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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19화 (19/43)

19화

손짓으로 안 된다는 표현을 한다. 만지지 말라는 뜻일까?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면, 털 열매 껍질 속 그것은 분명 인간 형상을 한 것이었다.

아주 작은 인간이…… 그 식물 안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누워. 편하게.」

기온이 꽃밭 위에 누우라고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와 나란히 누워 하늘을 보았다. 옆에서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는 몸에서 빛을 내는 인간이었고, 털 열매에서 나온 작은 인간도 몸에서 빛이 나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관계냐고, 너도 그렇게 태어난 거냐고, 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물을 수도 없었고 물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새 하늘에 어스름히 달이 떠올랐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그가 별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를 툭툭 쳤다. 그러자 그가 나를 보았다.

나는 한 팔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별, 예뻐.”

모르긴 해도 그는 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도 두 손을 들어서 별에다 대고 가볍게 흔들었다.

‘반짝 반짝 예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흔들리는 느낌이지. 별이. 그렇지?」

나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나를 보고 웃는 그의 눈빛에 동의의 표현을 해 주고 싶었다.

고작 별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조금 전의 어색했던 분위기가 사라졌다.

웃음기가 잦아들자 나는 이 낙원 전체를 빙 둘러 가리키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기온. 너는 이곳을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여기, 이 멋진 곳,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갸우뚱한 시늉을 해 보이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궁금한 제스처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말이 제대로 전달되게 하려고 애를 썼다.

통했는지 아닌지, 기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켜 낮고 차분한 숨을 내쉬었다.

왠지 긴 이야기가 시작될 느낌이다.

「아주 오래전이었어. 그건…….」

여전히 누워 있는 내 머리카락을 흩트리면서, 그가 운을 뗐다.

제8장. 감옥 비명

처음부터 이 지옥에서 태어난 건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 한때는 인간 여성과 살았던 기억이 있었다.

야속하게도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는 기억이지만.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는 나를 이곳에 두었고, 이별을 예감한 나는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버려졌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가르쳐 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협곡은 외로운 곳이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시아로파 풀잎뿐이고, 볼 수 있는 것은 괴물, 또 괴물뿐.

놈들은 나와는 다르게 밝은 적갈색의 털로 뒤덮인 피부를 가졌고, 태어나서 성체가 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또 거칠었으며, 분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들은 곳곳에 자라난 시아로파를 뽑아 먹었지만, 시아로파가 보이지 않을 땐 아무것이나 먹었다. 배고프면 동족이건 제 새끼건 상관없이 먹어 버리기도 했다.

먹는 것에도 분별이 없었지만 성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발정이 나면 눈앞에 보이는 동료 중 아무와 교접했다. 게다가 그렇게 태어난 제 피붙이들을 쉽게 죽이기도 하는 등 잔혹함까지 있었다.

그런 미치광이들을 괴물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 다른 외모로 눈에 잘 띄는데다 덩치마저 작고 약했다. 약체는 순종과 복종이 숙명이었다. 그들이 시키는 일이라면, 최약자로서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먹고 남긴 시아로파 줄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이 기억난다.

덩치가 아주 큰 암컷이 하나 있었다. 그 암컷은 제 자식을 그래도 스스로 키울 줄 아는, 이 지옥의 몇 안 되는 괴물이었다. 2세에 대한 애정이 그나마 온전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애정에 내가 사용되었다면 나로서는 썩 달갑지 만은 않은 일이었다.

‘피부가 참 부드럽지. 핥아 봐. 너희 장난감이란다.’

그 암컷의 어린 두 새끼들은 나를 핥고 물어뜯는 장난감으로 써먹었다. 아프고 괴로웠다. 죽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들에겐 유희였다. 그들은 별 맛이 나지 않는 내 몸에 금세 흥미를 잃었고, 결국 나는 그들의 심부름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다. 물을 떠 오라면 떠 와야 했고, 흙으로 그림을 그리라면 그려야 했다. 그래도 장난감에서 심부름꾼이 되었으니 신분 상승인지도 모르겠다.

어린 새끼들은 자라나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 새끼 중 암컷이 먼저 내 키를 훌쩍 뛰어넘기 시작하더니, 나머지 수컷은 지금껏 본 어떤 괴물들보다 커지고 털색도 까매졌다. 그 까만 놈이 고울이었다.

고울의 여동생은 특이했다. 도무지 같은 종의 수컷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에 그곳으로 향할 관심을 내게 쏟았다. 나와 자주 있다 보니 끌리는 모양이었다. 관심의 표현은 참 부담스러웠다. 내 온몸을 멋대로 만지는 건 예사였고, 생식기를 잡아당긴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조용히 피하거나 손을 쳐내면 그 암컷은 멋쩍은지 괴롭힘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밤, 녀석이 멋대로 내 성기를 입에 물었다. 나는 끔찍함에 진저리치며 그 암컷을 밀어냈다. 덩치가 나보다 커서 밀어내기 쉽지 않았지만,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이었다.

하필 그걸 고울이 봤다. 그는 제 동생을 밀어내는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을 그때 다 느꼈다. 그 폭력은 일종의 보복이었다. 제 동생에게 무안을 준 하찮고 나약한 녀석에게 고울이 복수한 것이다.

나는 폭력의 쓴맛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괴물에게도 우애가 있다는 생각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 * *

고울에게는 우애뿐 아니라 누군가를 가여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고울은 그날만 날 때렸고, 이후엔 손대지 않았다. 아마 제 동생이 그러지 말라고 빽 소리를 질러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 나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오랜 시간 함께했기 때문에 고울도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게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고울은 나를 때리지 않는 것은 물론, 보호도 해 주었다. 다른 괴물들이 괴롭히는 것을 막아 주었고, 심지어 제 동생이 날 건드리려하면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가장 고마웠던 것은, 시아로파 새순을 내게 먹으라고 양보해 준 일이었다. 시아로파의 새순 부분은 가장 달지만 양이 적었다. 그래서 괴물들 사이에서도 힘 센 놈만 골라 먹을 수 있었다. 괴물 중 가장 힘이 센 고울은 새순 부분을 독식할 수 있었고, 기분이 내키면 동생과 어미에게도 주곤 했다.

그런데 그걸 나에게까지 준 것이었다. 아마 나를 제 혈육과 비슷하게 생각했다는 것 아닐까.

나는 운이 좋았다. 괴물이긴 해도 그런 우두머리에게 보호 받았기 때문에, 다른 괴물들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았던 거니까.

만약 고울의 성격이 악독했다면 내가 괴물들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행복한 건 아니었다.

이 협곡에 있는 한, 불행의 굴레는 항상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고울의 보호 아래 무던하게 살아가는 듯해도, 머릿속으로는 언제쯤 이 야만의 생명체들과 헤어질 수 있을까 궁리만 했다. 오직 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지루하고 싫은 시간을 끔찍하게 싫은 시간으로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르피레의 등장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놈 역시 시아로파를 먹고 산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시아로파를 찾아 헤매다가 우리가 사는 지역에 정착하려는 듯했다. 시아로파가 가득 돋아나는 곳에서 놈이 그것을 미친 듯이 입에 쑤셔 넣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건 단순히 허기를 채우려는 모습이 아니라 광기 어린 모습이었다.

사실 처음에 나를 포함한 괴물들은 놈을 만만하게 보았다.

그도 그럴 게, 놈은 여태 내가 본 어떤 괴물들보다 작았다. 괴물 중 가장 작은 나보다 한참이나 작았으니 말을 다 한 것이다. 물론 어깨 양쪽으로 길고 날카로운 뿔이 나 있었지만, 그저 장식인 줄로만 알았다. 신체 일부가 기형인 괴물이 흔히 있어서, 놈의 뿔도 그중 하나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놈을 너무 우습게 본 듯했다.

첫 만남에서 놈은 고울이 우두머리가 된 이후 우리 중 누구도 하지 않았던 짓을 시도했다. 고울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

그것은 우두머리를 새로 가려 보자는 의미, 즉 도전이었다. 고울은 거부하지 않았다. 우리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고울이 르피레를 한 방에 때려눕힐 수 있다고 예상한 것이다.

결과는 반전이었다. 작디작은 르피레의 몸놀림은 아주 날쌨고, 그 어깨의 뿔은 생각보다 위협적이었다. 고울은 옆구리에 스치듯 상처를 입었지만, 본능적으로 우열을 판단한 건지 싸움을 중단했다. 그리고 바로 르피레에게 무릎을 꿇었다. 괴물들의 우두머리가 검은 거인에서 뿔 달린 붉은 원숭이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절망적이었다. 내 지루하고도 안온한 지옥의 일상은 고울이 우두머리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르피레가 다른 괴물들과 다르고 약한 나를 좋게 대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불길한 예상은 들어맞았다.

서열이 가려지자, 르피레는 나를 보았다. 무리 중 내 외모만 유독 튀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나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만지고 냄새를 맡았다. 고울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내 성기도 멋대로 잡아당겼다. 그러나 고울의 동생이 호감과 순수한 호기심에 그러한 일을 했다면, 이놈은 달랐다. 히죽 웃으면서 날 건드리는 것이 사악하고 저열해 보였다.

‘앞으로 이놈은 내 거다. 이 몸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주도록 하지.’

그리고 그날, 나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르피레에게 당했다. 나보다 덩치가 한참이나 작은 녀석에게 굴복하고야 말았다.

고울에게 맞았을 때도 울지 않았던 나였다. 하지만 그날은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늘 끝을 생각했다. 그 끝은 죽음 아니면 탈출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으로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깟 붉은 원숭이 놈이 무섭다는 이유로, 이 지독하게 이어져 왔던 지옥에서의 삶을 변화 한 번 맞이해 보지 못하고 죽긴 싫었다.

탈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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