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그러고 보니, 그는 꽤 좋은 모델이었다.
학창 시절 취미를 가지라고 부모님이 나를 미술 학원에 보낸 적이 있었다. 기온은 그때 종종 그리곤 했던 조각상과 매우 닮았다. 그때는 조각상이 너무나 그리기 싫고 귀찮아서 울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지금은 글쎄…….
언제부턴가 내 손은 기온을 그리고 있었다.
흐물흐물한 선이지만 집요하게 기온의 모습을 흉내 냈다. 나보다 기다랗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매끈한 이마와 매력적으로 팬 눈매, 오뚝 선 코와 살짝 벌린 입술, 그리고 날카로운 턱까지, 최대한 기온과 닮도록 노력했다.
이제는 몸을 그릴 차례였다. 하체에는 그가 자주 두르는 가죽을 질감을 살려 그렸고, 정수리에는 시아로파로 만든 왕관을 그려봤다. 시아로파로 왕관을 만든 적은 없지만, 그게 그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 주변엔 번개의 표시도 그렸다. 번개처럼 빠른 자의 옆에는 번개 모양이 있어야 했다.
그리다 보니 재미가 들려 점점 장식적인 그림이 되었다.
어느새 페이지가 꽉 찼다. 좀 서툴긴 해도 이 정도면 화가들 솜씨 못지않았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으쓱해져서 기온에게 이 그림 좀 보란 듯 손짓했다.
그런데 어째 기온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일그러진 미간과 쫙 내리깔린 눈썹에서 상심의 감정이 느껴졌다. 시아로파의 싱싱한 새순이 똥에 빠지면 이런 표정을 지을까?
그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적어도 물에 비친 나는 좀 괜찮았는데. 이건 진짜…….」
“응?”
「난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어.」
제5장. 실수
그림을 그리고 놀던 날부터 또 며칠이 흘렀다.
시간이 멈추었다고 생각했다. 구조될 희망 없이 갇힌 상태라, 내 시간은 이곳에서 아예 멈췄다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멈춘다는 건 불가능하다. 월경이 끝났고, 나는 연습을 거듭해 기온을 좀 더 멋지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울고 싶을 정도로 더웠다. 언제나 사람이 활동하기 좋은 온도를 유지하는 연구소에서 지내다가 에어컨 없는 한여름의 37 기지에서 버티기란 녹록치 않았다.
그나마 동굴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동굴 꽃밭에 있으면 강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했고 공기도 외부보다 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덥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기대하게 된다. 기온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엄청난 빠르기의 소유자. 그렇다면 냉각의 초능력도 혹시 가지고 있지 않을까?
말은 통하지 않지만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지금 그는 곁에 없었다. 동료들에게 줄 시아로파를 구하러 간 듯했다. 괴물들의 식량 담당은 언제나 그였다.
물론 그는 내 식량을 담당하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배고플 때면 늘 그가 가져다준 과일을 먹었다. 지겨워할까 봐 배려한 것인지 늘 다른 과일을 가져다주곤 했는데, 그마저도 질릴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에 좀 맞지 않은지 배가 아프기도 했고.
아플 땐 일부러 몇 끼를 굶었다. 굶다가 먹으면 어떤 과일이든 입에 치킨처럼 착착 감겼으니까.
과일 두어 개를 해치우고 있을 때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번개처럼 번쩍거리며 나타난 건 아니었고, 제대로 두 다리로 걸어서 왔다. 동굴의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오는 듯했다. 우두머리인 그도 더운 날씨엔 뾰족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걷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인 대회의 참가자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발뒤꿈치를 살짝 들고, 골반을 좌우로 흔들면서, 손으로는 얼굴을 향해 부채질했다. 표정은 무언가를 뽐내는 듯 도도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무엇보다 머리 모양이 웃겼다. 그는 긴 금발을 양 갈래로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다. 저런 스타일은 내가 5살 때 너무 유치해서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외쳤을 정도로 싫어하던 건데.
하지만 기온이 하고 있으니,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너무 깨잖아.”
크고 탄탄한 체격과 매력적인 마스크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해 줬는데, 저 괴상한 헤어스타일은 그가 다른 의미로 괴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일으켰다.
나는 만약에 그가 들었다면 화를 냈을 법한 의문을 제기했다.
“혹시 덜떨어졌나?”
「예쁜이, 뭐라고 하니?」
“덩치만 크지, 아직 새끼 괴물이거나 그럴 거 같아. 37 기지가 만들어진 게 수십 년 지났지만, 얘는 겨우 다섯 살이라거나…….”
「내 머리 칭찬하는 거?」
“아니. 판단 말자. 괴물의 변신은 무죄지. 뭘 하든 제 마음 아니겠어. 그런데…… 그런데 솔직히 너한테 머리 땋는 법 가르쳐 준 건 좀 후회돼.”
나는 고개를 저으며 기지개를 켰다. 여전히 그는 손부채질을 하며 우아하고 도도한 몸짓을 흉내 내고 있었는데, 그런 채로 내 몸 주위를 빙그르르 돌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러고는 손을 번개처럼 빠르게 뻗어 겨드랑이로 향했다.
“아얏!”
제비처럼 왔다가 사라진 손은 내 겨드랑이 털을 잡아당기는 짓을 저질렀다. 얍삽한 장난을 친 그가 다시 발뒤꿈치를 들고 뒷걸음질로 도망쳤다.
“날 도발해?”
어디 잡아볼 테면 잡아 보라는 듯한 표정이 얄미웠다.
“하아…… 기온, 너 인마.”
희한하게도 수치심보다 짜증이 더 컸다. 변태 같은 장난을 당했다는 느낌보다, 그냥 천진난만한 장난인데 좀 약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험한 욕이 나오려는데 그는 열심히 도망갔다.
어쩐지 이런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았다.
“하아.”
잡으러 가기 싫었지만, 애가 놀겠다는데 인간으로서 시늉이라도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얼마간 그를 따라 뛰어가 줬다.
그러다 금세 귀찮아져서 일부러 넘어졌다.
“더럽게 아파.”
얼얼한 겨드랑이를 만지면서 천장을 보았다. 그나마 바닥에 누우니까 덜 더웠다.
내가 쫓아가는 것을 멈추자 그도 멈췄다. 술래잡기를 안 하는 나에게 실망했는지 표정이 시무룩했다.
나는 그에게 겨우 손짓했다.
“더운데 기운 빼지 말고 그냥 이리 와 앉아. 아니면 눕든가.”
그는 심심한 개처럼 달려와 나를 건드렸다.
「이제 안 일어날 거야? 응?」
그는 내 팔을 마구 흔들었고, 노트를 내밀기도 했다.
그가 노트를 내미는 건 그림을 그려 달라는 뜻이었다.
더운데 그림은 무슨 그림. 내가 관심조차 주지 않자, 그는 이번에는 제 땋은 머리를 다 풀기 시작했다. 풀어진 머리는 펌을 한 것처럼 구불구불해졌고, 그는 그게 신기한지 좀 보라는 듯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아까 했던 생각이 다시 들었다.
“역시, 좀 덜떨어졌어.”
「응?」
“그런데 네 부하들은 그걸 모르는 거 같더라. 고울과 르피레 같은 애들 말이야.”
「고울! 르피레! 걔들이 왜? 여기 와서 예쁜이 괴롭혔어?」
“걔들은 너만 보면 너무 굽실거려. 네 이런 덜떨어진 점을 보고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 되겠다. 널 괴롭히다니. 이놈들. 내가 아주 혼쭐을 내 줘야……!」
그는 갑자기 표정을 구기며 일어나더니 동굴 저 멀리 뛰어갔다. 구겨졌던 표정이 좀 무서워 보였다.
혹시 내 말을 알아들은 건가?
물론 가끔은 알아듣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설마 나를 버리고 가는 건 아니겠지? 내가 관심을 안 줘서 삐쳐서 간 거라거나?
“나중에 잘 달래 줘야지, 어쩌겠어.”
당장은 그냥 눈을 감았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는 낮잠만 한 게 없었다.
* * *
생각보다 그는 삐친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서도 생글생글 웃고 컴퓨터의 음악을 켜서 춤도 추고 놀았다.
“기온. 내가 아까 너한테 덜떨어졌다고 한 거 미안해.”
「예쁜아. 걱정하지 마. 내가 녀석들 아주 다 혼쭐을 내 줬어.」
“못 알아듣는다고 너한테 너무 막말한 것 같아.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게.”
「내가 여기 있는 한 누구도 예쁜이 너한테 함부로 못 해. 두고 봐.」
해가 지기 전 우리는 헬기에 갔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원래도 재미없는데 동굴 속에서만 있으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헬기 주변 괴물들이 어딘가 다들 다친 상태였다. 고울의 두툼한 입술에 피가 나 있었고, 르피레의 양쪽 어깨에 돋아나 있는 두 뿔 중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르피레는 뿔이 부러진 고통이 상당한지 바닥에 누운 채 신음하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니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흔한 일이었다. 늘 나에게 적대적인 르피레는 나를 좋은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이방인, 방해자, 악마 같은 인간, 불청객처럼 보았다.
르피레가 그럴 때마다 나는 외면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갑자기 기온이 르피레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런 재수 없는 눈깔 하지 말랬지? 나머지 한쪽 뿔도 부러뜨려 줄까?」
뜻은 알지 못해도 협박이란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르피레는 기온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았다.
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헬기에 들어가는데 공기가 축축했다. 낯엔 그렇게나 덥더니 저녁엔 비가 쏟아질 조짐이다.
이런 축축한 공기는 불쾌지수를 높인다. 하지만 이런 공기라도 즐기고 싶었다. 이곳은 동굴보다 덥긴 하지만 그래도 바깥이라 나름의 정취가 있었다.
밤이 되기 전까지만 즐기면 된다. 하이퍼 문이 뜨기 전까지는 기온과 같이 편히 즐기면 된다.
기온은 여느 때처럼 헬기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길 좋아했다. 누가 그에게 도구를 주었다면 헬기를 해체라도 할 기세였다. 문명의 물건을 향한 그의 관심은 아주 지대해서, 나는 가끔 그에게 인간 세상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었다. 나는 이곳에 갇힌 무능력자였고 그는 괴물이었다. 필시 인간 세상에 가게 되면 실험체가 되어 사지를 해부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괴물들과 어울린 상태였다.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들은 나를 격리하고 조사할 것이다.
만약 그의 엄청난 빠르기를 이용해 우리가 무인도 같은 곳에 간다면 또 희망이 있을지 몰라도…….
그리고 그 무인도는 하이퍼 문의 영향이 닿지 않은 곳이 좋을 듯했다. 추측인데, 그 달이 뿜는 빛은 그와 나 사이에 흥분 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