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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14화 (14/43)

14화

하이퍼 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 그의 먹이인 시아로파가 나는 곳, 게다가 내가 먹을 수 있는 식량도 있는 곳, 그런 곳으로 가면 우리 둘 다 인간들의 실험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머릿속에 암울이 진흙처럼 들이닥쳤다. 현실을 생각하다가 결론은 다시 비현실로 가 버리니 상상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당장 더위도 문제지만 다가올 겨울도 걱정해야만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갑작스럽게 헬기 안으로 들어온 그가 뭐라고 말했다.

나는 상심의 늪에서 나를 건져 내려 애쓰며 겨우 대답했다.

“……심심해.”

「응?」

“동굴 아니면 헬기 아니면 강가. 맨날 가는 곳만 가고. 하는 것만 하고. 다른 곳에 가 보고 싶어. 인공 달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면 좋겠어. 치킨이 있는 곳이면 좋겠고. 네가 먹는 그 식물도 잔뜩 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아니. 다 의미 없어. 그냥, 그냥 돌아가고 싶어. 살던 그곳으로. 과거로. 시원한 연구실로. 아니. 방재환이 없는 곳으로. 그것도 싫어. 그래. 그게 좋겠다. 그놈을 만나지 않았던 시절로. 혹시 기온 너, 회귀 가능해? 시간 되돌리는 것 말이야.”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빛이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보는 그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내 마음을 그의 얼굴을 통해 보는 느낌.

놀라웠다. 타인을 통해 거울을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37 기지에서 가능할 줄이야.

나는 기온의 얼굴을 가만히 만지며 웃었다.

“헛소리 들어 줘서 고마워. 그나마 너라도 있으니까 내가 이런 말도 하고 사네.”

그는 그 뒤로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눈빛은 뭘까.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왜 저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는 걸까.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오랫동안 보는 그의 시선이 민망해서 나는 담요를 얼굴까지 덮어썼다.

그런데 돌연 그가 그 담요를 홱 걷었다.

이름이 들렸다.

언젠가 그에게 가르쳐 주었던, 나의 이름.

「유, 유운, 해. 윤해.」

그는 날 꽉 끌어안았다.

윤해.

그에게 몇 번이나 가르쳐 줬지만 그는 그 이름보다 ‘타리(예쁜아)’라는 알 수 없는 단어로 나를 불렀다. 추측으론 윤해라는 발음이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 듯하다.

처음으로 그에게 제대로 불린 이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얼마 만에 타인이 불러 주는 내 이름인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괴물이 제대로 된 발음을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내겐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37 기지라는 원시의 공간에서, 잊히던 내 자아를 다시 되돌려 받은 느낌이었으니까.

가슴에 와닿는 감동을 애써 외면하며 그의 몸을 밀어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부르는데?”

「윤해. 너한테 선물 주고 싶어졌어.」

“선물?”

그는 다시 나를 안았다.

아까는 그저 따스하게 안아 주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꽉 고정하듯 안는다.

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걸까.

음험한 짓을 하려고 그런 거라고 생각되진 않지만, 혹시 모르니 그래도 떨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더더욱 단단히 껴안았다.

귓가에 그의 속삭임이 닿았다.

「약속할게.」

뭔지는 몰라도 아주 달콤하게 들렸다.

「네가 너무 우울해 보여서 안 되겠어. 동굴보다 더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게.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는데, 나만 갈 수 있는 곳인데, 너는 데려가도 될 것 같아. 그곳…… 그러니 날 꽉 잡아야 해. 아주 엄청나게 빠를 거거든.」

그가 말하면서 몸을 밝혔다. 점점 눈이 부실 정도가 되었다.

뭘 하려고 이렇게 몸을 빛내는 건지.

그의 말이 모두 끝났을 때, 아뜩함이 내 온몸을 덮쳤다.

공간이 나를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 내가 공간을 빠르게 지나간 듯했다.

너무 빠른 속도에 온몸의 감각이 일시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악!”

몸에 닿는 바람이 아프다. 마치 엄청난 위력으로 부딪치는 바위처럼 느껴졌다. 내 몸이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몸이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고통은 왼쪽 허벅지에서도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 했다.

기온은 나를 안고 대체 뭘 한 걸까?

눈을 떠서 보니, 나는 헬기에서 약 5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바위엔 핏자국이 선명했다.

분명 내가 부딪쳐 생긴 자국일 것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기온이 신음하고 있었다.

생각이 정리되었다.

이건 사고였다.

그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려다가 실패한 것이다. 그의 비정상적인 빠르기를 내 몸이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고.

“아, 아파. 너무 아파!”

왼쪽 허벅지에서 피를 쏟아 내는 나와는 달리 그는 별다른 외상은 없어 보였다.

나를 심히 걱정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 이 사고가 고의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아프다 보니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으흐흑…….”

「미안!」

기온이 나를 보곤 서둘러 안아 일으키며 연신 외쳐 댔다.

「진짜 미안해! 이런 게 아니었어! 나는, 단지 나는…… 이렇게 될 줄 진짜 몰랐…… 아. 안 돼. 안 돼!」

그는 내 허벅지를 보곤 화들짝 놀라 외쳤다. 허벅지에선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은 것처럼 피가 쏟아졌다.

그리고 이런 출혈이면 보통은 죽는다.

보통은.

눈이 감겼다.

「아아아아악! 망할!」

* * *

나는 누워 있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구름 위를 이불처럼 여기며 편히 누운 상태였다.

햇님이 친절했다. 햇님은 내 입에 끊임없이 맛있는 별사탕을 주었다.

아무래도 여긴 천국인 모양이다.

죽어서 천국에 온 것일 테지.

그런데 기온은 여기 왜 따라왔지?

「일어났네? 아. 살았다! 살았어!」

그는 나를 와락 껴안고 기뻐했다. 그의 목소리는 울음에 젖어 축축하게 떨렸다.

「윤해, 내가 진짜…….」

별사탕을 주던 햇님은 진짜 햇님이 아니라 기온이었다. 별사탕은 그의 몸에서 나오는 빛의 알갱이였고.

나는 그에게 안긴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 속 탄내 꽃밭 위였다. 동굴 바깥의 하늘엔 하이퍼 문이 떠 있었고, 탄내 꽃은 덥고 건조한 날씨에도 왕성한 생장력을 뽐내 더 보송보송하게 올라와 있었으며, 그는 안도의 한숨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빛 알갱이들이 성수처럼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깨어나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마 내가 널 살린 거 같아. 내 몸이 널 살린 거 같다고!」

목소리엔 안도뿐 아니라 감사함, 기적, 기쁨, 뿌듯함이 녹아 있었다. 그가 기쁨에 난리를 칠수록 나는 귀가 아팠고 몸은 더 축 늘어졌다.

참, 허벅지는 어떻게 되었더라?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이것 좀 놔줘. 기온.”

나는 그에게서 좀 떨어져 허벅지를 확인했다. 멀쩡했다. 그에게 안겨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다가 피를 콸콸 흘려 기절한 것치고는 거짓말처럼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좀 어지러운 것뿐이었다.

“치유력까지…… 굉장한데. 하지만 이제 끝이야. 건드리지 마.”

나는 경고하곤 꽃밭 위에 누웠다.

그런 내가 좀 무서워 보였는지 아니면 죄책감 때문인지, 그가 슬금슬금 물러나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를 보는 눈빛엔 내가 무사히 깨어났단 사실에 대한 기쁨과 안도가 보였다.

「그래. 쉬어. 다시는 그런 실수 하지 않을게. 난 단지 널 위로해 주려고 했어. 진짜야.」

“말도 하지 마. 나 다시 잘래.”

「네가 인간이란 걸 깜빡 잊었어. 너를 안고 출발하면 그곳까지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할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쉬잇! 시끄럽다고 했어.”

나는 손가락으로 입에 가져가 조용히 하라고 다시 경고해 보였다.

그제야 기온은 돌아서서 물러나 주었다.

물론 끝까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지만.

「천국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나만 아는 천국을.」

제6장. 신경전

‘올해는 마가 낀 해가 분명해.’

어릴 적 할머니가 집안에 안 좋은 일이 터졌을 때 하시던 말씀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중얼거리는 말도 된다.

“올해는 온 세상의 마가 나한테만 낀 게 분명해.”

37 기지에 떨어져, 재환에게 배신당하고, 처음 보는 괴물과 괴상한 동거를 하고, 그 괴물 때문에 다쳐서 며칠을 앓아눕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어지럼증을 느끼고, 정말이지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푸념하거나 화낼 상대도 없었다.

저번 사고 이후 기온은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해 주었다. 그런 그에게 얼굴을 구기며 화를 내기도 마뜩찮았다.

아무리 봐도 사고는 그의 실수였다. 그는 그것을 몇 번이나 사과했다.

‘그거면 됐지.’

물론 죽을 뻔한 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살아났으니 그것으로 만족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게다가 그는 괴물이었다. 천사같이 행동해도 오직 나에게만 그러할 뿐, 여전히 제 부하들에겐 무섭고 포악하게 군림하는 우두머리였다. 내가 그에게 짜증을 낸다고 해도 그가 언제까지 좋게만 받아 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직 그의 인내심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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