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두 밤을 꼬박 의식불명이던 금하는 셋째 날이 되어서야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눈을 떴다. 그렇게 그녀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침상에 앉아 있는 심 부인이었다.
“이모…….”
금하가 조용한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심 부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정신이 드니? 배고프지?”
“이모, 괜찮으세요?”
금하는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아저씨는요?”
“모두 괜찮아. 걱정 말거라.”
심 부인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홍두탕 한 그릇 담아줄게. 마실래?”
금하는 이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눈매를 찡그리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연못 속에 잠겼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연못의 물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차디찼다.
“이모, 누가 절 구했어요.”
심 부인이 금하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녀에게 홍두탕을 먹이며, 심 부인은 지금껏 일어난 일을 차근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육 대인이 네 옆에서 이틀 내내 지키고 있었단다. 단 한순간도 움직이질 않았지. 내가 보기에 그는 널 제 목숨처럼 아끼고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더구나.”
심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그의 아버지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길 전해 듣고, 네 맥박이 충분히 안정을 찾는 것까지 보고서야 겨우 갔단다.”
금하는 침대 가를 바라보았다. 육역이 자신의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은 더없이 쓰리고 아파졌다.
그녀는 급히 고개 숙여 홍두탕을 마시는 척하며 감정을 숨겼다.
* * *
지금껏 금하는 집에 희소식은 알리고, 근심은 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포쾌의 신분으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 일이 종종 있었다. 또 그것이 공무 때문인 까닭에 식구들은 그녀에게 캐묻기가 쉽지 않아 밖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서로 익숙해졌다.
이 며칠 그녀는 계속 밖에서 지내며 상처를 치료했다. 양악에게 부탁하여 집에는 그녀가 출장을 갔노라고 전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못이 몸에 깊숙이 들어가지 않아 상처가 비교적 작고 아무는 것도 빨랐다는 것이다.
다만, 출혈 과다로 몸이 허약해져서 심 부인은 며칠을 걸쳐 각종 보혈의 약재를 더한 홍두탕과 저간탕을 계속 주었다. 그러니 금하의 몸도 이제는 많이 좋아지고 있었다.
행동이 자유로워졌을 때가 되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원진 씨는 딸아이의 초췌한 모습에 깜짝 놀라 캐물었으나,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히 돌아왔기에 그리 많이 추궁하진 않았다. 그녀에게 집에서 잘 쉬라고 하고,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날, 금하의 부모님은 두간을 팔러 가시고, 집에는 원익과 금하 두 사람만 남았다.
원익은 뜰에서 머리를 흔들어 가며 논어를 외우고 있었다. 때마침 ‘오여회언종일吾与回言终日, 내가 안회와 함께 종일 이야기해도.’의 부분을 외우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마자, 원익은 얼이 빠졌다. 문밖에는 금의위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원 낭자 계십니까?”
“있어요.”
원익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다가 안채를 향해 크게 고함을 질렀다.
“누나, 누가 찾아왔어요!”
금하가 나와서 찾아온 사람을 확인했다.
“잠 오라버니?”
잠복의 안색은 진중하였다.
“저와 함께 가시죠. 만나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의 안색이 심상치 않아 보여 금하는 육역에게 문제가 생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마음부터 허둥거렸다.
“대인께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러나 잠복은 더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묵묵히 그녀가 마차에 오르기를 청했다.
금하는 두근두근한 심장을 안고 잠복을 따라갔다. 방향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육부 쪽인지라, 그녀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육역에게 만약 급한 일이 생겼다면, 그는 무슨 일이었든 자신이 그녀를 만나러 오지 그녀에게 절대 육부로 오라 하지는 않을 터였다.
오늘 이렇게 그녀를 육부로 오라 했다는 건……, 설마 대인이 바닥에 설 수도 없을 만큼 중상을 입은 걸까?
측문에는 누군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잠복이 말고삐를 그에게 건네고, 금하를 데리고 안으로 바쁘게 걸어 들어갔다.
금하는 처음으로 육부에 온 것으로, 집이 매우 크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잠복을 따라 정원의 커다란 바위를 돌았고, 구곡교(*지그재그형으로 여러 번 구부러진 다리.)를 지났다. 그러고서야 꽃나무 사이에 숨은 듯 들어앉은 작은 가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은 예전 당唐의 양식을 본떠 지은 것으로, 자못 고풍스러움을 갖췄다.
집 밖에 선 잠복이 공손히 아뢨다.
“어르신, 원 낭자를 데려왔습니다.”
어르신!
날 보려 한 사람이 육역이 아니라 육병이었다고?!
금하는 놀라 눈빛이 멈칫했다.
안으로 들어가는 여닫이문은 반쯤 열려 있었는데, 안에서 육병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라 해라. 너희는 모두 물러가거라.”
잠복을 빼고도 가복 몇이 더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도 육병의 지시에 따라 하나하나 이곳에서 물러났다.
육병이 그녀를 찾은 건 대체 무슨 일일까? 설마 그가 이미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금하는 여전히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원 낭자, 들어오시오.”
그때 안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어조에는 한숨이 묻어 있었다.
“어떤 일들에 대해 나는 진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네.”
육병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조금 머뭇거린 후에야 금하는 신발을 벗고 올랐다. 이내 입구에 놓인 나무신을 신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걸어 들어가니, 가부좌를 한 육병이 낮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는 붉은 진흙의 작은 화로 위에서 이제 막 주전자 안의 찻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다친 곳은 좀 좋아졌는가? 마침 잘 왔소.”
육병이 대나무로 만든 차칙(*다도에서 찻잎을 뜨는 숟가락.)으로 찻잎을 떠서 주전자 안에 넣었다.
“두어 번 끓어오르면, 차가 다 되지. 평소 무슨 차를 즐기나?”
금하는 눈앞의 사람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녀도 예전에 육병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먼발치에서 사람으로 앞이 가려진 상태였고, 게다가 육병은 높디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늘 본 그는 오히려 평범할 뿐이었다. 단지 눈과 눈 사이에 서린 노련함과 침착함, 그리고 근심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무거워 보일 뿐이었다.
“차를 따로 가리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답했다.
“앉으시게.”
육병이 자신의 앞쪽을 가리켰다.
그가 오늘 무슨 말을 하려 하든, 자신은 결국 도리에 맞을 것이니, 사실은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금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차가 다 끓고, 육병이 그녀에게 한 잔을 따라 탁자 위로 밀었다. 문득 시선을 든 그가 그녀를 보며 가볍게 탄식했다.
“네 눈썹은 네 조부와 매우 닮았구나.”
금하는 멈칫했다. 이렇게 말한다 함은 그가 이미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아는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얘기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조사한 걸까?
“긴장할 필요 없다.”
“긴장하지 않습니다!”
금하는 당장 부인하며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육병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비록 하가의 후손이라 하나, 내게는 전혀 어떤 위협도 되지 않는다.”
기왕 그가 그것에 관한 얘기를 꺼낸 이상, 금하도 더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그날, 사람들을 데리고 심가의 옛집으로 와서 제 이모와 아저씨를 구해주심을 저는 매우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마 그때 어르신은 제 진정한 신분을 모르셨을 겁니다.”
금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지금 이미 알고 계신 이상, 죽이시든 살리시든 편한 대로 하십시오. 단, 제게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 부모님은 이 일에 대한 사정을 전혀 모르시니, 그분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심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제 이모도 심련과의 정을 보시어 놓아주십시오.”
“시장에서 두부를 팔아 근근이 살아가는 부부를 처리한다?”
육병은 태연한 표정으로 찻물 위로 피어오르는 열기를 후후 불었다.
“내가 아직은 그만큼 한가하지가 않다.”
금하가 긴장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오늘 저를 부르신 것은 화근을 철저히 없애 버리려 하심입니까?”
“너와 얘기를 하고자 했던 것이지. 넌 긴장할 필요 없다.”
“전 긴장하지 않았습니다!”
금하가 거듭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저는 어르신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육병이 돌연 웃기 시작했다.
“네가 눈썹을 세울 때는 네 조부와 유달리 닮았구나……. 나는 알고 있다. 넌 나를 증오하고, 내가 너희 일가 사람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네 조부의 성품으로는 내가 없었다 해도, 그는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분은 관리로서 청렴했고, 인품은 강직하셨어요. 당신이 엄숭과 결탁해서 구경에게 그가 변방의 장수와 교류를 맺고 결탁했다고 모함하라 했잖아요.”
금하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육병은 그녀를 보면서도 전혀 조급해하지 않았다.
“관리로서 청렴한 건 사실이고, 인품이 강직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단지 애석한 것은 그가 지나치다는 데 있었다. 강함이 지나치면, 꺾이기 쉽단다. 당시 조정에는 우스갯소리가 떠돌았는데, 비굉(*费宏 명대 재상.)을 보지 않고는 관리가 그리 성품 좋다 알지 못하고, 하언을 만나지 않고는 관리가 그리 오만한지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지. 조정의 신하들이 네 조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겠지.”
“당신이 그분을 해친 건 해친 거예요. 이렇게 핑계를 찾고, 이런 얼굴을 하는 건 멸시감만 들게 해요.”
금하는 오늘 어떤 상황이 생기든 목숨 전부를 내걸었으니, 말도 더는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결코 핑계를 찾은 것이 아니다.”
육병은 역시 화를 내지 않았다. 그가 차를 마시고 다시 말했다.
“한마디 하자면, 네 조부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지. 그 해 그의 손에는 나를 탄핵하는 상주서가 들려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일을 막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며 간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릎을 꿇어?
울며 간청해?
금하는 멍하니 굳었다. 그녀는 육병이 하언에게 간청했다고 한 사실을 양정만에게 미리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참기 힘들 정도까지 간 것은 알지 못했다.
육병은 당시 이미 금의위 지휘사였고, 그의 신분으로 하언에게 무릎을 꿇고 울며 빈다는 것은…….
“이 일은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묵혀 두었었는데, 마침내 꺼내게 되었구나.”
육병이 미소 지었다. 웃는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홀가분함이 스며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일로 하언을 이가 갈리게 증오했지. 사실 이렇게 오래 지나 다시 돌이켜 보고서야 똑똑히 분별할 수 있겠더구나.”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하언이 아니라, 놓을 수 없던 명예와 부를 향해서였던 것이지. 하언은 말이다. 보기에는 고집스러운 노인이나, 우는 사람을 견디지 못하고 간청하는 이를 못 이겨. 마음이 너무 약한 이였다.”
듣고 있던 금하는 한참을 멍해 있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는 좋은 분이셨음에도, 당신들한테 죽임당하셨어요.”
육병은 더는 부인하지 않았다. 금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타깝게도 내가 그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한 때가 이미 많이 늦었구나.”
“정……, 말 그분께 미안하다고 생각하세요?”
금하는 꼼짝도 안 하고 육병을 바라봤다.
육병은 대답 없이 탁자 아래에서 긴 비수 한 자루를 꺼내어 금하의 눈앞에 놓았다.
“넌 하가의 후손이다. 마음에 분노와 증오가 있다면, 나를 찔러도 무방하다. 나는 절대 반격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