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순간, 나는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있었다.
서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갑작스럽게 뺨에 키스해서일까?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키스는 장난스러워서 딱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더 진지하게 느껴지는 건…….
「정말이지 윤해 네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특히 요즘 같아선.」
내 이름을 똑바로 불러 주는 그의 목소리. 친절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이 담뿍 담긴 그의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해석할 순 없지만, 그가 저를 왜 빤히 보느냐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딴 데로 두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낯익은 동물이 보였다.
“저건……!”
닭이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식량이었지만, 37 협곡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식용 동물.
그걸 본 순간 군침이 확 돌았다.
“치킨이야! 드디어 치킨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응? 치…… 뭐라고?」
나는 있는 힘껏 달려 닭을 쫓았다.
그런데 닭을 쫓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쿵! 쿵! 쿵! 쿵!
고울도 육중한 몸으로 뛰며 닭을 쫓았다. 고울의 덩치가 커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옆으로 르피레도 빠르게 쫓아가는 게 보였다.
짧은 순간에 르피레가 나를 얄미운 눈초리로 보았다. 어디 따라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는 듯 도발적인 모습이었으니까. 게다가 르피레가 닭을 쫓는 이유도 궁금했다. 르피레는 대부분 식물만 먹던 괴물이 아니었던가?
설마 나한테 닭을 빼앗기기 싫어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달리는 거라면?
더욱더 질 수 없다!
이건 닭을 먹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기 싸움이었다. 유치하게 괴물과 겨루고 싶지 않지만, 저놈에게만큼은 꼭 이기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와 나의 신경전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려나 하는 순간.
「꺼져. 이건 윤해 거야.」
번개처럼 빠른 기온이 닭을 먼저 잡고서 부하들에게 으르렁거렸다.
고울은 어깨를 으쓱이며 물러났고, 르피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르피레는 물러나면서도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참고만 있을 수 없어서 나도 똑같이 노려봐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르피레가 내 시선을 외면했다.
시선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르피레는 내게서 시선을 거둔 뒤 기온을 향해 냉소를 지었다. 사악해 보였다. 우두머리를 보고 짓는 웃음치고는 좀 도발적인 것 같기도 했다.
곧 르피레와 기온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긴장감이 팽팽해서, 언쟁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고기도 못 먹게 해! 이곳의 모든 동물이 저 암컷 것인지?」
「닥쳐! 르피레 넌 어차피 고기도 안 먹잖아.」
「난 안 먹어도 고울은 먹는다!」
「그래서? 고울은 마음만 먹으면 다른 짐승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는데?」
「애초에 시아로파를 구해 주지 않았다! 닭 한 마리! 우리는 부족해! 그래도 먹고 싶다! 그래서 잡았던 거다!」
「닥쳐! 나한테 기대지 마!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기온! 너도 우리에게 기댄 적이 있었다! 그걸 잊었나? 너도 약한 놈이었던 걸 잊었나?」
「이 새끼가…….」
평소답지 않게 르피레는 기온에게 끝까지 맞섰다. 기온도 르피레에게 한 방 날릴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과열되는 긴장을 견디지 못한 건 나뿐만 아니라 고울도 마찬가지였다.
고울은 기온을 저지했고, 나 역시 기온의 등에 손을 가져갔다.
“저기,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싸우지 마. 싸우지 말라고. 응?”
이건 알량하게 평화를 원해서 말리는 건 아니었다. 순전히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기온이 우두머리이긴 하나, 세상일엔 만에 하나란 게 있었다. 까딱 잘못하여 몸싸움까지 시작된다면? 그래서 르피레가 운 좋게 승리한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기온이 패배하거나 죽은 후의 내 안전은 바람 앞의 등불만도 못 하게 될 것이다.
“나 무서워. 싸우지 마. 뭣하면 이거 다 같이 나눠 먹자. 그러면 되잖아. 응?”
나는 그들에게 닭을 가리켰다.
그러자 르피레는 비웃었고, 기온은 나를 달랬다.
「놀랐지? 걱정할 거 없어. 아무 일도 아니니까. 르피레 저놈한테는 신경 쓰지 마. 윤해.」
또.
또 윤해라고 불러 준다.
나는 다정한 그의 목소리에 안심할 수 있었고, 르피레도 결국 기온에게서 물러났다.
노을이 졌다.
밤이 다가오기 전에 동굴로 피해야만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제7장. 낙원행
동굴 속에서 캠핑하는 기분이 바로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일까?
기온은 탄내 꽃밭 위에 넓대대한 돌을 깔고 그 위에 마른 나뭇가지를 잔뜩 올려다 두었다. 그리고 다른 마른 나무 토막으로 마찰해 불을 피우려고 애썼다.
“굽는 거야, 진짜? 진짜? 좋아! 최고야! 세상에, 여기서 치킨이라니. 여기서 내가 치킨을 먹다니.”
누구보다 치킨이 먹고 싶었던 나는 손 놓고 구경만 하지 않았다. 이미 직접 닭의 목을 비틀어 죽였고, 털을 뽑았으며, 내장을 빼내 손질한 후였다. 신이 나서 손질한 닭을 계곡물에 씻어 왔다.
기온이 불 피우기에 성공하자, 우리는 닭을 굽기 시작했다.
평소에 느끼던 복통과 두통도 닭을 먹을 생각에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오븐 치킨이나 다름없지. 얼마 만이냐. 이게.”
한참 후, 손질된 닭이 돌판 위에서 지글지글 맛있게 익어 갔다.
“아아, 냄새 좋아. 진짜.”
소금이 없어도 괜찮았다. 기온이 내게 자주 가져다주는 과일 중에는 토마토보다 더 짠맛이 감도는 열매가 있었는데, 그 즙을 닭 표면에 골고루 발라 두면 간이 그럭저럭 맞을 것이었다. 좀 부족하긴 해도 촉촉한 저염식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게다가 무려 닭구이가 아닌가!
나는 익을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닭만 보았다. 분홍색에서 황금색으로 변해 가는 닭을 보는 기분은 37 기지에 와서 느꼈던 기분 중 최고로 기쁘고, 짜릿했다.
“아아, 드디어 다 됐어. 드디어!”
껍질이 바삭하게 익어 갈색이 되었다, 가장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상태!
나는 불을 껐다. 옆에서 기온은 깨끗한 풀잎 위에 닭구이를 올려 주었다. 자연스럽게 빠른 손놀림이 참 신기했다. 닭구이가 뜨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뜨거운 기운이 얼른 날아가라고 나랑 같이 후후 불어 주기도 했다. 서로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닭구이가 완전히 식었을 때, 나는 닭다리 하나를 그에게 먼저 건넸다.
“기온도 먹어.”
기온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그는 인간의 음식엔 손대지 않을 모양이었다.
싫었다. 닭 하나로 이 고생을 왜 했는데. 단지 나 혼자 잘 먹으려고 한 건 아니지 않은가. 언제 다시 이런 것을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만 먹기는 어색하고, 또 미안했다.
게다가 닭구이를 눈앞에 둔 그의 반응도 평소와는 좀 달랐다.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표시를 하고 있긴 하지만, 눈빛이 먹고 싶은 걸 드러낸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를 맡는 모습까지. 욕망이 느껴졌다. 그도 이걸 먹고 싶은 게 틀림없었다.
하긴, 그깟 시아로파 풀 줄기만 먹고 사는 게 애초에 말이 안 되지. 너도 고기를 좀 먹어야 해.
나는 닭다리의 살점을 뜯어 기온의 입술로 가져갔다.
“먹어 줬으면 좋겠어. 맛있거든, 정말.”
「윤해…….」
“옳지. 그대로 먹어. 맛있어. 진짜.”
기온은 내리깐 눈으로 내 손을 보다가 조금씩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씹기 시작하더니, 금세 꿀꺽 삼켰다. 그사이 보인 표정 변화가 미묘했다.
「뭐지, 이거?」
“어때? 맛있지? 크하하. 맛있구나. 표정에서 딱 보여.”
「날지도 못하는 새가 이렇게 맛있었던 거야?」
“자, 이 닭다리 너 다 먹어. 나머지 하나는 내가 먹을 테니.”
우리는 닭고기를 남김없이 해치웠다. 뼈에 붙은 살점 하나도 버리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다 먹은 후, 배가 부르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기온아. 앞으로도 이게 많이 잡혔으면 좋겠다. 고울도 주게.”
「그러게.」
“이런 조리법으로 먹으면 고울도 좋아할 거야.”
「그러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고 대꾸하는 거야?”
「그러게.」
다 먹은 후, 언제나처럼 우리는 시아로파 가지를 들었다. 잎사귀는 없고 줄기만 남은 그것은 끄트머리가 잘 갈라져 칫솔로 쓰기 참 좋았다. 기온도 시아로파 가지를 들었다. 몇 분 간 말없이 양치질을 하고, 쓰고 남은 가지는 동굴 밖 강물로 던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거울처럼 똑같은 행동이었다.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며 웃는 것까지.
“가지가 많이 없네.”
「몇 개 안 남았어.」
“요새는 구하기 힘든가 봐?”
「큰일이다. 구하기 힘들어져서. 우리 윤해 이 닦을 것도 없어지면 안 되는데.」
“이거 없어지면 우리 뭐로 양치질 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여기선 내가 뭐든 대장이니까.」
“뭔지 몰라도 참…… 너 보니까 안심된다.”
재잘재잘 떠들던 목소리가 동굴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줄어들었다.
조용해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방금, 서로 같은 말을 했단 건 알 수 있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좋았다. 언어가 달라도 통할 것은 결국 통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보다.
어느샌가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나는 물었다.
“왜?”
진지한 그의 눈이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달싹이는 입술이 내 이름을 말했다.
「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