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그날 밤 그는 탄내 꽃밭에 오지 않았다.
나중에 샘에 가 보니 거기에도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언제 돌아올까?
하긴 나라도 도망쳤을 것이다. 자위를 하다 들키고, 흥분 상태에 휘말려서 키스하다 거부당했으니 민망했을 것이다. 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그는 다른 괴물들보다 인간에 가까우니까 수치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호위 역할을 하는 이가 곁에 없으니 좀 불안했다. 정해진 역할이 아니긴 해도 어쨌든 그가 있어서 내가 괴물들 사이에서 안전할 수 있었으니까.
별수 없었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수밖에. 어차피 내가 동굴에 있는 한 다른 괴물들이 접근하는 경우는 없었으므로, 괜히 무서워하진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샘물에서 찝찝한 몸을 씻었다. 담요도 빨았다.
패드로 쓸 마땅한 게 없어서 난감했는데 적당한 물건이 눈에 띄었다. 전에 헬기에서 가져온 노트였다. 종종 에세이 같은 글을 적는 노트는 아직 빈 페이지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중 한 장을 찢어 손으로 비비고 또 비벼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그것을 아래에 대고 한편에 놓인 마른 담요를 바지처럼 휘감았다.
이젠 가슴을 가려야 할 차례였다. 하지만 생각 끝에 가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가슴은 몇 번이나 노출했으니 인제 와서 가릴 필요는 없었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하는데 착잡했다.
“원시인도 아니고 이게 뭐야.”
문명의 흔적이 점점 사라져 간다. 종이를 구겨 패드로 쓰고, 동굴 으슥한 곳에서 볼일을 본 다음 흙에 묻어 버린다. 물은 떨어져서 샘물을 퍼 와 마시기 시작했다. 에너지 바도 아껴 먹지만 언젠가는 바닥을 보일 것이다. 컴퓨터와 망가진 헬기가 남겠지만 큰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건 한바탕 큰 소리로 우는 것일 텐데, 그마저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더욱 꼭 감고 잠을 잘 수 있길 바랐다.
왜 자꾸 기온의 얼굴이 아른거리는지, 모르겠다.
* * *
깨어나기 싫은 심리가 있었는지, 잠이 유독 길었다. 허리가 아플 정도로 오랫동안 잔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옆에 기온이 보였다.
“어, 기온…….”
「예쁜아, 일어났어?」
그는 뭔가에 열중이었다.
한 손에는 유리 파편을 쥐고 있었는데, 아마도 망가진 헬기에서 가져온 것일 거다. 또 다른 손에는 담요를 들고 있었는데, 유리 파편으로 담요를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있었다. 그 담요는 기온이 허리에 두르고 다녔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그는 허리에 담요가 아닌 예전의 가죽을 다시 두른 상태였다.
“뭐해?”
「편하게 해 줄게.」
“멀쩡한 담요는 왜 조각내는 건데?”
말이 통하지 않아도 표정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 끝으로 내 하체를 가리켰다. 나도 거기로 시선이 갔다.
난감했다. 패드로 썼던 피 묻은 종이는 몸에서 제멋대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뒤척이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다.
「이 보드라운 걸 조각내면 너에게 쓸모가 있을 거야. 인간인 너는 다른 암컷들과 다를 테니까. 음. 지저분한 건 싫겠지, 역시? 그래서 만드는 거야. 한번 만들어 보는 거야.」
설마 패드로 쓰라고 담요를 자르는 건가?
한 번쯤 내가 생각을 했던 일이었다. 도구가 마땅치 않아서 못했던 일을 그가 하는 것이다. 놀라웠다.
어떻게 내 생각을 읽었을까? 비정상적인 빠르기의 초능력을 가진 괴물이니, 독심술 같은 초능력도 가능해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닐까?
물론 진짜로 그런 거라면 싫지만.
어쨌든 고마웠다.
처리가 급한 나는 담요로 하체를 두르고 샘물로 뛰어갔다. 물론 그가 잘라 둔 천 조각을 가지고 가는 걸 잊지 않았다.
그가 만들어 준 천 조각은 패드로 쓰기에 아주 유용했다. 섬세한 배려심이 놀라울 정도였다.
씻고 돌아와 보니 그는 담요를 다 자르고 시아로파 새순을 먹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그가 시아로파 더미에 있던 에너지 바와 과일을 가리켰다. 먹으라는 의미 같았다.
「먹어. 배고플 텐데.」
솔직히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감동과 고마움에 어제 있었던 키스 사건은 까맣게 잊었다.
나는 에너지 바를 아껴 두고 과일부터 먹었다. 혀에 감도는 단맛이 피곤한 몸을 위로했다.
“아, 그런데 괴물들이 먹는 거 나도 계속 먹어도 되는 거야? 모르겠네. 탈 안 나겠지?”
식사를 마친 그는 페이퍼 컴퓨터를 능숙하게 켰다. 한 번 가르쳐 주니 갖고 노는 것도 알아서 잘했다. 저장해 둔 풍경 사진을 보거나 음악을 틀어 흥얼거리거나 때론 춤도 추었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해지면 햇빛을 쐬어 충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컴퓨터로 음악까지 틀진 않았다.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저도 좀 어색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가뜩이나 이곳에서 의지할 존재가 하나뿐인데 그와 어색해지는 건 불편하다.
후회가 막심했다. 어제 키스 중에 그렇게 밀쳐 내는 게 아니었다.
뭐, 그렇다고 키스를 계속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는 과일즙이 묻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런 행동이 갑작스럽다는 건 알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달리 없었다. 고맙다는 말도 잘 통하지 않을 테니 친근함이라도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에 제 머리를 스스로 비비며 조용히 웃었다. 여전히 시선은 컴퓨터에 향한 채였다. 그는 한 번쯤 나를 돌아봐 줄 법한데도 그러지 않았다. 역시나 어제 그 일 때문인 듯했다. 눈을 마주치는 게 어색하겠지.
아.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했다.
문득 그에게 이런 말이 하고 싶었다.
“방재환보다 낫다. 그 인간보다 훨씬 더 낫지.”
연구소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업무가 바빠 밤에도 관사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한 적이 있었다. 자정이 넘었을 때 피로에 찌든 연구소 사람들은 돌아갔고, 나도 돌아가려 했다. 연구소 군법에 따르면 상관이 지시한다고 해도 자정 넘어서까지 일할 의무는 없었다. 게다가 월경이 시작되어 일할 몸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재환이 나를 막았다. 그는 연구소의 리더로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남았다면서, 내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곁에서 일하는 게 안심된다나 뭐라나. 몸이 그럴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그는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그놈의 연인 사이가 뭐라고 나는 그를 계속 도왔는지. 새벽까지 미련스럽게 버텼다. 일이 다 끝나고 피곤함에 찌든 몸을 끌고 관사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놈은 자기 방으로 가자며 나를 끌고 갔다.
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연애를 했나 싶다. 그가 그렇게까지 상대할 가치가 있었던 연인이었나?
듬직하다고 믿었던 재환에 대한 기억은 다 착각일 뿐이었다. 그는 부대원들에게나 듬직한 척했지 연인인 내게는 아니었다. 이따금 내게 휴식을 주었던 것도 다 자기 욕심이나 욕구를 채울 목적 때문이었다.
나는 왜 그리도 멍청했을까. 재환이 이곳 37 기지에서 나를 참담한 방식으로 배신하고 나서야 그의 본모습에 눈을 뜬 걸까. 왜 나는 뒤늦게야…….
“잘 죽었다. 진짜.”
꽃밭에 엎드려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연필을 쥐었다. 우중충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선 그림이라도 그려 보고 싶었다.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자유롭게 선을 그렸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가 기분이 좋았다. 연구실에서 자료만 체크하던 용도의 물건이 이렇게 요긴한 장난감이 될 줄은 몰랐다.
연필 소리가 끊이질 않자, 기온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관심을 끈 모양이었다.
갑자기 몸을 일으킨 그는 나와 마주 엎드려 누웠다. 그리고 내가 뭘 그리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너무 빤히 본다. 뭐 대단한 걸 그리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시아로파가 있어서 그걸 가볍게 스케치하는 것뿐이었는데 뚫어지게 보았다.
어째 컴퓨터를 보여 줬을 때나 글 쓰는 걸 보여 줬을 때보다 더 신기해하는 기색이었다.
「그게 아니지. 새순을 그려야지.」
“응?”
「비록 내가 다 뜯어 먹었지만, 그래도 새순을 그리는 게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겠어? 줘 봐. 이렇게 말이야.」
그는 갑자기 내 손에서 연필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노트에 직접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시아로파의 끄트머리에 작은 잎들 위주로만 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야 나는 그가 뭘 그리는 지 알 수 있었다.
“기온 너 재미있다. 이거, 새순이잖아. 네가 좋아하는 거 다 채워 넣네……. 그럼 나도 해 볼래, 너처럼. 연필 이리 줘 봐.”
그에게서 연필을 도로 가져가서 내가 먹고 싶은 음식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툭하면 시켜 먹었던 치킨, 연구소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었던 피자, 연구소 옥상에서 구워 먹었던 삼겹살…….
아니.
왜 죄다 방재환과 엮인 장소에서 그놈과 함께 먹은 것들뿐일까?
팍 짜증이 치민 나는 연필을 던지고 돌아누웠다.
배가 아팠다. 먹고 싶은 걸 생각해도 먹을 수 없단 걸 알기 때문인지, 속이 상했다.
그러자 기온이 내 등 뒤로 달라붙었다.
「왜 그러는 거야? 뭘 그린 건데? 뭘 그리다 마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넌 가지고 놀아. 나는 잘래. 그냥…… 그냥 잘래.”
「또 자는 거야? 눈 감지 마. 야. 야. 예쁜아. 응?」
눈을 감았지만 진짜로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치킨 생각만 더 간절해질 뿐. 아. 괴물들이 닭처럼 생겼으면, 아니 차라리 닭 그 자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나는 불을 피워서 괴물들을 구워 먹었을 것이다. 고울 뺨치는 대식가가 되었겠지.
「자지 마. 나랑 놀자. 아직 잘 시간 아니잖아. 응?」
기온은 내가 누워 자려는 모습이 아쉬운 듯 계속 붙어서 깨웠다. 어젯밤의 어색함은 슬슬 날아가 버린 듯했다.
나는 눈을 뜰지 말지 고민했다.
그때, 입술 사이로 뭔가가 흘러들어 왔다.
방금 먹은 열매의 과즙이었다. 기온은 과즙을 먹여서라도 나를 잠들지 않게 하려 했다.
혀끝을 타고 흘러들어 오는 달콤한 액체에 눈을 뜨고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이 미소로 휘어져 있었다. 내가 눈을 뜬 게 그렇게나 좋은 모양이었다.
“애도 아니고 진짜.”
나는 그를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다시 노트를 내밀었다.
또 그려 줘.
그렇게 부탁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엎드려 누워서 연필을 잡았다. 이번에는 음식 말고 다른 걸 그려 보고 싶었다.
무엇을 그릴까.
그에게로 시선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