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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에게 사육당하다-7화 (7/43)

7화

어제 먹고 남은 열매를 보았다. 저 유사 파프리카의 즙을 마시고 허기에 껍질까지 우적우적 씹어 먹었던 기억이 났다.

어쩌면 저 식물이 수면제 역할을 했을지도 몰랐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말이다.

쨍하고 쏟아지는 햇빛을 보니 기분이 나른했다.

끔찍한 일을 겪고도 이런 기분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목이 말랐다. 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저 유사 파프리카 안에 든 물은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하아, 어쩌지.”

시선을 돌리는데 옆에서 누워 자는 우두머리가 보였다.

바른 자세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그는 어쩐지 괴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였다.

동굴로 스며드는 햇빛 아래에서는 유독 더 그런 것 같았다.

은근히 붉은 혈색이 도는 피부도 그렇고, 아기 피부처럼 미세하게 난 솜털도 그렇고, 멋들어지게 금색으로 빛나는 긴 머리칼도 그렇고, 몸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까지. 그도 보통의 사람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단지 키가 좀 크고 근육이 발달한 것뿐이었다.

이런 괴물이 연구소 레이더에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는 게 참 기이했다.

갑자기 그가 눈을 떠서 눈동자를 드러냈다.

「일어났어, 예쁜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고른 이를 드러내고 다정하게 웃으니 나쁘진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눈을 돌려 천장을 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감았다. 천장엔 완만한 종유석이 점점이 있어서 너무 징그러웠다.

그가 돌연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그러게 열매까진 먹지 말지. 그러니까 금방 잠이 들잖아. 어제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친근하게 수다를 떠는 게 긴장감을 녹였다.

목이 마른 나는 또 물을 마시고 싶다고 시늉했다. 몇 번이나 물 마시는 시늉을 하고서야 뜻이 통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이거 마셔. 껍질은 먹지 말고. 그건 자기 전에나 먹는 거야.」

그는 유사 파프리카를 들고 그 안의 물을 또 마시면서 따라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걸 마시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걸 마시면 잠이 드는 것 같아.”

그러자 그가 이번에는 유사 파프리카를 또 마셔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남은 껍질을 저 바깥 강물로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글쎄 물만 마시고 이건 버리면 된다니까. 응? 내 말 못 알아듣겠어?」

몇 분 동안 이어진 그의 ‘쇼’를 보고 나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유사 파프리카의 물은 갈증을 해결하지만, 껍질은 잠을 유도한다는 것을.

내가 잘못 해석한 게 아니라면 그랬다.

그런데 그즈음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방법이 없었다. 마실 수 있는 건 유사 파프리카 즙 말고는 없으니까 그냥 마시고 해갈하는 게 좋았다.

어차피 마시고 잠이 든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잠든 채로 죽어 버리면 그것도 복이 아닐까.

“내놔.”

나는 그에게서 유사 파프리카를 가져가 들고 마셨다.

그러는 동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아. 시원해.」

히죽 웃은 그가 동굴 밖으로 보고 서 더니 돌연 허리에 두른 얇은 가죽을 걷어 내고 소변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곧게 뻗은 신체의 한 부분에서 어제 내린 비보다 더 세차게 물줄기가 뻗어 나왔다.

그걸 본 순간 나는 마시고 있던 즙을 다 내뿜었다.

주르륵. 주르르르륵.

흘러내린 즙이 가슴골을 타고 내려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인간이 아니야.”

어쩌면 정말 미친 쪽은 인간이 아닌 것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고 탄식하는 내가 아닐까?

말이 우습지만 그는 자연 그대로의 괴물이었다. 애초에 사람을 뜯어 먹는 것들과 같이 사는 괴물이, 소변을 저런 식으로 본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내가 보고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냄새도 너무 독하잖아.”

몸을 돌려 그에게서 피하려는데, 내가 잘못 생각한 거였다.

냄새는 그에게서 나는 게 아니었다.

나에게서 났다. 어제 실금해 젖었던 바지가 문제였다. 게다가 어제 비가 와 눅눅해서 그런지 더 심한 것 같았다.

“씻고 싶어.”

당장 바지와 팬티를 벗어 버리고 강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직 정말로 죽고 싶진 않은 모양이다.

때마침 볼일을 다 본 우두머리가 제 아래를 가죽으로 다시 가렸다. 소변보는 건 드러내면서 성기를 다시 가리는 건 또 뭘까? 괴물들에게도 선별적 수치심이 있다는 게 희한하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목욕. 오직 목욕만이 중요했다.

나는 그에게 몸으로 말을 시작했다.

나는.

저 아래의.

강물로.

이 온몸을.

구석구석.

씻고 싶어.

나는.

저 아래로.

내려가고 싶어.

저기, 저.

물이 필요해.

마시는 것 말고.

씻을 물 말이야.

한 단어 한 단어를 모두 몸으로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더군다나 학창시절 체육, 무용 시간도 괴로워했고, 입대해서 기초 훈련을 받았을 때도 늘 각이 틀린다고 혼이 나던 전적이 있었다. 몸을 적절하고 정확하게 쓰는 것은 연구소의 연구 장비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전부였던 내가 원하는 바를 몸으로 세세하게 표현하기까진 너무 오래 걸렸다.

“거, 참! 씻고 싶어 죽겠단 말이야!”

집요하게 손짓, 발짓, 몸짓을 보인 끝에 통했는지, 드디어 그가 소리를 냈다.

「아아!」

미소를 보니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제 두 손을 등에 대고 척척 두드렸다.

「업혀.」

그가 다시 말했다.

「내 등에 업히라고.」

왠지 업히라는 말처럼 들렸다.

얘가 내 말을 잘 듣긴 한 걸까? 의아함에 그냥 보기만 했더니 그가 또 한 번 재촉했다.

「그렇게 보지만 말고 얼른 업히라니까.」

고민했다.

그에게 업히면 어떻게 되는 건지, 번개처럼 빠른 그의 등에 업혀서 어디론가 홱 날아가 처박혀 죽는 건 아닌지, 설령 무사히 간다고 해도 그 뒤엔 어떻게 되는지, 온갖 예측을 하게 되었다.

「아. 진짜 되게 말 안 들어.」

투덜거린 그는 나를 제 등에 멋대로 태웠다. 그러고는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그의 등이 느껴졌다. 따뜻했다. 생각보다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거 봐. 이렇게 업히면 되는 거를.」

향긋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특유의 향기였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그에게 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좋았다.

“이건 아니지. 정신 차려라. 진짜.”

혼잣말하는데 그가 움직였다.

순간, 나는 그의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의 향기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안전을 위해서였다. 몸이 재빠르길 넘어서서 물리적인 법칙을 깨고 마는 그가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다가 나를 날려 버리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어째 걸어가는 본새가 희한했다. 행여나 내가 등에서 미끄러질까 봐 수시로 들어 올리고 이따금 등도 토닥토닥하는 것이…….

“뭐야. 왜 애 취급해?”

마치 어린 시절 나의 엄마나 아빠라도 된 듯하다.

「있잖아. 너희 인간들은 되게 깨끗한 것 같아. 우리 애들은 씻으라고 해도 안 씻는데.」

“응?”

「내 말에 대답하는 거지, 지금? 그런 거지?」

“뭐라는 거야…….”

「목소리도 되게 예뻐. 여기서는 듣기 힘든 소리야. 인간 여자들은 다들 그런 편이지? 나도 한때 인간 여자랑 산 적 있었는데 그랬던 거 같거든. 어쨌거나 다른 놈들에게 넌 건들지 말라고 해야겠어. 너 같은 애를 그냥 먹이로 쓰는 건 일단 좀 아까운 것 같아. 그리고…….」

“아무튼 수다쟁이인 건 분명해.”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기묘한 대화에도 뭔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 * *

우리는 동굴 가운데까지 왔다. 그 가운데엔 옆으로 새는 입구가 있었는데, 우두머리는 그 입구 너머로 계속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밝은 공간이 드러났다. 빛이 어디서 나는가 하고 봤더니, 어떤 식물의 열매가 반짝이고 있었다. 투명 호박이라고 해야 할까. 호박 안에는 빛 알갱이들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호박은 족히 몇 백 개는 되어 보였다.

나는 놀라운 광경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37 기지가 아니라 판타지 세계라고 해, 그냥.”

한쪽 벽에서 투명한 물이 흐르고, 그 물을 작은 웅덩이가 받치고 있었다. 물은 웅덩이에 담겨 있다가 바닥의 촘촘하게 쌓인 돌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차갑지 않을까? 동굴 속의 물이라 엄청 차가울 것이었다.

「자. 내려 줄게.」

우두머리가 나를 내려 주었다. 나는 곧바로 동굴 속의 물을 가까이 가서 보고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번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그 물에 넣어 보았다. 아무런 화학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안심하고 들어가도 될 것이다.

그리 깊지 않아서 물속으로 발을 디디려 했다.

그때, 갑자기 우두머리가 나의 팔을 잡았다.

「기다려. 아직은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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