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졸렬한 제자가 본데없이 경력 대인께 무례한 짓을 하였습니다.”
육역이 원금하를 흘끔 보았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드물게 얌전한 모습이었다. 역시 이렇게라도 교육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한바탕 오해에 사소한 일일 뿐이니, 선배께서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들을 일어나라 하시지요. 아니면 제가 마음이 많이 쓰입니다.”
육역이 웃음 띤 얼굴로 양정만에게 건의했다.
물론 양정만은 육역의 이 말을 오래도록 기다렸다. 두 아이는 이렇게 종일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 물 한 모금 입에 대질 못하였으니, 그는 진작부터 마음이 아프던 차였다.
그렇게 기다렸던 육역의 말이었다. 양정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기왕 경력 대인께서 이리 말씀하신 이상, 저도 이들을 용서하겠습니다. 너희는 들었으면, 일어나 경력 대인께 감사하지 않고 뭐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선실 벽을 짚고 겨우 일어선 금하가 육역을 향해 돌아서 말했다.
“경력 대인의 관대함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금하의 두 다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말을 다하지도 못한 채 쿵 하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금하가 다리가 저려 그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육역은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 저도 모르게 움찔했지만, 그는 다행히 잘 참았고, 때마침 팔짱도 끼고 있었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절은 할 필요가 없지. 얼른 일어나라.”
그녀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양악과 걸어갔다.
바라보던 양정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는 두 아이들로 대인께 면목이 없습니다.”
육역이 희미하게 웃었다.
“선배께서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어젯밤 생신선물은 저들 둘 덕에 찾을 수 있었지요. 시간이 좀 지나면, 연마되어 분명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저들 둘은 사고나 안 치면 다행입니다.”
* * *
묵직한 밤의 장막을 뚫고, 작은 배 하나가 소리도 없이 참선에 접근했다. 인영 하나가 고양이처럼 매우 빨리 배 위로 뛰어올랐다. 가벼운 움직임은 소리 한 점 내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 몸을 숨겼던 육역은 그 사람이 선실로 잠입하고서야 밖으로 나와 그가 타고 온 작은 배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노를 들어 배 밑바닥의 이음새를 향해 힘껏 내리 찔렀다. 이내 노는 배 밑바닥을 관통했고, 뚫린 배 바닥으로 운하의 물이 콸콸 넘쳐흘렀다.
그는 장화 바닥이 살짝 젖어가자, 매처럼 몸을 날려 다시 참선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뱃전에 기대어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선실 입구에서 지극히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육역은 돌아서 복면을 한 키가 큰 사람을 바라봤다.
“움직이는 게 너무 느리군.”
“네가 사 형님의 다리를 못 쓰게 한 놈이냐?”
육역은 복면인의 말은 전혀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복면인이 허리춤에 찬 구절편에 꽂혀 있었다.
“구절편은 공격은 쉽지만 지키기는 어렵지. 다른 무기는 안 가져왔나?”
“이 몸께선 빈손이라도 널 박살 낼 수 있어!”
복면인은 말을 하자마자 먼저 선수를 쳐 공격했다.
두 사람이 뒤엉켜 싸우니, 맹렬하게 바람을 일으킨 구절편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상대의 무공은 강했고, 육역은 그가 어느 쪽 사람인지 스스로 내력을 드러내도록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육역의 예상을 넘어선 일이 벌어졌다. 그들이 붙어 싸워 초식을 겨룬 지 수초 후, 뜻밖에도 사수죽이 원금하를 위협하며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다리까지 부러진 죄수가 육선문의 포쾌를 협박할 수 있다고?
육역은 원금하의 목덜미에 놓인 비수를 보며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육선문의 포쾌는 어리석은 돼지 수준이야? 저건 작심한 거지? 어찌 저리도 바보 같단 말인가.
“네놈이 다가오면 나는 이년을 죽일 거다!”
사수죽이 금하의 목덜미로 비수를 바짝 들이밀었다.
육역의 동공이 놀라 수축했다.
“형님분, 조금 냉정해져 봐요.”
그녀는 오히려 매우 냉정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육역이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저들이 한패란 걸 처음부터 알아차렸지. 설마 너는 이러고도 나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한순간 멍했던 그녀는 즉시 그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억울해요, 대인. 저는 정말 이들에게 납치된 거예요.”
육역이 냉랭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더는 연극할 필요도 없지. 시간이나 절약하게 너희 셋 모두 함께 덤벼.”
“흥!”
복면인이 옆에서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그자의 무공은 약하지 않은지라 육역은 우선 그를 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복면인이 당할까 걱정된 사수죽은 시종 원금하의 목덜미에 칼을 대고는 긴장한 채 두 사람의 싸움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복면인을 상대하던 육역에게 사수죽을 원망하는 원금하의 목소리가 문득 들렸다.
“그만 좀 보고, 도망가요. 저들이 얼마나 더 피 터지게 싸우길 기다려요? 난 당신들 형제한테 완전히 결딴나고 있는데.”
저놈들 손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빨리 도망을 안 간다고 원망한다고?
육역은 속으로 기가 차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 계집애는 포쾌로 지금껏 어떻게 굴러먹은 거야?
사수죽과 복면인은 형제, 의리 같은 말을 소리 질러 주고받았다. 육역은 기세를 몰아 몇 초 더 기습했고, 그예 복면인의 몸에 몇 군데 상처를 입혔다.
바로 이때, 양악이 뛰어나왔다. 육역은 그가 원금하를 구하기를 바랐건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는 우습게도 사수죽에게 길을 터주었다.
육역은 사수죽의 도망을 막으려 했으니, 복면인도 더는 봐줄 수 없었다. 복면인의 인후를 향해 그는 구절편의 잘린 편을 섬광처럼 휘둘렀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넘어진 원금하가 바로 복면인의 앞을 가려 버렸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놀라 두 눈에 힘이 들어간 육역은 급히 내력을 거뒀다. 그러자 오히려 자신의 내력에 가슴을 둔중하게 짓눌려 지긋한 아픔이 전해졌다. 그리고 내력이 사라진 구절잔편이 그녀의 목덜미를 그으며 선혈이 흘러 나왔다.
그때, 사수죽이 달려들어 육역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복면인을 향해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고, 복면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긴장한 양악이 원금하를 살폈다.
“너, 너……. 괜, 괜찮아?”
“나도 몰라. 죽으려나?”
목덜미를 더듬던 그녀는 아픔으로 이를 악물었다.
육역은 아무도 모르게 운기조식으로 가슴의 통증을 눌렀다. 그러고서야 양악에게 지시할 수 있었다.
“여기 이놈 끌고 가서 가둬……. 원 포쾌는 찰과상일 뿐인데, 무슨 호들갑이야.”
양악이 분노를 터트렸다.
“애 죽일 뻔했잖습니까!”
육역은 원래 성격상 해명 같은 건 하지 않던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래의 자리에 서서 목덜미를 만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가련하기도 하고 조금은 바보스럽기도 했다.
지금 명백히 해두지 않으면, 어쩌면 정말 자신이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한다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육역은 어쩔 수 없이 해명을 시작했다.
“하나, 원 포쾌는 사수죽에게 별안간 떠밀려서 저 도적 대신 구절편을 막았지. 둘, 그때 나는 이미 내력을 거뒀고, 원 포쾌의 상처는 나뭇가지로 그은 것보다 심하지 않을 거다. 셋, 사수죽은 부상 입은 몸이고, 원 포쾌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납치되었다고 해도 도망칠 수 있어야 했다. 원 포쾌는 왜 시간을 끌며 도망치지 않았지?”
양악은 육역의 말에 멍하니 굳었다.
육역의 가슴에서는 여전히 은근한 통증이 일었다. 서둘러 선실로 돌아가 운기조식을 해야 했기에 그는 더는 인내할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원 포쾌가 도적과 한패라고 생각했다면, 그 즉시 죽여도 과하지 않았어. 원 포쾌는 지금 약간 다쳤을 뿐이고, 나는 이미 사정을 봐줬다.”
“제가……, 그들과 한패라고 미리 단정해서 말한 건 대인이셨잖아요?”
그녀가 그를 보며 물었다.
이 여자 바보야? 역시 바보였어? 지금까지 말한 건 뭐로 들은 거야?
육역은 매우 유감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 그는 돌아서 양악에게 사수죽을 데려가라 분부했다. 장포 위에 묻은 혐오스러운 혈흔을 털어내고, 육역은 선실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겼다.
“이제 알았어요. 대인이 아까 절 그들과 한패라고 말씀하신 건, 제가 죽든 살든 신경 쓸 필요 없을 그럴듯한 명분을 위해서였군요!”
그녀는 그녀 자신이 전부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덧붙이든, 그녀는 이미 그녀가 말한 것이 전부 진실이고 일의 모든 전말이라 확신하고 있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육역이 걸음을 멈췄다. 살짝 고개를 틀어 바라보았지만, 어조는 여전히 간결했다.
“모두 관부 사람들이다. 말도 너무 솔직한 건 좋지 않아.”
“그…….”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고 있군.”
원래는 몇 마디 더 질책하고 싶었으나,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렀다. 바라보던 육역은 담담하게 한 마디 했을 뿐 바로 돌아서 선실로 돌아갔다.
육역은 좌선하여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런 후에야 가슴의 통증이 조금 줄어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이유는 모르지만 그 어린 포쾌의 목덜미에 난 상처가 생각났다. 잠시 고민하던 육역은 일어나 짐 안에서 연고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상처는 그로 인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아가씨라, 몸에 흉터가 남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래도 양정만에게 체면 정도는 살려줘야 한다.
육역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작은 약병을 챙겼고, 밥을 먹은 후, 그녀를 찾아가 겸사겸사 약도 전해 줄 거라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아침밥을 먹은 후, 육역은 금하의 선실로 갔다. 문을 두드리려는데, 안쪽에서 말소리가 새어나왔다.
“넌 이후 육 대인 저분과 좀 멀리 떨어져. 아버지 말씀이 틀리지 않는 게, 그분께는 반드시 공손하기만 해야 해.”
양악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원금하의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입안에 아직 무언가를 넣고 있는 듯했다.
“양주 사건은 아직 조사 시작도 안 했어. 육 씨는 수행원도 데려오지 않았고, 그때가 되면, 분명 우리 둘한테 시킬 텐데, 어떻게 멀어지냐? 숨으려야 숨을 곳도 없어.”
육 씨? 육역이 미간을 찌푸렸다.
양악의 말이 또 들렸다.
“우리는 그에게 흠 잡히지 않게 분부대로만 해야 해.”
원금하는 코웃음 쳤다.
“육 씨, 그 음험하고,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이 어떻게 우리 흠을 안 잡겠니. 어젯밤 내 목 벨 때 봤지, 눈도 깜빡 않더라. 대양, 그는 북진무사 사람이야. 태도는 냉정하고, 사람에 대한 인정도 없어…….”
들은 건 여기까지.
더욱더 미간이 일그러진 육역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연고도 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바로 자신의 선실로 되돌아 왔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참선은 천천히 양주의 부두로 접근했다. 바야흐로 흐드러진 봄날의 시작이었다.
今年東風太狡獪,弄晴作雨遣春來。
江南一夜落紅雪,便有夭桃無數開
올해는 동풍이 유난히 장난이 심해
맑은 하늘을 희롱하여 비를 내리고 놀리더니 봄을 남겨 두었네.
강남에는 하룻밤 새 매화가 붉은 눈이 되어 내리고,
아름다운 복숭화 꽃은 만발하여 피었구나.
왕사정(王士禎, 청나라 시인), <야춘절구(冶春絶句)> 12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