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금하는 조용히 비수를 응시하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육선문의 포쾌예요. 율법은 엄하고 공정한데, 어떻게 사사로이 형을 집행할까요. 하물며 지휘사 대인도 제게 은혜를 베푸셨잖아요. 대인께서 정말 후회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성상께 제 조부님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그분은 결백하다고 아뢰어 주세요.”
금하는 비수를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바라보던 육병의 눈에는 금하를 가상히 여기는 빛이 은은히 서렸다. 이내 육병이 소매 속에서 서류 한 묶음을 꺼내 건넸다.
“이것은 하언의 소설(*원통한 죄나 억울한 누명 따위를 밝혀 씻음.)을 위한 자료들이다. 네가 잘 갖고 있거라.”
금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서류 묶음을 받았다. 대략 넘겨보는 손끝은 저도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육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네는 기억해야 하네. 지금의 성상은 자만심이 매우 강하여 그를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 확신하지. 잘못은 더더욱 인정할 줄 몰라. 그가 재위하는 동안은 하언을 위한 소설은 불가능해. 자넨 장래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여야만 이 일을 거론할 수 있을 게야. 그렇지 않으면, 불을 일으켜 자신을 태우는 격이 되고 말아.”
금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원수일까, 적일까, 친구일까?
그녀는 이젠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마 그날을 기다리지 못할 게다.”
육병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하는 그 서류를 품속에 잘 챙겨 넣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육병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어르신이 빚지셨던 거예요. 제가 고마워할 필요는 없는 거죠?”
육병은 주관이 뚜렷한 금하의 행동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필요 없다.”
그때 문득 이쪽으로 달려오는 요란하고 떠들썩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의 소리도 어렴풋이 섞여 들렸다.
“대공자! 대공자!”
“대공자,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육역이라고?!
금하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생각해 보던 그 짧은 사이, 육역은 이미 내실로 들어왔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금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저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버님, 금하를 불러 무엇 하시는 겁니까?”
육역이 육병에게 물었다. 그의 어조에는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육병은 그의 말에 대답 없이 가볍게 나무랐다.
“너를 좀 돌아봐라. 신발도 갈아 신지 않고 들어와서 진흙발로 다니다니. 원 낭자가 너보다 분별이 있구나. 알아들었으면, 우선 신발부터 갈아 신고 다시 들어 와.”
멈칫한 육역의 시선이 흘끔 금하의 발을 향했다.
“잠복!”
그 사이 육병이 외쳤다.
“원 낭자를 모셔다드려라.”
금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역의 앞을 지날 때 그녀는 기어이 걸음을 멈췄다. 아쉬운 마음에 차마 걸음을 옮기지도 못하고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몸은 괜찮아진 거야?”
육역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아 금하는 온 힘을 다해 그에게 웃어 보였다.
“이미 많이 좋아졌어요.”
상대를 향한 시선에는 많은 말이 담겼다. 하지만, 차마 말로 꺼낼 수는 없어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흠흠.”
육병이 두어 번 기침을 했다.
금하는 홀연 정신이 돌아와 어쩔 수 없이 시선을 거뒀다. 그렇게 육역을 스쳐 지났고, 잠복을 따라 육부를 떠났다.
육역은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아버님, 금하를 불러 무얼 하셨습니까?”
돌아선 그가 반복하여 육병에게 물었다.
육병은 연달아 며칠을 자리보전 중이었다. 어렵사리 오늘 다소 정신이 드셨나 했는데, 어찌 돌연 금하를 부를 생각을 하셨을까, 설마 무언가 알고 계신 건 아닌가?
시선을 든 육병이 느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도 묻고 싶구나. 넌 줄곧 한밤중에 남의 집 앞으로 달려가 멀거니 있는데. 그건 뭐 하는 것이더냐?”
“저는…….”
육역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육병은 차갑게 흥, 소리를 냈을 뿐 아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육역은 금하의 일에 여전히 마음이 쓰여 연이어 물었다.
“조금 전 금하를 힘들게 하진 않으셨죠? 겁주신 건 아니시죠?”
“그 아이 모습 어디가 겁먹은 것 같더냐?”
육병이 화제를 돌렸다.
“아, 유 장군의 일은 이미 가닥을 잡았다. 이른 시일 내 그를 형부의 감옥으로 옮기고, 형부상서 황문승이 직접 심리할 게다. 황 상서 쪽에는 내가 이미 손을 써놨으니,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뜻으로 그가 유 장군을 북쪽으로 보낸다고 조치할 게다. 우선 북쪽에서 이 년가량 있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 원래 있는 곳으로 불러들이자.”
육역의 기쁨은 남달랐다.
“이보다 더 좋은 방안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방으로 돌아가게 날 좀 부축해라. 네게 줘야 할 물건이 있다.”
그때, 탁자를 붙들고 일어서려던 육병은 돌연 몸이 완전히 기울어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게 놀란 육역이 다급히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님, 아버님……!”
이 짧은 순간, 육병은 마치 몸과 마음 전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듯 안색마저 희끗희끗 창백해졌다.
“방으로 돌아가게 부축하렴.”
육병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갈라졌다. 그는 온몸을 아들에게 기대어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육역은 지금껏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는 기력 하나 남지 않은 아버지를 아예 안아서 침실의 침상까지 옮겨 드렸다.
“아버님, 바로 사람을 보내 의원을 오라 하겠습니다.”
육역이 가볍고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침상에 내려놓고, 큰 베개로 등을 받쳤다.
육병은 제대로 버티려고 애를 쓰다가 손으로 장식장을 가리켰다.
“두공부집杜工部集(*두보의 시문집.)을 가져오너라.”
“아버님, 의원을 부르는 게 더 급합니다.”
“아니다……. 네가 가져오너라.”
육역은 마음이 놓이질 않아 아버지를 조금 더 살펴드린 후에야 장식장의 ‘두공부집’을 가져왔다.
육병은 이미 손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아 육역에게 책을 펼치라고 눈짓했다.
“안쪽에 있는 편지를 꺼내거라.”
편지? 책 사이에 껴 있는 건가?
육역이 의심하며 책을 몇 장을 들췄다. 그 사이에는 아주 얇은 편지지가 끼어 있어 그는 그걸 꺼내 아버지에게 전했다.
그러나 육병은 손을 내저으며 그에게 펴보라고 일렀다. 이내 육역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며 편지지를 펼쳤다.
한 장은 풍수지도로 어느 땅에 왕의 기운이 어떻게 서려 있는지, 이 땅을 얻는 자는 천하의 위세를 어찌 얻을 것이라는 등의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다른 몇 장은 엄세번이 어떻게 이 땅을 강점했는지, 그 위에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것은……?”
“이건 내가 몇 년 전부터 엄숭에게 엮어 둔 올가미이지.”
육병은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말했다.
“남도행은 이미 죽었고, 환관은 진술을 번복한 지금이 바로 성상이 엄숭을 가장 싫어할 때이다……. 엄세번이 나문룡과 결탁해 왜구와 내통하였다는 증거를 나는 네 서재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지금이야말로 엄가를 무너뜨릴 가장 좋을 때야.”
“아버님…….”
육역은 육병이 엄가에 이리도 맹렬한 한 수를 남겨두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을 전부 넘긴 육병은 몹시 지쳐 눈을 감았다. 그가 하는 말은 이제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렸다.
“네게 모든 걸 넘겼으니, 나는 내려놓을 수가 있구나……. 너는 가보아라. 쉬어야 겠어…….”
“아버님, 아버님……!”
육병의 얼굴색이 점점 거무스름해졌다. 육역이 급히 그의 맥을 짚었으나, 맥박은 약하고 힘이 없이 불규칙했다. 이건 분명 이미 생명이 다해간다는 조짐이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얼른 의원을 불러 오거라!”
육역이 경악하여 연달아 사람들을 부르고, 또한 서둘러 삼탕을 끓이라 명했다.
그러나 삼탕이 채 끓기도 전, 육병은 기어이 세상을 떠났다.
* * *
금하가 육병의 부음을 듣게 된 것은 이미 그가 세상을 떠난 둘째 날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넋이 나갔다. 어제 육병이 그녀와 얘기할 때, 육병은 비록 병색이 있긴 했어도 정신은 맑아 보였다.
어떻게 갑자기 돌아가시지?
육역……. 대인은 정말 슬프고 힘들 거야.
밤이 깊어도 금하는 침상에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수를 써도 잠이 오질 않아 그녀는 차라리 자리에서 일어나 육병이 준 서류도 꺼내 들었다.
불을 켜면 아마 어머니가 기름 낭비한다며 뭐라 하실 거다. 그녀는 서류를 들고 아예 뜰로 나가 달빛에 비춰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봤다.
밤바람이 가볍게 스치듯 불었다. 작은 뜰은 매우 시원하였고, 바깥 커다란 대추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쏴쏴 하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들렸다.
그 밤의 적막 속에 앉아 금하는 서류를 보고 또 보았다. 육병이 한 말을 떠올리면, 마음은 이리저리 뒤엉키고 심란해졌다.
이 서류는 이미 색이 바랬다. 벌써 여러 해 동안 육병이 곁에 두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설마 대인의 아버지는 줄곧 조부가 쓴 억울한 누명을 벗기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까?
아니면 그는 이 자료가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길 원치 않아서 곁에 숨겨두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왜 차라리 이 서류를 없애서 근심을 덜지 않았을까?
육병, 그 분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정말 사람을 종잡을 수 없게 해.
의미 없는 금하의 시선이 담장 밖에 멎었다. 그곳엔 지금 잎이 무성한 대추나무가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기분이 이상해졌다. 심장이 조이는 듯한 그 느낌은 강남에서 돌아온 이후, 이런 깊은 밤이면 가끔 느껴져 마음이 먹먹해지곤 했다.
‘누구……,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아아.
금하는 탄식했다. 이제야 그녀는 알 것 같았다. 그때의 짙은 어둠 속에는 분명 누군가 있었다. 그녀에게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누군가……, 항상 그녀를 지켜 봐주던 그 사람이, 그녀에게만 웃어주던 그 사람이……!
생각할 틈은 없었다. 돌연 일어난 금하는 달려가 마당 문을 열었다.
……대추나무 아래, 미처 피하지 못한 육역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였어!
몇 번이나 왔던 거야? 이 나무 아래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던 거야?
육역이 천천히 일어섰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다소 창백한 얼굴은 초췌하고, 피로해 보인다.
“어젯밤은 내가 아버지 영전을 지켰고, 오늘은 동생이 지키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밤빛에 스미듯 조용했다.
“그런데 나는 잠들 수가 없어서 나와 앉아 있다.”
금하는 그가 실제가 아닌 마치 환영 같다는 생각으로 그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여기 앉아 있으면, 내 기분이 다소 나아지곤 해. 너희 집 앞 대추나무 아래보다 더 좋은 곳이 생각나질 않는구나.”
육역이 자조적으로 웃어 보였다.
금하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라도 깜빡하면, 그 사이 그가 사라질까 지독히도 두려워졌다.
“내가 오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마음이 견디기 어려울 때는 와서 앉아 있고 싶어져.”
금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가 그를 와락 안아 주었다.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어떤 말도 필요치 않고, 다만 이렇게 단단하게 그를 안아 주었다.
두 손으로 마르고 거칠어진 그의 얼굴을 쓰다듬고, 저 먼저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입 맞췄다. 쉴 곳을 찾아온 그에게 금하는 온기를, 제 위로를 담아 전했다.
한창 진한 밤빛, 뭇별은 고요히 숨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