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먼 길을 떠나는 우리를 보고 르피레가 막아서며 외쳤다. 어딜 가냐고, 가서 언제 돌아오냐고 따지는 것만 같았으나, 기온은 그를 무시했다.
달려드는 르피레도 르피레인데, 고울도 기온을 막아섰다. 그 검은 거인 역시 기온의 차림을 보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물론 기온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기온의 관심은 오직 나와 앞으로 갈 길, 그뿐인 듯했다. 그는 르피레가 행여나 공격할까 봐 나를 감싸고, 무조건 앞으로 향했다. 뒤돌아보지 않았고, 어떤 말도 괴물들에게 하지 않았다.
걷고, 또 걷고, 어느새 괴물들이 보이지 않는 시점이 되었다. 그는 내가 배고플 때나 목이 마를 때마다 귀신 같이 알아채고 음식과 물을 주었다. 든든하게 먹는다고 해도 오랜만에 장시간 걷는 거라 체력 소모가 심했다. 서너 시간 만에 나는 지쳐서 주저앉았다. 그러자 기온이 아예 나를 업고서 마저 걸어갔다.
“넌 체력도 좋네.”
「에이, 굳이 고맙다고 안 해도 돼. 내가 가자고 한 건데, 미안해지잖아.」
달이 뜨기 전이었다. 가까운 곳에 바위 무더기가 있었다. 과거에 이곳에 머물렀던 괴물들이 바위로 요람이라도 만들었던 모양이다. 쉬기에 좋은 곳 같았다.
나는 기온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기온이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도, 기온도, 둘 다 힘들어. 이제 좀 쉬자.”
나는 그의 등에서 내려와 바위 요람으로 걸어갔다. 기온도 별말 없이 나를 따라왔다. 동굴 아닌 곳에서 노숙하기는 낯설었지만 처음은 아니었다. 군에 입대한 뒤에도 훈련으로 몇 번 해 본 적이 있으니까. 다행히 춥진 않았고 바람도 세게 불지 않았다.
기온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탄내 꽃을 따서 말려 빻은 가루였다. 그는 그 가루를 제 온몸에 바르더니, 내 몸에도 똑같이 하라고 몸짓을 보였다.
처음엔 의도를 몰랐으나, 서서히 알 것 같았다.
「안고 자고 싶어.」
“응?”
「밤바람이 차가울지도 모르니까. 안고 자면 따뜻하잖아. 하지만…… 그럼 욕심이 생길 거고, 꼭 욕심이 아니더라도 저 달빛이 날 괴물로 만들 수 있으니까. 어쨌거나 널 괴롭히긴 싫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래도 그냥, 발라 줘.」
“이거 봐. 땀 때문에 꽃가루가 떡이 진다. 그래도 좋네.”
둘이서 웃으며 누웠다. 피곤해서 그런지 금세 눈이 감겼다. 잠들기 전에 그가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웃겼다. 언젠가 내가 그에게 가르쳐 주었던 유행가였으니까. 똑같이 부른 건 아니었고, 아주 느리고 부드럽게 부르는데 제법 잘 부르기도 했다.
“편곡이 수준급인데? 아무튼 고마워.”
그러자 그가 더 나를 꼭 껴안았다.
포옹은 잠으로 이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될지도 몰랐는데, 온 세상이 그와 나의 요람처럼 느껴졌다.
* * *
깨어나니 배가 너무 아팠다. 37 기지에 온 후로 늘 시달리던 복통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강도가 셌다.
이유가 뭘까.
아무래도 오랜만에 닭고기를 먹었던 게 문제인 걸까? 아니면 그동안 기온이 구해다 준 식물들을 먹어서일까?
「예쁜아, 오늘도 걸을 준비 됐어?」
나는 기온에게 웃어 보였다. 괜한 걱정을 안기기 싫었으니까.
“빨리 일어나서 가자. 기온. 나 오늘 쌩쌩해.”
우리 둘은 간단히 요기하고 다시 걸었다. 언제 이 여정이 멈출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막막하지 않았고 두렵지도 않았다.
「걸음이 힘차네.」
“응? 잘 걷는다고?”
「기쁘게 따라와 줘서, 정말 고마워.」
“오늘 공기 좋아.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아. 볼래?”
「윤해! 뛰지 마! 처음부터 기운 빼면 안 돼! 윤해! 예쁜아!」
햇빛 아래서 뛰고 걷다 보면 복통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내가 목마를까 봐 이따금 물을 주는 그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진작 이렇게 나올걸.
그런 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마지막 남은 물을 다 마시고 물통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으음. 미지근하네. 조금만 더 가면 시원한 거 마실 수 있어. 조금만 참아. 윤해.」
준비해 온 물이 다 떨어지는 건 뭘 뜻하는 걸까.
아무래도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걸 의미하겠지?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 * *
달이 뜨기 전이었다.
나는 기온의 가방에 손을 가져가 꽃가루를 발라야 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기온은 꽃가루를 도로 가방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다시 길을 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여태 보아 왔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풍경이 보였다.
“어. 저기…… 뭐야? 초록이 가득해!”
나는 손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협곡의 황량한 풍경만 보다가 풀과 나무가 어우러진 곳을 보니 저절로 목소리가 기분 좋게 높아졌다.
기온은 그런 나를 보며 씩 웃었다.
「좀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는 여정일 거야. 우리 조금만 더 걷자.」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를 따라 걷는 내 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초록이 가득한 그곳으로 달려갔다.
“헉, 헉…….”
「헉…… 힘들지?」
눈앞에 펼쳐진 초록 동산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못이었다. 고울 키의 3배만 한 지름의 못이 맑은 물을 품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싱싱한 풀과 나무가 가득 자라나 있었고, 열매가 달린 나무도 많았다. 기온에게서 받아먹었던 온갖 과일들이 다 그곳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곳곳에 피어난 색색의 꽃들도 너무 예쁘고 향기로웠다.
“이거 꿈 아니지? 왜 이런 곳을 이제야 보여 준 거야? 응?”
「좋아하니까 보기 좋다.」
“와. 물도 엄청 시원하고 달아! 우리가 있던 곳의 계곡물과는 비교도 못 하겠어.”
「실컷 마셔.」
물을 시원하게 마시고 턱을 닦는데, 옆에서 기척이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주먹만 한 파랑새가 우리 주변을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있었다. 통통한 게 귀여웠다. 펭귄처럼 몸에서 날개가 차지하는 비율이 작아서 그런지,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얘, 뭐야? 너무 귀엽다.”
새는 도망가지도 않고 내 손에 폴짝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귀여운 것도 잠시.
나는 파랑새에서 몹쓸 희망을 느끼고 말았다.
어쩌면 이것도 치킨 대용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였다.
그 기대가 커질수록 새를 손에 두는 것이 죄스러워져, 기온에게 건넸다.
“기온! 얘 좀 저 멀리 치워 줘!”
「응? 왜? 귀여워하더니.」
“뭔가 좀 그래. 안고 있을수록 죄책감이 들어. 안 돼. 저건.”
파랑새를 기온에게 넘기는데, 눈에 들어온 특이한 점이 있었다.
모두 싱싱한 가운데, 단 한 종류의 식물만이 축 늘어지거나 시들어 있었다. 시아로파였다. 그리 많이 피어 있는 것도 아니고 드문드문 보이는데 상태가 다들 안 좋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식물들도 종종 병에 걸린다지.
아아. 그동안 기온이 왜 시아로파를 점점 적게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얘네, 몹쓸 병이라도 걸렸나 봐.”
기온은 내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에 대답했다.
「이래도 먹을 만해. 봐 봐.」
그는 시든 시아로파를 뽑았다. 그러더니 축 늘어진 새순 부분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늘 그가 즐겨 먹었던 부분, 하지만 이제는 자주 먹기 어려워진 부분이었다.
새순에 이어 잎사귀까지 다 먹은 그는 남은 줄기를 저 멀리 던지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깊은 한숨을 쉬었다. 씁쓸함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어.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시아로파만 시들어. 우리 보고 죽으라는 건지, 뭔지. 아. 물론 나는 윤해가 주는 닭고기도 충분히 맛있었지만 말이야.」
그에게 위로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희망을 주지 못할 위로라면, 차라리 적어도 공감이나마 해 주고 싶었다. 뜻이 통하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시아로파들이 저 지경이라 기운이 안 난다는 거지? 흠. 확실히 너희 주요 식량이니 좀 걱정되긴 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한 열매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연두색으로, 일반 바나나보다는 좀 컸다. 그리고 울퉁불퉁하고 털이 난 껍질이 있었다. 어찌 보면 완두콩 껍질 같기도 했는데, 지금껏 기온이 내게 단 한 번도 가지고 오지 않았던 식물이었다.
저것도 껍질을 벗기면 바나나처럼 달콤한 속살이 있을지도?
하지만 그런 과일이라면 진작 내게 가져왔을 테지.
그때, 울퉁불퉁한 열매 껍질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마치 안에 커다란 벌레가 들어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저거 신기하다.”
호기심에 그 털 열매를 만지려 했다.
그러자 기온이 고개를 저었다.
「웬만하면 만지지 않는 게 좋…….」
손끝이 털 열매에 닿은 순간이었다. 열매 껍질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반짝이는 뭔가가 툭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만지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려 했는데.」
바닥에 떨어진 물체는 순식간에 빛을 잃고 축 늘어졌다. 기온은 넓은 잎으로 그것을 감싸 쥐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서 내려놓은 다음 다시 내게로 왔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슬픔과 예민함이 느껴졌다.
「다음부턴, 만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