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묻지 않아도 사실 답은 알 수 있었다. 싫든 좋든 부하로서 또 연인으로서 인형처럼 웃으며 ‘네.’ 라고 할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그녀가 웃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대답이 평소와 달랐다.
“대위님.”
“응?”
“왜 늘 그렇게 묻습니까?”
“……뭐라고?”
“왜 늘 좋으냐고 묻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윤해.”
“솔직히 제가 좋은지 어떤지 별로 신경도 안 쓰시는 거 다 압니다. 자꾸 물어보시니 좀 그렇습니다.”
재환은 짜증이 났다. 원래, 방재환이라는 남자 하나만 보고 군대에 따라온 여자였다. 그때만 해도 표정이 저렇진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멀어지는 느낌, 그게 거슬렸다.
“너 오늘 왜 그래? 뭐 불만 있어?”
정색하고 묻자, 윤해가 한 걸음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하! 무례? 애인이랑 해 놓고 이럴 땐 부하의 자세인가?”
“……그럼 이만.”
기분을 더럽게 망가뜨리는 행동이었다.
같은 학교를 나왔고, 같이 군 연구소에도 입대했으며, 나중에 결혼까지 약속한 여자지만 글쎄. 이렇게 나올 때는 정이 떨어져 결혼까지는 가기 싫어지기도 했다.
재환은 그녀가 나간 문에서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끝까지 진지해질 수 있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번 프로젝트 끝나고, 또 다른 프로젝트도 마치고, 그렇게 점점 진급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지면 된다. 그러다 보면 결혼이고 뭐고 다 없던 일이 되겠지.
물론 그때까지는 헤어질 수 없었다.
김윤해는 아직까지는 쓸 만한 부하에다, 또 쓸 만한 여자이니까.
아니, 차라리 충실한 종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다.
* * *
37 기지로 가는 날이 밝았다.
구름이 무거워 보였다. 일기예보에서도 비가 올 거라고 했다.
프로젝트 날짜는 지휘자가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단 걸 기억한 윤해는 재환에게 조심스럽게 제의했다.
“대위님,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재환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을 미루기 싫었다. 귀찮고 성가신 일은 얼른 해치우는 게 길게 봤을 때 편했으니까.
“아니, 그냥 간다.”
“하지만…….”
윤해가 말리려 하자, 재환은 단호하게 그것을 끊었다.
“김 중위.”
“…….”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 나만 믿어.”
“……네.”
막무가내인 재환을 따라, 윤해는 헬기로 향했다.
저 멀리서 검은 구름 떼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37 기지 방향이었다.
* * *
인공 달에서 유독 강한 빛을 뿜어내는 밤, 우리는 지옥에 있었다.
지옥의 이름은 37 기지. 거대한 협곡을 품은 땅이다.
그곳은 과거 생체병기 실험의 결과로 온갖 괴물이 태어난 역사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사업성 약화로 투자자들이 외면하는 바람에 세상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하지만 우리 군 연구소는 37 기지를 쓸모없는 곳으로 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이곳에 사는 괴물들의 주요 식량인 특수 식물, 시아로파 때문이었다.
시아로파는 굉장한 물질을 품고 있었다. 각각의 생명체엔 드러나지 않은 고유의 힘이 존재하는데, 시아로파는 그 힘을 꺼내 강화해 주는 성분이 존재했다.
정예군의 신체를 개조, 강화하는 것이 사명인 우리 연구소에서 시아로파를 확보하는 것은 필수였다.
이를 목적으로 극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에 참가한 우리는 헬기를 타고 37 기지로 향했다.
하지만 악천후 때문에, 뜻하지 않게도 위험한 곳에 착륙해야 했다.
불안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헬기 밖으로 내리자마자 위기에 처했다.
37 기지의 괴물들과 맞닥뜨린 것이다.
“아…….”
“망할.”
뜻밖의 상황이었다.
괴물들은 이전에 자료에서도 보았지만, 사람과 형태가 유사했다.
그러나 벌거벗은 몸들은 족히 2.5미터 이상은 될 정도로 컸다. 피부는 아주 밝은 적갈색이었고 날카로운 눈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억센 머리칼은 허리까지 헝클어져 내려왔고, 숨소리는 금방이라도 포효로 변할 듯 아슬아슬하게 위압적이었다. 이목구비도 제각각 독특해서,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종처럼 느껴졌다.
불청객인 우리를 보는 괴물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정보에 따르면 저들은 주식인 시아로파 가 부족하면 짐승과 사람까지도 먹는다고 했다.
우리는 먹이가 될 것이 분명했다.
두려웠다.
생체병기 실험의 잔재, 불운한 생명, 언제나 연구실 화면으로만 접하던 무서운 괴물들을 직접 본 순간, 나는 시아로파 따위는 다 잊었다.
이런 상황에서 헛소리가 나왔다.
“대위님. 괴물이…….”
“조용히 해. 누군 그걸 몰라?”
방 대위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괴물에게 먹힐 거라는 위기감에 끔찍한 상상이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몸통이 발기발기 찢긴 후,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잘근잘근 씹혀서, 끔찍한 고깃덩이로 조각나, 저 역겨운 숨을 내쉬는 검은 목구멍 깊숙이 꿀꺽 삼켜질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군인답게 냉정히 생각해야 했다.
군인답게.
하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상사를 찾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방 대위는 여러모로 내게 중요한 존재였다. 내가 몸담은 군의 상관이자, 군 소속 연구실 선배이며, 또 오래된 연인이었으니까.
“뭐라고 말 좀 해 보십시오. 대위님. 대……,”
“그만 불러. 말하지 마. 긴장한 모습 보이지 말라고.”
괴물들이 점점 더 우리를 에워쌌고,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오랫동안 굶은 것 같아 보였다.
「크르릉!」
「크르르으으으…….」
후회가 막심했다.
왜 여기까지 왔을까? 프로젝트 따위가 다 뭐라고?
방재환의 말을 무조건 따른 게 죄라면 죄였다. 날씨로 경고를 했는데도 그가 듣지 않았으니, 더 윗선에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인제 와 후회는 무의미했다.
그는 내게 협곡행을 권유할 때와 똑같이 말했다.
“일단 나만 믿어. 윤해야.”
든든하거나 고마움을 느껴야 할 테지만, 솔직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 때문이야. 오빠가 미안해. 내가 괜히 오늘 가자고 우겨서…….”
그래도 나는 최대한 희망을 떠올리려고 했다. 공포와 절망의 끝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본다면 바로 그의 존재일까?
그가 리볼버를 꺼냈다. 그 총은 내가 가지고 있는 단순한 호신용 총이 아니었다. 출발할 때 연구소에서 지급받은 것으로, 저런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무기였다.
「크아아아아!」
위험한 물건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괴물들이 위협하듯 소리를 질렀고, 급기야 몇몇은 우리에게 팔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나의 등을 앞으로 떠밀었다.
“먹어!”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했다.
뒤돌아서 보니 방재환이 모두에게 총을 들이대며 또 먹으라 말하고 있었다.
“먹으라고! 얼른 먹으란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를.
“아……?”
그는 내 쪽은 눈길도 주지 않으며 뒤로 물러났다.
“먹으라고! 너희들 먹이니까! 어서!”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껏 내가 알던 상사, 연인이 저 앞의 괴물보다 더 괴물로 보였다.
괴물들이 더욱 가까이 에워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을 멈춘 건 뜻밖의 소리였다.
어디선가 낮고 거친 포효가 들렸다.
「흐아악!」
그 소리에 괴물의 무리가 두 갈래로 쫙 갈라졌다.
갈라진 길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거센 바람을 맞으며 걸어오는 그들 역시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본 괴물과는 좀 달랐다. 연구소의 자료에서도 본 적이 없는 괴물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수컷이었다.
피부가 백옥처럼 희고, 키도 이곳의 괴물들과 다르게 작았다. 하지만 괴물들이 워낙 커서, 지금 저 괴물이 작다고 해도 족히 190센티미터는 넘어 보였고 인간으로 치면 꽤 큰 편이었다. 탄탄한 근육 또한 웬만큼 운동한 인간들보다 더 발달되었다. 금발은 헝클어지지 않는 직모라 다른 괴물들보다 더 길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괴물이라기보다 빼어난 외모의 모델이 원시 시대의 차림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눈동자, 다른 괴물보다 유난히 더 밝아 형광 하늘색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그 역시 괴물이라 말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저마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는 괴물들에게 위압적으로 포효했는데, 덩치는 다른 괴물들보다 작으면서 소리의 울림은 몇 배나 깊었다.
「크아아아악!」
괴물들은 그의 포효에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그가 이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그리고 우두머리 옆에 있는 또 하나의 괴물, 이 괴물은 검은 거인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보통 괴물들보다 체구가 훨씬 컸고 피부는 밤처럼 검디검었다. 하지만 좀 아둔한 인상에 걸음이 느렸고, 몸짓도 둔했다.
하얀 피부의 우두머리가 나를 찬찬히 보았다.
피부가 너무 하얘서 온몸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형광 하늘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눈이 아예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기이한 공포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