다.

단지 그 한군데만 문제가 있겠거니 하고 다른 곳을, 또 다른 곳을 노렸지만 허사였다. 그 어느 곳으로 탈출을 시도해도 불가능했다.

이 지옥은 거대한 테두리에 갇혀 있었다. 아주 길고 거대하며 투명한 벽이 수억 개의 강철 가시를 촘촘히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곳이 괴물들의 감옥이란 것을.

나는 그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아……으흑! 으아아아아아!’

아파서 울었다. 벽에 부딪친 내 몸이 아파서 울었고, 더는 이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절망에 슬퍼서 울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보고 빌었다. 하늘보다 더 큰 존재, 신이 있다고 믿으며 빌었다.

내게 날개를 달라고.

이 벽을 날아 넘을 수 있는, 크고 강한 날개를 달라고.

* * *

신은 내게 기적이 두 번이나 일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번개 같은 빠르기를 각성했고, 벽에 부딪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반나절 만에 금세 회복되는 몸을 가졌지만, 날개는 신이 내려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탈출을 포기했다. 다른 뾰족한 수가 나올 때까지는 무기한이고 연기되어야 하니, 차라리 포기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꿈꿔야 할까.

텅 빈 머리에 발걸음을 아무렇게나 놀렸다. 의욕도, 정신도 잃어버린 몸은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시아로파나 풀을 뜯어 먹으면서 연명했고, 물이 보이는 곳이 있으면 미친 듯이 들이마셨다. 허무했다. 무리에서 떨어져, 갈 곳을 잃고 목적도 잃었으니까. 이대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문득, 공기에서 은은한 향이 났다.

시선을 들어 앞을 보니, 초록의 동산이 있었다. 풀과 나무가 가득한 곳. 가까이 가 보니 꽃과 작은 짐승들도 많았다.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처음엔 좋았다. 시아로파가 잔뜩 있었고 초록색의 싱그러움이 주는 활기가 상처 받은 내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상한 식물을 보고 기분이 싸해졌다.

그 식물은 털이 잔뜩 돋아난 열매였다. 신기하게도 열매 속에서 생명체를 토해 냈는데, 마치 작은 인간과 같은 모습이었다. 나를 축소한 것 같은 모습이기도 해서 눈이 갔다.

땅에 떨어진 그것은 힘겹게 숨을 내쉬다가 축 처졌다. 껍질 밖으로 나오면 죽는 게 숙명인 듯 서서히 죽어 갔다. 하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나오는 족족 모두.

그런 시체를 예닐곱 치웠던 것 같다. 그때 또 하나의 털 열매가 꿈틀거렸고, 나는 다음 시체는 치우기 싫어서 그곳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으아.’

열매에서 나온 작은 인간이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다른 털 열매 인간들과 달랐다. 몸에서 빛이 나지 않았고, 생김새도 진짜 인간처럼 섬세했다. 자그마한 그것은 털 열매에서 나오자마자 기운도 좋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보곤 달려왔다.

‘에으에. 에.’

그리고 내가 무섭지도 않은지 내 몸을 핥고 빨았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도 잠시, 본능적으로 묘한 감정이 솟았다.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 보살펴 줘야겠다는 마음, 우선은 살리고 봐야 할 거라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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