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지금 가요!
눈짓을 주고받은 금하와 개숙은 재빨리 본채로 몸을 날려 뛰어들었다.
마찬가지로 집 안에도 사람은 없었다. 실내는 무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향기로 가득 찼을 뿐이었다.
금하와 개숙은 옥으로 만든 병풍 뒤로 돌아갔다. 과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금하는 함정이라도 있을까 두려워 아래로 향한 걸음마다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설치된 덫을 밟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선 신중을 기하여 확인하고서야 하나씩 밟아 내려갔다. 그녀의 뒤에 있는 개숙은 매우 초조했지만, 그도 마땅히 따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렇게 지하에 있는 방에 도착했고, 그때까지 다른 이상은 없었다. 말 그대로 너무도 순조로워 오히려 금하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기분이 이상해. 내가 뭘 놓친 거지?
하지만 오래 생각할 틈은 없었다.
“이모!”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상에 쓰러져 있는 심 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심 부인을 보고 달려간 개숙도 그녀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했다.
“괜찮아. 이상은 없어.”
그제야 조금 마음을 놓았지만, 금하는 이 공간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 기괴함 속에 더는 머무를 수 없었다.
“아저씨, 우리 빨리 가요! 우선 모시고 나가서 그때 얘기하죠.”
개숙은 고개를 끄덕이고, 심 부인을 안았다. 그렇게 원래 들어왔던 길로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계단의 반도 올라가지 않아 개숙은 돌연 눈앞이 빙빙 돌았다. 쓰러질 뻔한 그가 심 부인을 떨어뜨릴까 두려워 그녀를 품안에 와락 끌어안았다.
“아저씨…….”
뒤에 따라오던 금하도 어지러움이 마치 파도처럼 한차례씩 밀려들었다.
실내를 채웠던 담담한 향기는 마치 과실주 같아 처음 맡았을 때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맡으면 맡을수록 사람을 취하게 했다.
향에 독이 있었어!
이미 금하의 발은 말을 듣지 않았다. 낮디 낮은 높이의 계단 한 칸을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올라야 했다.
“아저씨……, 조심하세요!”
금하는 온힘을 다해 외쳤다.
개숙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내력이 아무리 심후해도, 그는 심 부인까지 안고 있기에 몸은 갈수록 느려졌다. 그러나 비틀거리면서도 온힘을 다해 위로 몇 걸음을 기어올랐다.
이때, 몇 사람의 모습이 계단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빛을 등지고 있었다. 금하는 그들이 검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가까스로 알아봤을 뿐 어떤 모습인지도 모른 채 바로 한쪽으로 곤두박질쳤다.
제기랄!
개숙도 정신이 몽롱하여 당장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심 부인을 품에 안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을 잃을 수 없었다.
개숙은 심 부인을 안은 손을 가운데로 모았다. 동시에 그녀의 왼쪽 어깨로 자신의 다쳤던 왼쪽 가슴을 거듭해서 짓눌렀다. 채 아물지 않았던 상처가 다시 터진 순간, 그는 거대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계단 입구에 서 있는 이들은 길에서 그와 싸웠던 바로 그 흑의인들이었다.
“기어이……, 너희였어.”
개숙의 상처에서 솟구친 피가 심 부인의 어깨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녀를 바짝 끌어안은 개숙은 뿌리라도 박은 듯 우뚝 서 있었다.
* * *
엄세번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표정은 다소 침울했다. 문을 나서던 그때처럼 가볍지 않았다.
“공자께서 떠나신 후, 누군가 저택에 잠입해 그 부인을 구해 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호향에 중독되었고, 지금은 이미 잡아두었습니다.”
시녀가 다가와 보고했다.
“임릉은?”
“그분은 무사합니다. 공자의 방에서 쉬고 계십니다.”
이제야 엄세번은 다소 마음을 놓았다. 자신의 방으로 가는 김에 사람을 불러 복도로 제호향을 옮겼다.
심 부인은 여전히 단정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요 밖으로 드러난 설백의 작은 발을 보고서야 엄세번은 기분이 다소 좋아질 수 있었다.
엄세번은 그녀의 가까이 다가앉아 품에서 작은 도기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 그녀의 코끝에 가져다 대자, 심 부인이 아득하게 멍멍함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엄세번을 본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녀는 의가 출신이었고, 당연히 자신이 무엇에 취해 쓰러졌는지 알고 있었다.
“제호향을 쓰다니!”
심 부인은 미간을 찡그리며 발을 움츠렸다. 그녀는 엄세번에게서 멀어지려고 온몸의 힘을 다했다.
그 앞에서 엄세번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녀의 두 발이 치마 안으로 쑥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장이라도 발을 끌어당기고픈 욕망을 겨우 참았다.
“내가 이렇게 잠깐 떠나있었을 뿐인데도 널 빼앗으러 온 이가 있더군.”
엄세번이 한숨을 내쉬었다.
“널 여기에 두는 것도 정말로 불안해 못 견디겠어.”
심 부인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누구야? 누가 왔어?”
“넌 누구일 것 같으냐?”
엄세번은 대답 없이 오히려 반문했다.
심 부인이 우선 떠올린 것은 개숙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는 경성에 와서 분명 도와달라고 금하를 찾아갔을 거라고, 어쩌면 금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와중 피로 물든 자신의 어깨가 설핏 보였다. 급히 더듬었지만, 자신의 상처가 아니었다. 그럼 이 피는…….
“그 사람은 어디 있어?”
심 부인이 불안함을 숨긴 어조로 엄세번에게 물었다.
엄세번의 얼굴에는 환한 화색이 돌았다.
“보고 싶은가?”
“……그래.”
“좋아. 데려가 주지.”
엄세번은 뜻밖에도 심 부인의 말을 받아들여 그녀의 몸을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심 부인은 그의 손을 피해서 알아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신발을 신으려 해도 신발과 버선은 아예 이곳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섰다.
검은색의 옥석이 깔린 바닥은 촛불의 빛이 차갑게 반사되었다. 맨발에 닿는 감촉은 서늘하고 단단해 사람을 깊은 속까지 불쾌하게 했다.
그런데 엄세번은 여리고 하얀 발이 차갑고 견고한 검은 돌을 디딘 것을 보았을 뿐인데도, 깃털 하나가 자신의 심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편안하고 간질거리는 감각은 흐뭇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심 부인은 엄세번을 따라 개숙과 금하를 가둔 방에 도착했다.
가까스로 개숙을 알아본 그녀는 다른 건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를 향해 달려갔다.
개숙과 헤어진 지 이미 수일이 지났다. 그는 부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마르고 초췌해져 보는 것만으로도 심 부인의 마음을 견딜 수 없게 했다.
금하 역시 한쪽에 묶여 있었다. 고개를 축 늘어뜨린 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듯했다.
“금하야, 금하야…….”
심 부인이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그 소리에 금하가 반응했다. 마치 심 부인의 아픈 목소리를 들은 듯 그녀는 힘겹게나마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몇 번이나 힘을 써 봐도 눈은 뜰 수 없었다.
“오호, 이런 눈물겨운 장면이 있나.”
엄세번은 잡힌 이들에게 흥미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금하를 보고는 조금의 흥취가 생겨 도자기 병을 꺼내 그녀의 코끝에 놓아 냄새를 맡게 했다.
해독약이 머릿속의 흐릿함을 점차 몰아내어 금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심 부인이 보이자, 그녀는 작은 소리로 불러 보았다.
“이모, 괜찮으세요?”
“괜찮아.”
심 부인이 그녀의 몸을 더듬었으나, 다행히 그녀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다. 그러나 피로 흠뻑 젖은 개숙의 몸에는 적어도 7, 8군데 상처가 있었고 제대로 처리를 못해 어떤 상처에서는 아직도 피가 줄줄 흘렀다. 심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그의 상처를 싸서 묶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던 엄세번은 점점 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 금하가 무심코 부른 ‘이모’ 라는 호칭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네 엄마가 임하林荷이냐?”
그는 금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순간 멈칫한 금하가 즉시 그의 말에 반박했다.
“어떤 임하? 전혀 모르겠는데?”
그녀의 반박에 엄세번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넌 포쾌이니, 당연히 범인도 심문해 보았겠지? 오늘은 내가 네게 한 수 가르쳐 주지. 만약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묻는 말에는 응당 ‘임하가 누구야?’가 되어야지, 단호히 모른다고 부정할 게 아니라.”
엄세번이란 사람이 대단히 총명하다는 소리는 이미 들어 왔다. 귀재라 불리기도 했다 하니, 그를 속이려는 것은 확실히 쉽지는 않을 것이다. 금하는 속으로 슬쩍 긴장했으나, 얼굴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은 척했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하죠. 어떻게 다 같은 말을 합니까.”
심 부인은 엄세번이 금하의 진짜 신분을 알아냈을까 염려가 되어, 그 사이로 재빨리 끼어들었다.
“헛소리 하지 마요. 얜 내가 거둔 수양 질녀예요.”
그러나 엄세번은 심 부인의 말을 거의 듣지 않는 듯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탐구라도 하는 듯 금하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자신의 손으로 금하의 눈 아래쪽과 이마를 덮었다. 눈썹과 눈만 보이게 하고서는 즐거운 듯 웃었다.
“봐. 하언의 두 눈을 쏙 빼닮았잖아. 이건 내가 진작 알아차렸어야 했었군.”
“헛소리 하고 있네!”
금하는 이미 마음먹었다. 그가 어떤 수를 써서 말을 유도하든 자신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그가 저를 어찌할 수 있는지 볼 거라고.
엄세번은 갑자기 흥이 크게 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금하를 웃으며 바라봤다.
“이건 말하자면, 나도 네 원수가 된 셈이야. 하지만 넌 알고 있을까? 그때 구경에게 탄핵의 상소를 쓰게 압박한 사람은 결코 내가 아니라 육병이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금하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또한, 심 부인의 안색을 살피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아 엄세번은 자신의 생각만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너희는 진작 알고 있던 거로군. 이렇다면…….”
그가 금하의 턱을 가벼이 잡아 올렸다.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봤다.
“육역이 널 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네가 집안의 원한 때문에 그를 멀리한 거였어.”
양절에 있을 때, 육역이 금하와 사람들을 먼저 경성으로 돌려보낸 사실은 엄세번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육역이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 왕래를 하지 않았다.
엄세번에게는 처첩이 무수히 많았다. 그는 여인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참을성이 있던 적이 없었으니, 정은 말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는 육역이 분명 금하에게 싫증이 났을 거라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원인이 있었을 줄이야.
금하가 냉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헛소릴 하는 거야?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냐?”
엄세번이 피식 웃었다.
“상관없다. 네가 인정 안 해도, 내가 그자에게 가서 물어보면 돼.”
이때 문밖에서 누군가 급한 소식을 전해왔다.
“공자, 어르신께서 최대한 빨리 돌아오시랍니다!”
“무슨 일이야?”
엄세번이 짜증을 내며 물었다.
“남도행이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