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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15화 (15/43)

15화

문득 궁금해진 건, 그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빠르게 가려 했다는 건데…… 대관절 그 장소가 어디였을까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음이 가상했다. 적어도 여전히 그는 재환보다 나은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아침부터 단맛, 짠맛, 신맛 온갖 맛이 나는 특이한 과일을 구해다 주고, 마실 물을 협곡 아래 강에서 퍼 와 주고, 지저분한 담요를 쨍쨍한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서 가져다주고, 하는 김에 페이퍼 컴퓨터 충전도 해 왔다.

표정만 봐도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듯했다. 아주 충실한 비서 노릇을 해 주니 이 협곡의 주인이 기온이 아니라 내가 된 느낌이었다.

지옥 속에서 내게 허용된 작은 낙원이라면 바로 이 동굴이 되겠다.

점점 만성적으로 변해 가는 현기증과 복통, 두통만 어떻게 좀 다스리면 좋을 텐데.

솔직히 기온이 주는 물과 과일로 연명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사람의 몸은 그런 단순한 음식만으로는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다. 탄수화물도 필요하고, 단백질도 필요하다. 물론 기온이 가져다주는 과일 중에는 바나나처럼 탄수화물이 꽤 느껴지는 게 있었고, 신맛과 단맛을 포함해 쓴맛과 심지어 짠맛이 나는 과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과일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고기와 기름이 필요했다. 최소한 콩이나 짐승의 기름이라도 좋았다.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할 수 있는 음식이라면, 어떤 음식도 상관없이 먹어 치우고 싶었다.

“치킨…….”

튀긴 것까진 필요 없다. 삶은 거라도 상관없다. 닭 반 마리 정도만 있어도 나를 괴롭히는 이 무기력증과 어지럼증에서 벗어나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편해지면 뭐 할까? 어차피 편해져 봤자 37 기지인데.

“하아……. 네가 잘해 주긴 참 잘해 줬나 보다. 반찬 투정을 다 하고. 뭐든 잘 먹을게. 뭐든……. 오늘도 이렇게 많은 과일 가져다줘서 고맙습니다. 진짜.”

나는 기온이 가져온 과일을 앞에 두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러자 기온이 ‘흐흐’하고 웃었다.

그의 앞에서 최대한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했다. 이건 나름대로 고마움의 표시였다. 항상 내게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잘 먹는다. 우리 예쁜이.」

그는 내가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시아로파 가지를 들고 잎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도 배고팠는지 걸신들린 듯이 먹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시아로파가 싱싱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뜯어 와서 좀 말라 가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즐겨 먹던 새순과 함께 그 아래 억센 잎 부분까지 먹었다.

설마 날 간호한다고 새로운 시아로파를 가지고 올 틈도 없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나에겐 이렇게 온갖 과일을 가져다주고, 정작 자신은 대충 때우려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신기했다.

괴물에게 이런 이타심이 가능한 걸까.

전에도 몇 번이나 했던 질문이었지만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때, 동굴 속으로 누군가가 걸어왔다. 동굴 안을 쿵쿵 울리는 불길한 걸음 소리는 예상대로 검은 거인 고울의 것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니 고울만 온 게 아니었다.

붉은 원숭이 르피레도 함께였다. 전에 어깨의 뿔 한쪽이 부러졌던 르피레는 늘 그렇듯 나를 벌레처럼 증오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궁금했다.

그들이 기온의 허락 없이 이 동굴 속 탄내 꽃밭이 있는 깊숙한 곳까지 온 적은 없었으니까. 표정을 보니 우두머리에게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고울의 커다란 두 팔에는 온갖 짐승들이 안겨 있었는데, 다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묻어 있는 피가 새빨갰다.

죽은 짐승들에게서 나는 짙은 피 냄새가 기온의 기분을 거스르게 한 모양이었다. 그가 내 앞에서는 흘리지 않던 거친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

내가 보았던 다정한 태도는 싹 지운 모습이었다. 잔뜩 인상을 구긴 모습에서 괴물의 섬뜩한 분위기가 났다.

괴물들은 탄내 꽃밭 위까지 오려고 했다.

그러자 기온이 한 팔을 들었다. 목소리의 분위기로 느끼건대 경고였다.

「멈춰라. 이 꽃밭을 더럽힌다면, 죽인다.」

말을 마친 기온이 활짝 웃으며 괴물들에게 손짓했다. 그냥 거기 서 있으라는 의미 같았다.

내 예상이 맞는지 괴물들은 거기 멈춰 섰다.

그러자 기온이 나를 의식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헤헤. 잘했어. 우리 예쁜이 잠자리 더럽히면 안 되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르피레는 계속 나를 노려보면서 고울을 툭 쳤다.

그러자 고울이 르피레와 기온의 눈치를 보았다.

르피레는 머뭇거리는 그 태도가 못마땅한 듯 다시 한번 고울의 팔을 세게 쳤다.

퍽!

대체 고울로 하여금 뭘 하게 하려는 걸까?

르피레의 압박에 못 이긴 듯 한숨을 쉰 고울은 품 안에 안고 있던 짐승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냈다.

피 묻은 짐승의 사체가 떨어지는 모습이 불안했다.

설마 저런 사체를 기온에게 먹으라고 가져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기온은 그들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듯 조소했다.

「뭐 하는 거지, 지금?」

르피레가 무거운 입을 열어 특유의 끔찍한 쇳소리를 퍼부었다.

「저 암컷을 당장 죽여라!」

「뭐라고?」

「죽여 달라고 했다!」

무슨 말이 오갔을까.

대체 르피레가 했던 말이 뭘까.

이 무더운 여름 동굴 안이 왜 이리도 싸늘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기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바닥을 보며 걷다가 르피레의 앞에 섰다.

우두머리를 앞에 둔 아랫것들의 반응이 달랐다.

고울은 긴장하듯 침을 꿀꺽 삼켰고 자꾸만 우두머리의 눈치를 살폈지만, 르피레는 우두머리를 향해 눈 한 번 끔뻑거리지 않았다.

기온은 그런 르피레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헛소리엔 매가 약이지. 어때? 이번엔 하나 남은 그 뿔도 없애 줄까? 좌우 균형도 좀 맞춰 주고, 응?」

그러는 동안 르피레는 시선을 옮겨 나를 보았다.

아프다.

눈빛으로 난도질을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돌연, 르피레는 꽃밭 위의 것들을 찬찬히 관찰했다. 기온이 구해온 온갖 과일과 시든 시아로파도 보았다.

시아로파를 본 르피레의 눈이 잔뜩 일그러졌다.

주식인 시아로파를 보고 눈을 찌푸리는 건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우두머리의 앞에서 적의까지 드러내니, 속을 통 알 수 없었다.

「대답해. 르피레. 왜 시비를 거는 거야?」

기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르피레가 말했다.

「내 남은 뿔을 주면! 저 암컷을 죽여 줄 거냐!」

「하. 뭐?」

「죽여 주냐고 물었다!」

이어진 침묵은 견딜 수 없는 긴장감을 드리웠다.

나는 이런 시간이 무안했고, 고울도 마찬가지인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웃느라 벌린 입에서 보이는 날카로운 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하얗다.

「아, 진짜.」

기온은 르피레의 말에 피곤함을 느낀 듯 손으로 목을 주물러 댔다.

그러더니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다시 차분히 말했다.

「이유부터 말하지 그래?」

「정말 견딜 수 없다!」

「그러니까 뭐가 견딜 수 없냐고!」

「우리! 배고프다! 우리! 시아로파 없어서 이런 짐승이나 먹어야 한다!」

르피레는 말하던 도중에 짐승의 사체를 턱으로 가리켰다.

「왜 저 암컷에겐 과일을 구해 주냐! 우리보다 저 암컷이 더 중요하냐! 으아!」

큰소리치며 씩씩거리는 르피레를 보고 고울이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우두머리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굴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고울도 곧 기온을 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대답해라! 뭐가 더 중요한지, 우리인가. 저 암컷인가? 저 암컷이 더 중요하다면 우리는……!」

르피레의 목소리가 점점 고양되어 외침으로 변하기 직전, 고울이 르피레를 툭 쳐서 옆으로 좀 물러나게 했다.

「이쯤 이야기하면 됐다. 그만 가자. 르피레.」

고울은 르피레에게 달래듯 말하고 우두머리에게 인사했다.

「그럼 우리 이만 간다.」

그들이 떠나고도 기온은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체 고울과 르피레가 무슨 말을 했기에 기온이 저리도 어두워진 걸까?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기온의 얼굴에서 어색한 웃음이 번졌다.

「미안. 내가 너무 말이 없었지.」

그는 나를 꽉 껴안아 주었다. 마치 별일 없다고 말하듯,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을 주는 몸짓이었다.

그 포옹에 나는 느꼈다.

아까는 단순히 치킨을 먹고 싶다는 욕구만 있었는데, 이제는 그에게도 치킨을 먹여 주고 싶다는 마음을.

* * *

몸이 회복되어 제법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복통과 두통이 있긴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식물들을 자주 먹어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었고 또 참을 수 있는 정도였다.

날씨도 선선했다. 나는 낮에 기온을 호위 삼아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마음 편한 산책 같지만, 실은 괜찮은 단백질 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냥에 더 가까웠다.

내가 나다닐 때마다 르피레가 기분 나쁜 눈으로 보며 구시렁거렸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기온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 댔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많은 걸 소통할 수 있었다.

그의 눈빛만 보면 감정을 알 수 있었으니까.

“날씨가 선선해서 좋긴 한데 그래도 걱정이네. 추워지면 옷도 없는데 어쩌지……. 그나저나 우리는 왜 낮에만 산책해야 해? 밤에도 이렇게 걷고 싶은데. 아니. 관두자. 너나 나나 밤에는 꽃밭 위에 있지 않으면 몸이 이상해지니 함부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윤해. 재잘거리는 너 때문에 내가 힘을 얻어. 알아?」

“이건 어때? 동굴 꽃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서 온몸에 치덕치덕 바르고 밤길을 걷는 거. 왠지 효과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눈을 반짝일 때도 좋아. 왠지 기운이 나. 새로운 생각이 마구 떠오를 것 같기도 하고.」

“너도 동의하는 거지? 그런 거지, 응? 기온?”

「가장 좋을 때는 뭔지 알아? 윤해 네가 내 이름을 불러 줄 때야. 지금처럼.」

기온은 걸음을 멈추며 나를 세우더니 내 뺨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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