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가정 44년, 엄세번은 왜구와 내통하고, 천하에 악명 높은 해적과 결탁하고, ‘왕기(*제왕이 날 조짐, 또는 제왕이 될 조짐.)’ 있는 땅을 강점하였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선고받았다.
가산을 몰수당한 엄숭은 삭탈관직한 후 유배노역형을 받았다. 그리고 수색한 집에서 황금 삼만 이천 냥, 백은 이백여만 냥, 그리고 보물과 골동품 수천 점을 몰수하였다.
* * *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건만, 오문(*옛 자금성의 정문.) 앞은 인파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그곳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한 금하를 비롯하여 육선문 포쾌들이 안전 유지를 위해 대규모로 파견되었다.
떠들썩한 인파 중에는 적지 않은 이들이 술 단지를 들고 다니며 그 자리에서 시원스레 마셔 버렸고, 심지어 주체 못 한 기쁨으로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이도 있었다.
양악이 혀를 차며 탄식했다.
“엄세번 인기가 이리 좋을 줄 평소엔 미처 몰랐다. 참수가 이렇게 사람을 즐겁게 하는 구나.”
금하는 말이 없었다. 박도를 껴안은 채, 냉정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래? 넌 별로 안 좋냐?”
양악이 팔꿈치로 그녀를 쿡 찔렀다.
“뭐가 급해. 저자의 머리가 정말로 땅에 떨어진 그때 좋아해도 늦지 않아. 저런 사람은 머리가 날아가지 않는 한 무슨 꼼수를 다시 부릴지 모를 일이야.”
금하는 집행대를 바라봤다.
“나는 그의 머리가 떨어지는 걸 봐야 진정으로 안심할 수 있어.”
양악이 흐흐 웃었다.
“네가 이렇게 신중할 줄 몰라 봤는걸.”
오시가 가까워져 엄세번과 나문룡이 끌려와 형대 앞에 꿇어앉았다.
이때, 백성의 민심은 성난 파도처럼 크게 일어나 때려라, 죽여라, 아우성을 치고, 웅웅 울리는 고함 소리는 산과 바다를 휩쓸 만큼 기세가 거셌다.
태양이 살벌하게 내리쬐는 가운데, 산발을 한 엄세번이 집행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금하는 여전히 의심하는 마음이었다. 엄세번을 단단히 주시하는 눈빛은 그가 진짜로 엄세번인지 똑똑히 살피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엄세번이 돌연 고개를 들었다. 음험하고 냉혹한 눈빛이 주위 사람들을 천천히 훑었다. 금하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뜻밖에도 그는 그녀를 알아보고 음산하게 웃어 보였다.
불같은 열기가 쏟아지는 뜨거운 여름날, 그는 이 웃음 한 번으로 기어이 금하의 온몸으로 한기가 차오르게 했다.
도광이 번뜩이고, 사람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렀다.
육역은 근처의 건물 위층에 서서 냉랭한 시선으로 집행대 위의 혈흔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엄세번이 죽은 후, 심 부인은 부상을 회복한 개숙과 함께 경성을 떠났다.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편지를 써 알려줄 거라고 그들은 약속을 남겼다.
* * *
번화한 경성의 대로를 한 남자가 사력을 다해 나는 듯이 달렸다. 그 뒤를 칼을 든 금하가 줄기차게 쫓고 있었다. 길모퉁이를 지났을 때, 금하는 칼과 칼집을 동시에 남자의 등을 향해 날렸다.
“윽!”
박도는 날아가 남자의 등에 세차게 부딪혔다. 비틀거리며 단번에 쓰러진 남자는 일어날 새도 없이 달려온 금하의 한 발에 걷어차여 다시 쓰러졌다.
깔끔하게 일을 끝낸 금하가 그의 팔을 뒤로 묶었다.
“금하야! 큰일 났어, 금하야!”
뒤에서 양악이 숨을 헐떡이며 쫓아왔다.
남자의 손을 비틀어 제압해 둔 금하는 시선을 들어 양악을 쳐다봤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는 그가 계속 말하길 기다렸다.
“언관이 육병을 간당(*奸党 간당의 무리.) 이라고 탄핵했어. 성상께서 육 대인의 관직을 거두고, 가산을 몰수하여 옥에 가두라는 성지를 내리셨다. 게다가 육병이 생전에 뇌물로 받은 십 수만 냥을 찾아내 몰수하래!”
금하는 충격으로 손마저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하마터면 남자의 손을 비틀어 끊을 뻔 하여 아픔에 몸부림친 그가 살려 달라 소리를 질렀다.
“대인은? 지금 어디 계셔?”
“듣기론 이미 조옥에 잡혀 갔단다.”
양악이 미간을 찡그리며 답했다.
금하는 그 남자를 양악 쪽으로 밀어 버리고 돌아서 조옥을 향해 나는 듯 달렸다. 그러나 조옥 밖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에서 바로 가로막혔다.
“난 육선문의 포쾌예요. 공무가 있으니, 들여보내 줘요!”
금하는 제패를 꺼내어 문을 지키는 교위에게 똑똑히 보여줬다. 하지만, 교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공문이 없으면, 육선문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난 정말 공무수행중이에요. 먼저 들여보내 줘요. 이따가 누군가 공문을 가지고 올 거예요.”
교위는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문밖에서 막았다.
“당신…….”
“원 낭자!”
그때 급히 다가온 잠복이 금하를 한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낮았다.
“공문이 없는 한 소용없어요. 그게 아니면, 저 자식들은 돈만 알지 인정 같은 건 따지지 않습니다. 안 들여보낼 겁니다.”
“오라버니도 금의위잖아요.”
금하가 그를 한 팔로 꽉 붙들었다.
“저들이 분명 오라버니는 들여보낼 수 있잖아요. 날 데리고 들어가요!”
잠복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육가에 변고가 생긴 후, 저와 잠수도 면직 당했습니다. 지금은 저도…….”
“그럼 대인은 안에서 어떡해요?”
금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초조해졌다.
“난 조옥 안의 관행을 알아요. 들어와 돈이 없으면 잘 섬기라며 때리잖아요. 대인은 지금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어디 남은 은자가 있어 뇌물을 써요.”
“저도 바로 이 일로 마음이 조급합니다. 다행히 조옥 안 대부분은 어르신의 예전 부하들이에요. 그들이 어르신의 얼굴을 보아 대공자와 둘째 도련님께 사정을 좀 봐주길 기대해야죠. 시간을 벌어 우리가 돈 마련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요.”
금하가 물었다.
“은자는 얼마나 필요해요? 내가 얼른 돌아가 마련해 볼게요!”
“낭자 집도 쉽지 않은 거 알아요. 그래도 마련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부탁합니다. 저와 잠수도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알았어요!”
금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곧장 육선문으로 향했다.
* * *
“일 년 치 월봉 가불을 원합니다.”
금하는 우선 육선문의 회계 담당인 료 사야师爷를 찾았다.
료 사야는 이게 뭔 일인가 하는 듯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러자 금하는 더없이 초조해졌다.
“나 노려봐서 뭐하게요. 얼른요. 난 월봉 일 년 치를 가불하고 싶어요.”
“안 돼. 그런 규정은 없어.”
료 사야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육선문이 너희 집 것도 아니고. 어딜 이렇게 뛰어와 은자를 달란다고 낼름 내주냐!”
그를 흘끔 훑어보던 금하가 낮게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가 골목에 첩실 하나 데리고 있죠. 이 일을 사야도 내가 부인 쪽에 찌르는 거 바라지 않죠?”
료 사야는 바로 대경실색했다.
“너, 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어떻게 안 거는 상관 마시고요. 은자를 내줄 수 있는지나 좀 시원하게 말해요!”
료 사야는 정말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일 년 치 월봉 가불은 정말 안 돼. 이런 규정은 없어. 만약 위에서 알면, 내 밥그릇도 떨어지는 거야. 내가 네게 가장 많이 내줄 수 있는 건 반년 치 월봉이야. 이것도 위험을 무릅쓴 거다.”
“반년?”
“진짜 가장 길게 반년까지만 가능해.”
료 사야는 애원의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네가 날 더 압박해도 소용없어.”
이렇게 되니 금하도 어쩔 수 없었다.
“좋아요, 좋아. 반년으로 해요.”
얼마가 됐든 모두 은자이고, 모을 수 있는 최대로 모아야 했다.
가불한 월봉을 들고, 금하는 또 집으로 급히 돌아왔다.
원진씨를 본 그녀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쿵 무릎부터 꿇어 어머니인 원진씨를 크게 놀라게 했다.
“얘가. 왜 이러는 거니? 놀라게 하지 마라!”
원진 씨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어머니, 자식이 오늘 난관에 봉착하였습니다. 모아 두셨던 혼수 지참금을 제게 주실 수 있으신지요.”
금하는 일어서려 하지 않고 오히려 원진씨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엄마, 제발 부탁이에요!”
딸아이의 이상한 행동에 마음이 흉흉해진 원진씨가 캐묻기 시작했다.
“무슨 난관? 얘기 먼저 해보려무나.”
“제가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인석아, 난 네가 은자로 무얼 하려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은자를 내주니!”
금하는 우러러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엄마, 혼수 지참금을 제게 주세요. 이 돈 필요 없이 저는 알아서 시집간다고 제가 약속할게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원진씨는 딸내미 때문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그러나 무릎을 꿇은 금하는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엄마,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이 일은 정말 정말 중요해요. 만약, 만약 잘못되면……, 전 살아갈 수 없어요.”
“뭘 살아갈 수가 없어? 넌 무슨 헛소리를 하니?”
원진씨가 금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딸아이의 얼굴이 젖은 것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금하야, 왜 그러니? 왜 울어?”
금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운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 이런 모습은 정말 어머니인 그녀를 기겁하게 했다.
“엄마, 혼수 지참금을 우선 제게 주세요. 이후에 저는 알아서 시집갈 걸 장담할 게요. 돈은 다시 벌어서 갚아드릴게요, 네?”
금하는 간절히 간청했다.
“엄마가 너한테 무슨 돈을 갚으라고 해. 바보 계집애. 이 은자는 다 너 때문에 모아둔 거잖니.”
원진씨가 딸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울지 말거라. 은자 가져다주마.”
“고마워요. 엄마!”
금하는 소매로 대충대충 눈물을 훔쳤다.
“은자는 제가 알아서 가져갈게요.”
“아니다. 넌 어디에 있는지 모르잖니.”
“부엌 낚시 바구니 아래 항아리 안쪽에 있지 않아요? 장소 안 바꾸셨죠?”
원진씨는 순간 멍해졌다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망할 계집애. 언제 발견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