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아버님, 제 방에 있던 물건은 아버님이 가져가셨습니까?”
긴박한 상황에 육역은 제대로 인사를 올릴 겨를도 없이 대놓고 물었다.
“네가 매우 서둘러 돌아왔다고 들었다. 안색도 심상치 않다더니, 정말 그렇게 보이는구나.”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쓰고 있던 육병이 붓을 놓고 물었다.
“엄세번이 널 찾아 뭐라 하더냐?”
“별것 아닙니다.”
육역의 마음은 불타는 듯 초조해졌다.
“아버님께서 제 방의 물건을 가져가셨습니까?”
육병은 그를 잠시 바라 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진술서들을 살펴보려 한다.”
육역은 훅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이내 급히 말했다.
“제게 우선 돌려주십시오. 급히 쓸 곳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용도인데, 이런 진술서가 필요하더냐?”
육병이 물었다.
“…….”
육역은 그에게 실제 사정을 말할 수는 없었다.
“여하튼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진술서를 제게 주십시오.”
육병이 고개를 저었다.
“이 진술서는 엄가를 무너뜨리는 유력한 증거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장 가장 중요한 일이지. 넌 그걸 갖고 가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다.”
“아버님!”
육역은 조급해졌다.
“인명이 달린 중대한 일입니다. 더 지체하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빨리 진술서를 제게 주십시오.”
육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엄세번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아버님! 아들이 간청 드립니다!”
육역은 자신이 어째야 좋을지 몰랐다. 쿵 소리가 난 후, 그는 육병에게 무릎을 꿇었다.
어릴 때부터 다 큰 지금까지, 육병은 지금껏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일이 있던 그가 육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낭자 때문이더냐? 엄세번이 그 낭자로 널 위협하더냐?”
육역은 반박할 수 없었다.
“……네가 언제부터 이리 애정놀음에 지나치게 빠졌더란 말이냐.”
육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그렇다고 하나, 본연의 일을 그르쳐서는 안 돼.”
눈을 꾹 감고 있던 육역이 즉시 초조한 눈빛으로 육병을 바라봤다.
“아버님, 하실 말씀은 제가 돌아온 후 다시 하십시오. 지금은 먼저 진술서를 제게 주시겠습니까?”
“안 돼!”
육병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버님, 더 지체되면, 그녀는 정말 죽을 겁니다. 엄세번 그자가 이미 그녀를 형구에 못 박았습니다. 시간을 끌게 되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녀는 죽습니다!”
육역은 너무도 급하여 눈에서 피가 솟구칠 듯했다.
아들은 평소 침착한 성격이다. 여자 하나 때문에 오늘 뜻밖에도 이리 추태를 부릴 거라고는 육병이 결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육병은 미간을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엄세번은 경성에 몇 군데의 근거지가 있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즉시 사람을 보내 수색하면 될 일이야. 그러나 넌 이 진술서를 절대 가지고 갈 수 없다. 내가 방금 소식을 받았는데, 네가 심문했던 범인들이 전부 기이하게 죽었다고 한다. 진술서는 단지 이것뿐이고, 매우 귀중해. 절대 잃을 수는 없어.”
“저는 당장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녀를 구하는 게 중요합니다. 엄세번을 쓰러뜨리는 것은 차후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육역의 말에 육병은 분노했다.
“온통 헛소리뿐이구나! 지금 당장이 바로 그 가장 좋은 기회야. 일단 놓치면, 엄당은 반격을 해 올 거고, 아마 너와 내가 설 곳조차도 없어지겠지. 그리고 넌 네가 진술서를 넘겨주면, 엄세번이 사람을 풀어줄 것이라 생각했더냐? 그의 사람됨으로는 네 수중에서 그의 약점이 사라졌다면, 그땐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얌전히 할 수밖에 없어.”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육역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확실히 이 점에 소홀했다. 아니면, 그 스스로 일부러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진술서를 넘기면, 금하에게는 살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내가 수색을 위한 인원을 조치해 두었다. 너는 가짜 진술서를 갖고 엄세번에게 가거라.”
육병이 말했다.
“우린 두 가지 일을 동시 진행하는 것이야. 그 아가씨의 복과 명이 길기를 기대해야지.”
육역은 별 도리가 없이 가짜 진술서 한 부만을 가지고 다시 형부의 감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진술서는 여기 있어. 하지만 당신이 먼저 그녀의 행방을 얘기해야 줄 수 있다.”
육역은 차갑게 엄세번을 바라봤다.
엄세번은 태사의에 비스듬히 앉아 육역이 들고 있는 서류를 흘끔 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가짜잖아?”
“진짜다.”
육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가 보게 던져라.”
엄세번이 말했다.
“네가 먼저 그녀의 행방을 말해야 한다.”
육역은 되풀이해 말했다.
고개를 든 엄세번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듯했다.
“이미 많이 늦었을 텐데. 몸 안에 대못 여섯 개를 찔러 넣어 피가 천천히 밖으로 흐르면, 얼마나 걸려야 사람이 죽게 되는지……. 자넨 아나? 내가 해 봤는데 말야. 사람은 피가 전부 흘러나올 필요도 없이 죽게 돼. 이틀밖에 못 버티더라고. 내 예상으론 말이야. 어린 아가씨의 작은 몸으로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게야.”
육역은 태연자약한 그의 말을 듣고 있지만 거의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일말의 동요도 없는 표정으로 매우 침착한 척을 해야만 했다.
“네가 먼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 그때 진술서를 줘도 늦지 않지.”
엄세번이 입술을 휘며 웃었다.
“내가 한 마디 하자면 말이야. 넌 이 상황에서 어떻게 진술서를 내게 줄 수가 있지?”
“내가 하겠다고 한 이상, 당연히 할 수 있다.”
육역이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뜬 엄세번은 탐문하는 듯 그를 바라봤다. 한참 후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이번엔 널 믿겠어. 아가씨는……, 심가에 있다.”
“어느 심가이냐.”
“진술서를 내놔.”
엄세번은 홀가분하게 한차례 웃었다.
잠시 망설이던 육역이 들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넘기고 반복하여 물었다.
“어느 심가냐고 물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맞혀야지. 시간이 이르지 않아. 넌 잘 알아맞혀야 할 거다.”
엄세번은 매우 흡족하게 웃었다.
심가?
이리 큰 경성 안에 심 씨 성을 가진 이의 집만 해도 백 호 이상이었다. 이자는 금하를 대체 어디에 숨긴 것인가.
육역은 남진무사로 급히 돌아왔다. 육병은 이미 수색령을 내렸으나, 아직 단서를 잡지 못했다.
“심가?”
이야기를 전해 받은 육병 또한 미간을 찌푸렸다. 펼쳐놓은 지도 위에는 경성에 있는 엄가의 가업 수십 곳이 전부 표기가 되었다. 하지만 심가와 관련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이때 소식을 알아보러 나갔던 이가 돌아와 보고했다.
“어제 원금하와 늙은 거지가 함께 있던 걸 본 이가 있답니다. 성 밖에 있었고, 또 성안 관우 사당 근처에도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늙은 거지? 설마 개숙인가!
그럼 심 부인은? 그녀는 줄곧 개숙과 함께 있었을 텐데?
심 부인, 심 부인……. 육역은 퍼뜩 생각이 떠올랐다.
엄세번이 말한 심가는 설마 심련의 집이야?
“아버님, 심련의 집이 어디입니까?”
육병이 생각을 하며 손끝으로 지도 위를 따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끝은 전자항이라는 거리에 멎었다. 육역이 확인하니, 그 거리는 바로 관우 사당 부근이었다.
그가 탁자를 무겁게 내리쳤다.
“여깁니다. 심 가는 바로 심련의 집이었습니다!”
육역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바로 뛰어나갔다.
육병은 사라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육역 홀로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불러서 그 뒤를 따랐다.
* * *
심련의 옛집.
얼룩덜룩 칠이 벗겨진 두꺼운 문은 동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하지만 고작 자물쇠 따위가 육역을 막을 수는 없어 그가 두 번의 주먹을 날리니, 문짝은 펑 소리가 나며 넘어갔다. 이 커다란 소란 속에서 안쪽에서는 놀란 시녀들이 여기저기서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렸다.
육역의 속은 조바심으로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금의위 제패를 꺼내어 큰소리로 외쳤다.
“관부의 사건 조사다. 안에 있는 사람은 전부 나와!”
하지만 감히 나서는 이 하나 없었고, 슬그머니 상황을 살피는 이뿐이었다.
기어이 큰 걸음으로 걸어 본채로 들어간 육역이 미처 피하지 못한 시녀를 붙들고 물었다.
“엄세번이 사람을 잡아 왔지, 어디 있어, 말해!”
그가 잡은 팔 힘이 너무 강했다. 시녀는 매우 아파하면서도 아래쪽을 가리키며 달달 떨었다.
“아, 아래 있어요. 병풍 뒤의 계단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이때 수십 명의 금의위를 거느린 육병도 도착했다. 그때껏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던 흑의인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슬그머니 도망을 쳤다.
육역은 먼저 계단 아래로 빠르게 내려갔다. 방 안쪽에서 손발이 묶인 심 부인이 발견하고는 급히 다가가 밧줄부터 풀려고 했다.
“제호향을 조심해요.”
심 부인이 육역에게 소리쳤다.
“빨리! 우선 본채 안의 저 백화 화분을 밖으로 옮기고, 녹색 옷 입은 측근 시녀를 찾아 해독약을 구해야 해요.”
심 부인은 매우 긴장한 표정이었다.
육역은 그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일단 그녀의 말을 따랐다. 빠르게 위로 올라가 탁자 위에 놓인 백화 화분을 직접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런 후 제압된 녹색 옷의 시녀에게 해독약을 요구했다.
“제호향의 해독약을 내 놓아라.”
이리도 금의위가 많은 것을 본 시녀는 진즉에 놀라 얼이 빠졌다.
“여, 여기…….”
그녀는 얌전히 해독약을 꺼내놓았다.
육역은 그렇게 받은 작은 자기병을 들고 심부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육역에게 먼저 병 안의 향을 맡게 한 후에야 한숨을 돌렸다.
육역이 심 부인의 밧줄을 풀며 동시에 물었다.
“금하는요?”
“그 아인 위에 갇혔어요. 내가 안내할게요.”
심 부인은 감각이 무뎌진 다리를 돌아볼 틈도 없었다. 육역을 데리고 개숙과 금하가 먼저 끌려와 갇혔던 방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을 지키던 사람은 전부 도망가고, 방 안에는 만신창이가 된 개숙만 남았을 뿐이었다.
“금하는요? 그녀는 어디 있습니까?”
금하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육역의 심장으로 왈칵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그때, 개숙이 기력 없는 목소리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엄세번이 그 아일 데리고 갔어.”
금하를 데리고 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