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응?」
“목마르다고. 물 마시고 싶어.”
「뭐라는 거야…….」
“속옷도 갈아입고 싶고, 목욕도 하고 싶어. 관사가 그리워. 아니. 엄마 아빠랑 같이 살던 집이 그리워. 아니, 아예 그냥 죽고 싶어. 안 아프게 좀 죽여 줄래?”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쫑알거리는 게 귀엽군.」
식사를 마친 그는 탄내가 나는 보드라운 꽃밭에 모로 누워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나를 관찰했다.
관찰당하는 기분이 묘했다. 뭔가를 관찰하는 건 늘 내 역할이었다. 연구소에서의 일상이었고. 그런데 그 일을 지금 저 괴물이 하고 있었다.
목이 탔다.
빗물이라도 먹을까?
나는 동굴 절벽 끝으로 기어가서 아래를 보았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보니 더 갈증이 났다. 마시고 싶었다. 한 팔을 뻗어 떨어지는 빗물을 맞으며 메마른 숨을 흘렸다. 이따금 손에 모인 빗물도 받아 마셨다. 더러운 물일 테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는데 갑자기 우두머리가 중얼거렸다.
「아아, 알겠다.」
“……?”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았어. 이제.」
또 한 번 번개 같은 빛이 번쩍 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나타난 그는 또 내 앞에 뭔가를 가득 내려놓았다. 그것은 노란색 파프리카와 비슷하게 생겼고 크기는 좀 더 컸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파프리카보다 좀 더 단단해 보였다.
이런 식물이 있었던가?
나는 낯선 그 열매를 계속 보기만 했다.
우두머리는 그중 하나를 들어 꼭지를 따고 입구를 입에 가져갔다. 열매 속엔 물이 있는 듯했다.
꿀꺽, 꿀꺽.
그의 입술을 타고 투명한 물이 흘렀다. 길고 하얀 목선을 타고 흐르는 물은 독특했다. 신선하고 상쾌한 향기가 났다.
바닥에 짙게 깔린 탄내를 잊게 할 정도의 강력한 상쾌함이었다.
다 마신 그가 입을 닦으며 날 보았다. 그러고는 새것을 하나 더 들어 내게 건넸다.
「마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목마른 거 아니었어? 마셔. 얼른.」
잘 알아듣진 못해도 이걸 마시라고 권하는 것이 분명했다.
고민이었다.
마셔도 될까? 괴물이 먹는 걸 인간인 내가 먹으면 탈이 나진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물에서 나는 상쾌한 향기가 유혹적이었다. 나는 단번에 그 열매의 꼭지를 따서 그 속에 든 물을 마셨다.
“아!”
달았다. 또 예상대로 청량했다. 단순히 느낌만으로 판단할 순 없지만, 깨끗한 것 같기도 했다.
제발 독이 아니길. 물론 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인 내가 37 기지의 식물을 먹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탈이 날까?
그래. 탈이 난다면 그게 좋겠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잘 먹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그 열매 속 즙을 마시는 것도 모자라 껍질 까지 와그작와그작 씹고 있었다. 껍질에서 나오는 단맛이 상당했다. 당을 흡수하자 침울했던 기분도 머릿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지워졌다.
「그렇게 게걸스럽게 안 먹어도 돼. 많으니까. 내가 다음에 또 가져다줄게.」
“뭐라는 거야…….”
「나한테 아까 그 이상한 걸 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멋대로 지껄여라. 그래.”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혹시 넌 내 말을 알아듣나? 아니. 표정을 보면 그건 아니네. 어쨌든 나는 감시자(인간)들이 우리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했거든. 아무래도 넌 감시자 중에서 그리 똑똑한 놈은 아닌가 봐. 말이 통하면 이거저거 알아볼 수 있을 텐데, 아쉽군.」
우두머리는 수다쟁이가 분명했다. 시아로파의 새순을 껌처럼 씹던 그는 나를 보며 친구에게 말하듯 종알거렸다.
그 친근함이 나쁘지 않았다.
괴물의 친근함이어서 문제였지만.
「목 다 축였으면 나랑 놀래? 응? 네 생각은 어때?」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그를 피하고 비도 피할 겸, 나는 동굴 저 안쪽으로 발걸음을 슬금슬금 옮겼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진짜.”
「어디 가? 이리 와. 여기가 시원해. 저긴 가지 마. 바닥 딱딱하잖아. 야. 이리 와. 어디 가?」
하지만 그는 나를 졸졸 따라오며 계속 떠들었다.
어느덧 보드라운 탄내 꽃밭을 지나 거친 돌바닥을 밟고 있었다. 그즈음에 그가 나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고, 나는 더욱더 동굴 깊숙한 곳으로 도망갔다.
그러자 코끝에 스며 오던 탄내가 약해져 나중에는 거의 나지 않았다.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나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말 되게 안 들어.」
그는 어느샌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의 몸은 더욱더 빛이 났다. 빛 알갱이들이 또 흘러나왔고 특유의 향기도 강하게 샘솟았다.
탄내 없이 맡는 그의 향기는 마약이었다.
나는 기분이 몽롱해졌다. 입을 헤 벌리고 홀린 듯 그를 보았다.
그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가볍게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안 돼, 안…… 안 돼. 이건.”
그는 위험했다. 그의 빛과 향에 휘둘리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그의 친절한 행동에 잠시 잊고 있어서 주의력이 사라진 모양이다.
얼른 저 탄내가 나는 꽃밭 위로 가야 했다. 그 꽃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맡아야만, 정신이 온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헉헉…….”
숨이 거칠어졌다. 위험하고 암울한 상황을 잊고서, 그의 어깨와 가슴을 핥던 그때처럼 정신이 나가려 했다.
그 역시 내 호흡에 영향을 받는 듯했다. 기이한 하늘색 눈동자로 나를 탐하듯이 보는 표정이 아까와는 다르다. 숨결도 나 못지않게 격해졌다. 살짝 벌린 입술이 붉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도 아까와는 다르게 지독히 낮다.
「뭐야. 왜 이렇게…… 야해?」
그의 몸이 더 강한 빛과 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별로 남지 않은 나의 이성이 그의 몸에서 피어나는 빛 알갱이를 따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안 돼. 위험해.
머리는 경고하는데 몸은 달랐다. 욕망에 휩쓸린 몸은 성적 고양의 극치에 다다라 있었다. 아래가 젖어 들었다. 이성을 거부한 몸이 저절로 그에게 안기려 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변화가 필요해.
나는 욕구를 최대한으로 외면한 채 도망치듯 다시 탄내가 나는 꽃밭으로 갔다. 그 바닥에 엎드려 꽃송이 송이에 코를 비비고 숨을 쉬었다. 한참을 머릿속에 탄내를 채우자 몸을 감싸던 비정상적인 욕구가 진정되었다.
안심하고 몸을 돌려 누우려는 순간.
나는 내 옆에 누우려는 우두머리를 보았다.
「거봐. 여기가 푹신하지?」
내가 안정을 느끼자 그의 몸에서 나는 빛 알갱이도 줄어들었다.
나는 탄내가 나는 꽃밭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가 나를 마주 보고 누웠다.
서로 자세가 묘했다. 우리는 한참을 침묵했다.
빗소리와 강물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느껴지는 안정감에 점차 잠이 스르륵 온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숨소리가 도드라졌다. 히죽 웃을 때 나올 것 같은 그런 숨소리였다.
눈을 떠서 그를 보았다. 그는 내 눈, 코, 입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늘색의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너 같은 애는 처음 봤어.」
분명 괴물인데, 하나도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앞머리를 넘겨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렇게 예쁘지?」
목소리조차도 달콤하게 들렸다.
「뭐, 배가 좀 부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맛을 좀 보고 싶어. 특히 그 입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나를 이렇게 애타는 시선으로 보는 걸까?
「안 될까?」
무언가 동의를 구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왠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안 되긴. 넌 내 먹이인데, 내 마음이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가온 그가 내 입술을 빨기 시작했다.
제3장. 기묘한 사육
대체 언제 잠든 걸까?
햇볕이 얼굴을 따갑게 쑤시는 느낌에 눈을 떴다.
옆에는 우두머리가 잠들어 있었다.
괴물과 잠을 자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무사하게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가 깔고 누워 있는 탄내 꽃은 물기가 말라 보송보송해져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혀로 슬쩍 핥았다. 단맛이 났다. 이게 어제 먹은 파프리카 비슷한 열매에서 났던 맛인지, 아니면 잠들기 전에 키스하는 것처럼 닿았던 우두머리의 입술 맛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문득 잠들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핥지 마. 저리 가.’
‘핥고 싶어. 안 돼?’
‘괴물 주제에 뭐 하는 거야, 자꾸.’
‘왠지 묘하게 기분 나쁜데…….’
졸음을 느끼며 중얼거렸던 말에 우두머리가 반응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멋대로 입술을 부딪치는 괴물에게 싫다고 거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크게 거부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포자기해서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졸음이 많이 쏟아졌기 때문일까.
둘 다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멀쩡하게 깬 걸 보니 그 이후 별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별일이 있었다고 해도 뭐 어쩔 건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