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금하는 가불한 월봉과 혼수 지참금을 싸 들고 서둘러 잠복과 잠수를 만났다.
“전부 은자 육십 사 냥이에요. 이 정도면 될까요?”
그녀는 은자 보따리를 탁자 위에 놓았다. 잠수 또한 자신의 보따리를 꺼냈다.
“내 쪽에서 백 삼십 냥 모았어.”
잠복이 말했다.
“내가 이미 좀 알아봤는데, 저들이 아직 대공자를 괴롭히진 않았답니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하긴 하나 봐요. 난 은자를 아래위로 뿌릴 궁리를 여러모로 하고 있어요. 그럼 대공자 안에 있으실 때도 아주 많이 힘드시진 않을 겁니다.”
“그럼……, 대인을 만날 수도 있어요?”
금하는 도통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대인을 보지 못하면, 나는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잠복은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 일은 내가 방법을 알아볼 테니, 돌아가 기다려요.”
* * *
그로부터 7, 8일이 훌쩍 지났다. 잠복의 소식만을 기다릴 수 없던 금하는 걱정이 되어 물어봤으나, 잠복 역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엄가의 그 사건 이후로 금의위 안팎으로도 변동이 유달리 심했어요. 원래 있던 하인들도 지금은 잘 몰라요.”
잠복이 미간을 찡그린 채 한숨을 내쉬었고, 옆에 있던 잠수는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금하는 별 수 없이 온종일 육선문에서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이날 해 질 무렵, 양악이 매우 황급히 육선문으로 돌아왔다.
“육 대인의 외조모 댁도 재산을 몰수당했어. 방금 내가 많은 안식구들이 경성으로 압송된 걸 봤는데, 순우 아가씨도 그 안에 있었어.”
“뭐? 그럼 대인 외조모님은?”
금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본래 연세가 많으신 데다가 이런 일을 당하셨으니, 더 견디지 못하셨대. 길에서 풍한에 걸리셨는데, 경성 도착 전 돌아가셨단다.”
양악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순우 아가씨를 속량(*몸값을 받고 노비의 신분을 풀어 주어서 양민이 되게 하던 일.)시키고 싶어.”
“이 안식구들은 어디로 보내져? 관기로 가?”
금하가 긴장하여 물었다. 사람이 한 번 관기로 보내지면, 밖에서 속량하고 싶어도 더는 쉽지 않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듣기로 하녀를 사고자 하는 건 먼저 고를 수 있대.”
“그럼 넌 얼른 안 가고 뭐해!”
그러나 양악은 여전히 망설였다.
“우리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실까 걱정돼. 아버지가 반대하면, 나는 은자가 없어. 그럼 어떻게 속량하냐? 그래서 너와 상의하려 한 거야. 어떻게 해야 우리 아버지 허락을 얻을까?”
“사람부터 속량시키는 게 중요해. 너 료 사야 쪽에 가서 은자를 받아.”
금하가 양악의 귓가에 대고 여차여차 한바탕 얘기를 시작했다.
“네가 이렇게만 말하면, 료 사야가 은자를 안 내줄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사람을 이미 속량시킨 이상, 그때는 대장이 반대하려 해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으셔.”
“정말?”
“그래, 정말! 얼른 가. 만일 다른 사람이 먼저 골라갔으면, 어떡해.”
금하는 그를 재촉했다.
양악은 그녀의 말에 마음이 급해졌다. 은자를 받고자 성큼 걸음으로 료 사야를 찾아 달려갔다.
육가에 생긴 변고로 육역의 외조모 댁까지도 연루되어 들어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지금 육가의 상황은 옛날 하가와 너무도 닮아 누구 하나 이 화를 피해가지 못하는 구나.
금하의 마음은 수많은 생각으로 어지럽게 얽혔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육가의 안식구들이 어디로 압송되는지 보러가기 위해 이제 막 육선문을 나설 때였다. 잠수가 급하게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른 가자. 우리 형이 너 찾아!”
잠수가 그녀를 손짓하며 불렀다. 금하 또한 그를 따라 달렸다.
“대인은 안에서 어떠세요? 괜찮아요?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했어요? 며칠 동안 조급해서 죽을 뻔했어요.”
잠수는 그녀의 다급한 모습을 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왜 그래요?”
금하의 시선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잠수는 난처해진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렸으나, 금하는 그의 앞으로 또 자리를 바꿨다.
“대체 왜 그래요? 빨리 말하라고요!”
금하는 안달이 날 것 같았다.
“사실 대공자께서 널 보고 싶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너 데리고 오지 말라고 분부하셨어.”
잠수는 단숨에 말했고, 금하는 듣자마자 경악했다.
“대인이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
잠수도 매우 고민이 깊었다.
“나도 대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대공자가 여러 번 당부하셨고, 나와 형도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어.”
“그럼……, 지금은 절 만나려 하는 거예요?”
“아니.”
잠수는 초조하게 계속 한숨을 쉬었다.
“안에 계신 대공자가 그렇게 좋지가 않으셔. 아마 변고가 너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서일 거야. 어르신이 방금 돌아가시자마자, 이런 큰일이 일어났잖아. 그분 전반적으로 그리 좋지가 않으셔. 며칠 전까지는 그래도 음식을 좀 드셨는데, 요 며칠은 물도 거의 안 드셔. 나와 형이 걱정이 되어서…….”
그저 듣는 것뿐인데도, 금하의 마음은 벌써 불에 타는 듯 초조해졌다.
잠수는 그녀를 데리고 북진무사 뒤쪽의 작은 문으로 갔다. 입구를 지키는 이는 이미 뇌물을 먹은 것이 분명하여, 그들에게 손짓하고는 서둘러 들여보냈다.
그리고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잠복이 금하를 안내해 구불구불한 안쪽을 향해 걸었다.
금하가 북진무사의 감옥 안으로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훨씬 익숙한 형부의 감옥과 비교하면, 조옥 안은 습하고 음산했으며, 일 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썩은 냄새가 가득 고여 있었다. 또한 발길이 닿는 곳마다 울부짖음과 신음이 들렸다. 거대한 고통으로 가득 찬 그 소리들은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감옥은 형부의 감옥보다 더 작고, 층고도 훨씬 낮았다. 조금이라도 키가 큰 사람이 안에 갇힌다면, 허리를 세워 일어서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을 터였다.
금하는 잠복의 뒤를 따라 구불구불한 그 길을 걸었다. 감옥은 칸을 지날 때마다 몹시 초췌하거나, 마비되어 활기가 없거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 죄수들이 보였다. 바라보는 금하의 마음은 문득 문득 불안하고 숨이 막혔다. 육역이 지금 어떤 모습일지는 감히 더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잠복은 습하고 곰팡이 낀 통로에서 아무런 신호 없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왼쪽의 감옥을 향해 돌아섰다.
“대공자.”
잠복이 조용히 누군가를 불렀다.
감옥 안의 사람은 회색포를 입고, 검고 긴 머리는 풀어헤쳤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그는 벽에 기대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인이세요?
금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그 사람을 응시했다. 천천히 몸을 굽혀 앉아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인이세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거다. 회색포를 입은 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천천히 얼굴을 돌린 그가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금하는 작은 감옥의 나무 살 사이로 손을 내밀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치니, 그 사이로 준수하고 창백한 육역의 얼굴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그 사이 눈치 빠른 잠복은 방해되지 않도록 잠수를 끌고 조금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내가 너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육역이 그녀를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맞아요. 여긴 올 곳이 못 돼요.”
육역의 지금 이런 모습은 도리어 예전 그의 늠름하고 멋지던 자태를 함께 떠오르게 했다. 바라보던 금하의 마음은 견딜 수 없이 슬프고 괴로웠지만, 그녀는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의 앞에서 절대 슬퍼할 수 없었다.
“아마 음식도 맛없을 테죠. 하지만 결국에는 다 지나간 일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대인은 조금이라도 드셔야 해요.”
천천히 미끄러져 내린 금하의 손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저 어릴 때 시설에 있었잖아요. 거기도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때도 저는 스스로 자학한 적이 없어요. 먹는 것도 얼마나 많이 먹었는데요. 거기 아이 중 제가 가장 포동포동했고, 우리 엄마는 절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육역이 고개 숙여 그녀의 손을 바라 봤다. 어쩌면 그의 손이 매우 차가워서일 테지.
그녀의 손은 유달리 따뜻했고, 그 따뜻한 기운은 맞잡은 손바닥을 통해 그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그는 생각했다.
네가 아무 탈 없이 무사한 것을 보니……, 정말 좋아.
“넌 금갑신인께서 보우해 주시기 때문이야.”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낮게 읊조리듯 말했다.
“재난을 만나면 상서로워지고, 화를 만나면 복이 되길…….”
그를 바라보던 금하는 신하성에 있던 그때를 떠올렸다. 지금처럼 그는 이렇게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얘기했었다.
‘……스스로를 탓하지 마! 나는 네게 모든 일의 결말을 내줄 거야.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야. 그 동안 넌 잘 살아 가면 되고, 생각하지 말고, 어떤 복수도 하려 하지 마…….’
돌연 금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의 손을 와락 잡아 쥐었다.
“대인이 말했어요. 내게 모든 일의 결말을 내줄 거라고요.”
금하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육역의 어떤 표정의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엄가는 이미 쓰러졌어요. 대인 지금 설마 본인 목숨으로 결말을 내주려는 거예요?”
미미하게 시선을 내린 육역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금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나고, 마음도 아파 미칠 것 같았다.
“당신 왜 이렇게 바보 같아요! 당신이 이렇게 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결말이라 생각해요?”
“이 원한은 너무 크고 깊어서 나도 네게 어떻게 갚아줘야 할지 모르겠어. 지금 이런 건 차라리 잘 된 거야.”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대인…….”
그에게 화가 난 금하는 머릿속이 오히려 아주 명쾌하고 맑아졌다.
“당신이 내게 결말을 내줄 거라 했죠? 당신 알아요? 당신이 이 조옥 안에 있고, 나는 당신을 만나러 들어오기 위해, 반년 치 월봉을 가불 했어요. 그뿐 아니라 우리 엄마한테는 내 혼수 지참금도 전부 내달라 했다고요. 잘 들어요. 지금 나는 지참금 하나 없고, 다시 은자를 모으려 해도, 또 몇 년의 시간을 보내야 해요. 그럼 그때 난 분명 누구도 원치 않는 늙은 노처녀가 됐겠죠. 당신이 내게 이 일을 끝장내 주려면, 아무 탈 없이 옥에서 나와 나한테 장가 와야 끝장냈다고 하는 거예요!”
금하는 육역을 잡아끌어다 얼굴을 맞대고 단숨에 말을 끝냈다.
육역이 넋이 나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맑고 낭랑해서, 다소 멀리 있던 잠복과 잠수까지도 경악하며 바라봤다.
“넌……, 넌 잊지 마. 우리 두 집안 사이에는…….”
육역의 어조는 불안했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당신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엄세번도 죽었죠. 엄숭은 변방으로 유배노역형 가 있고요. 그해 일어난 그들 사이의 일들은 이미 다 지나갔어요. 당신이 만약 자신도 거기 넣어버린다면, 그럼……, 나도 살아갈 수 없어요.”
금하는 말을 잠시 멈췄다.
“방금 한 말, 나는 진심이에요. 내가 우리 엄마한테 혼수 지참금 달라고 할 때, 지참금 필요 없이도, 나는 혼인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러고서야 엄마는 은자를 주셨다고요.”
육역은 온통 진지함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고, 또한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금하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
“지금은 대인 차례에요. 아무리 어려워도 잘 살아 가고 있겠다고 내게 약속해 줘요. 다른 일은 전부 생각하지 말고, 한 가지만 생각해요. 내가 대인 기다리고 있다는 거요!”
육역은 꼼짝도 안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약속한 거죠?”
육역이 나무 살 사이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지 마. 은자 좀 아끼며 날 기다리고 있으면 돼.”
그가 당부하여 말했다.
금하는 환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그 후, 금하와 여러 사람들이 육역의 소설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3년 후, 육역은 다시 상주서를 올렸고, 당시의 재상 또한 그의 억울함을 씻어주기 위해 육병이 곤경에 처한 임금을 구조하는 데 공이 있고, 모반을 꾀하고 반역하려 하는 간당이 아니라고 인정하였다.
이때 조정의 천자는 이미 바뀌어 성상은 성지를 내려 육역을 사면하고, 빼앗은 가산을 돌려주며, 아울러 그의 관직 또한 원래대로 복직시키라 명하였다.
* * *
바야흐로 때는 섣달, 강남에는 아주 미세한 눈꽃이 날렸다.
나루터에는 모자 달린 외투를 입은 상관희가 화물 송장을 손에 들고 이번에 경성에서 온 물건을 하나하나 상세히 점검 중이었다. 때마침 찬 회오리바람이 한바탕 불어와 그녀의 모자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녀가 손으로 모자를 누르는 사이 화물송장이 그만 손에서 날아갔다.
바람에 날린 송장은 강물 위까지 펄럭이며 날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쫓아가기 전, 인영 하나가 먼저 몸을 날려 뛰어올랐다. 그는 푸른 제비처럼 경쾌하게 날아 발끝이 가볍게 돛대를 스쳤고, 화물송장을 낚아채서는 허공에서 몸을 돌려 되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상관희의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당주.”
아예는 여전히 옛날 그때처럼 그녀를 부르며 화물송장을 전했다. 그의 얼굴은 예전 가득하던 딱지는 거의 떨어졌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도 가느다란 상흔들을 볼 수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상관희의 입술에 한 줄기 웃음이 떠올랐다.
“잘못 불렀다. 지금 나는 방주이지.”
아예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리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과 소방주는, 아니, 사가 공자께서는……, 축하드립니다.”
상관희가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성혼하지 않았다. 그 술 두 단지는 아직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어. 사소는 서북으로 갔고, 이렇게 큰 방에 돌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지. 내가 어르신을 도와 잠시 도와드리고 있을 뿐이야.”
“…….”
아예는 그녀가 아직 성혼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조금 멋쩍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를 바라보던 상관희가 다시 수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날이 따뜻해지면, 네가 호수 밑의 술 두 단지를 건져 올려라.”
아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대답 하는 입술 위로 웃음이 스몄다.
* * *
경성 안에는 눈이 본격적으로 내리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순우민은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양악에게 가로 막혔다.
“날이 너무 추워요. 내가 양고기 교자 만들면 되니까, 당신은 손 적시지 말고, 안에 들어가 불이나 쫴요.”
순우민이 빙긋 웃었다.
“불 때는 거 도울게요. 오늘 큰 오라버니가 조옥에서 나오시는데, 저도 성의는 좀 보여야 하잖아요. 그분들이 언제 도착할까요? 교자가 그 안에 될까요?”
“늦지 않아요. 내가 금하에게 듣기론 성상께서 돌려주신 옛집을 한번 가 보려 한대요.”
조옥을 나온 육역의 얼굴 위로 눈송이가 흩날렸다. 매우 차디찼지만, 오랜만에 새롭고 청아한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말을 끌고 온 금하는 앞쪽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어깨에 적잖은 눈이 쌓인 것을 보니, 이미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육역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쌓인 눈송이를 가볍게 털어냈다. 이렇게 재회의 날이 있을 수 있음에 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만족하여 더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바로 말에 올라탔다.
“그 옛집은 너무 오래 폐쇄되었어요. 안은 분명…….”
금하는 그가 폐허가 된 옛집을 보고 상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니면, 며칠 후 청소를 다 하고 그때 가죠?”
“나는 우선 가보고 싶어.”
육역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금하는 더는 권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 육가의 옛집으로 달려갔다.
옛집의 대문 위에는 대단히 큰 동 자물쇠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열쇠는 육역이 조옥을 나오고서야 돌려받았다.
육역이 자물쇠를 열고,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기름칠 하지 않은 문 축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고, 그들은 조심스레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원래는 보이는 곳 전부가 폐허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큰눈이 내려서 오히려 망가진 모든 것들이 눈으로 덮였다. 시선을 들어 멀리 보면, 새하얗게 눈으로 덮인 한 조각일 뿐이었다.
육역은 대청 앞까지 내쳐 걸었다. 금하 또한 말을 잘 매어두고, 빠르게 그를 따라갔다.
대청은 이미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망가진 탁자와 의자, 칠이 얼룩덜룩 떨어진 그림, 그리고 병풍의 비단은 전부 색이 바랬다.
과거의 영광이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씁쓸함이 느껴진 육역의 눈앞에 지나간 날들의 광경이 순간순간 빠르게 스쳤다.
휘몰아친 찬바람에 그는 한바탕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고개를 기울여 옆에 선 금하를 본 순간 스산한 마음은 어느새 온기로 차고 있었다.
육역은 금하를 향해 돌아섰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여잡고, 고개 숙여 조심스럽게 붉은 입술에 입 맞췄다. 차가운 입술에선 눈꽃의 맛이 나고, 어느새 떨어진 뜨거운 눈물과 섞였다. 누구의 것인지도 지금은 의미 없이 하나로 녹아들었다.
“돌아왔어요.”
“음.”
육역은 금하를 단단히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지난날의 원한은 이제 모두 과거의 것, 오늘 이후는 그와 그녀의 완전히 새로운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