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신하성에서 일행과 헤어진 후, 개숙과 심 부인은 처음에는 왜란을 피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했다. 둘은 이틀을 꼬박 움직였고, 숙박을 위해 들어간 객잔에 방 두 개를 요청했다. 그런데 배정받고 보니, 두 방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때 위험했다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개숙은 후회로 가슴을 치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다음 날 개숙이 일어나 심 부인의 방으로 갔을 때, 그곳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객잔의 뒤편에서 마차 바큇자국을 발견한 그는 그 길로 심 부인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중 6명의 흑의인이 그를 막아섰다. 그들은 무공의 고수에 다수였으니, 안타깝게도 개숙은 부상을 입고 물러서야 했다.
그 후에도 개숙은 몇 번이나 그들을 급습해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넘겼으며, 그 뒤로는 은밀히 쫓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성에 거의 도착하여 마차는 흔적이 사라졌다.
“아저씨, 상처는 괜찮으세요?”
개숙의 무공을 고려하면 상대가 고수에 다수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를 상처 입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걱정하는 금하에게 개숙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네 이모 찾는 게 중요해!”
금하는 잠시 음하며 목울림 소리만 낼뿐 말이 없었다.
매일 밖에서 경성 안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얼마나 많던가. 사라진 마차를 찾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아저씨, 우리 먼저 성 밖으로 가 봐요.”
두 사람은 성에서 4, 5리 먼 곳의 작은 길까지 가서야 어떤 마차의 비교적 선명함이 남은 바큇자국을 찾았다.
“내 기억으론 바로 이거야.”
개숙이 바큇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금하는 쭈그리고 앉아 손으로 바퀴 자국을 재기 시작했다.
“바퀴 너비가 4촌에 가깝고, 두 바퀴 사이가 5척에 가까워요. 이건 큰 마차인데,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큰 마차를 쓰지 않아요.”
“경성 안에 이렇게 큰 마차가 많아?”
개숙이 물었다.
“많지는 않아요.”
금하는 바퀴 자국을 따라 앞으로 조금씩 살펴 나갔다. 어떤 미세한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았다.
많은 편이 아니라 하면, 아마도 한 집 한 집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숙은 위안하고 있었지만, 왼쪽 손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덜덜 떨고 있었다. 아마도 가슴의 부상 때문일 터. 그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꽉 쥐었다.
이때, 바퀴 자국 옆에 묻은 기름 흔적이 금하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기름이 묻은 먼지를 손끝에 묻혔다. 코에 대고 슬쩍 냄새를 맡더니, 곧바로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아저씨 냄새 맡아 보세요. 이게 뭘까요?”
그녀는 상당히 기뻐했다.
개숙이 다가와 냄새를 맡고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뭐니?”
“이모가 늘 쓰시는 머릿기름이에요. 어떻게 이 냄새도 못 맞히세요.”
금하는 내내 고개를 저었다.
심 부인은 약학에 정통했다. 머릿기름도 자신이 배합한 것으로 향이 보통 시중에서 파는 것과 달라 맡으면 바로 알았다.
금하의 말에 개숙은 다시 향을 맡으며 애써 떠올려 보려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는 이런 쪽과는 담쌓은 상남자였을 뿐, 언제 여인이 쓰는 화장품 같은 것에 신경이나 썼던가. 당연히 맡아도 몰랐다.
“그런데 네 이모 머릿기름이 어째 여기에 있냐?”
개숙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금하는 말없이 바퀴 자국을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앞쪽 갈림길까지 가자, 또 기름 흔적을 찾았다.
“이거 보세요. 분명 이모가 일부러 남긴 흔적이에요.”
두 사람은 머릿기름의 흔적을 따라 다시 성으로 들어왔다. 그 기름의 흔적은 이리저리 길을 몇 번이나 꺾고 모퉁이를 돌아 성 서쪽의 으슥한 저택에 이르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니가 안에 있을까?”
개숙이 이곳이 누구의 저택인가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문 위에는 편액이 없었다.
그러나 경성에 오래 산데다 포쾌인 금하는 이 집이 누구의 소유인지 알고 있었다.
“여긴 금의위 경력 심련이 예전 살던 집이에요. 그가 유배된 후부터 이 집은 줄곧 비어 있었어요.”
금하의 가슴이 점점 아래로 내려앉았다. 심 부인이 심가의 집으로 납치당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심 부인의 진짜 신분을 잘 알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육역이 심 부인의 사정을 알고 있으나, 그는 절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그럼 설마…….
* * *
방 네 귀퉁이마다 얼음덩이가 든 커다란 유리 접시가 놓였다.
낮은 침상에 기댄 엄세번은 희고 매끈한 손에 부채를 쥐고 산들산들 부채질을 하며 동시에 극도로 집중하여 눈앞의 조그마한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 내밀어 어루만져보고 싶었으나, 또 그렇게는 차마 하지 못하고, 겨우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복사뼈를 스쳤을 뿐이었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선에 부드럽고 매끈한 피부는 손가락 끝에서 전부 녹아드는 듯하여 엄세번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탄식의 신음을 참지 못했다.
“하아. 십 년을 못 보았는데, 네 발은 여전히 그때와 같아.”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작은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넌 아느냐. 그날 네가 물에 뛰어들고부터 나는 꼬박 십 년을 그리워하고, 그 십년을 꼬박 찾았건만, 너와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어.”
그 작고 아름다운 발의 주인은 바로 심 부인이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의자에 앉은 그녀는 손발이 단단히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옷은 바르게 입고 있으나, 신발과 버선만 벗겨져 있었다.
엄세번은 그 발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또 몇 차례나 다시 또 보았다. 그러고 나서도 못내 아쉬운 시선이 가까스로 심 부인의 얼굴로 향했다.
“임릉, 이 몇 년을 넌 계속 양주에 숨어있던 거구나. 나도 양주를 몇 번을 갔었는데, 안타깝게도 널 만나지 못했어.”
그가 탄식을 내뱉었다.
“만약 네가 이번에 육역과 엮이지 않았다면,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몰랐을 게야. 말하자면 말야. 내가 정말 육역에게 감사해야 마땅하군.”
심 부인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음을 정한 그녀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를 바라보던 엄세번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오른손을 뻗었다. 심 부인은 그가 얼굴을 만지려 한다고 여겼고, 혐오스러움에 온힘을 다해 피했으나, 그는 그녀를 만지지 않았다. 대신 엄세번은 그녀의 눈앞에서 옷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을 뿐이었다.
“이걸 봐.”
그의 팔꿈치 부근에 뚜렷한 상흔이 있었다. 이제 막 딱지가 앉은 상처의 주변은 붉은 기마저 남아 있었다.
“이건 그때 네게 물린 것이지. 내가 계속 남겨두었어.”
그가 말했다.
“매번 나으려 할 때마다, 나는 칼로 다시 그었어. 그래서 줄곧 네게 방금 물린 모양처럼 유지해 왔지.”
애정이 듬뿍 담긴 그의 말에 심 부인은 오히려 소름이 돋고, 전신의 솜털까지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 기억한단다. 네가 배에 올랐을 때, 연한 녹색의 치마저고리를 입었지. 그 색은 네 발을 유달리 곱고 부드럽게 돋보이게 했거든.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아주 적당해서 참으로 보는 것마저 아까워 견딜 수 없었단다.”
말하는 도중에도 엄세번의 시선은 다시 그녀의 발로 옮겨갔다. 아이처럼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감정이 온몸으로 흘러넘쳤다.
이때 밖에서 누군가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 어르신께서 급한 일로 오라 하십니다.”
엄세번의 미간이 순간 일그러졌다.
“무슨 일?”
“궁 안의 저 남도행이라 하는 도사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그의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다며 어르신은 공자께서 얼른 오셔서 상의하고자 하십니다.”
남도행이 버티지 못할 것 같다고?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선 엄세번이 좌우 시녀들에게 분부했다.
“잘 보살펴 주어라. 살이 찌게 해선 안 되고, 그렇다고 마르게 해서도 안 돼. 어딘가 다치게 하는 건 더욱 안 돼.”
그는 힘겹게 두 걸음 정도 떼어 놓았다.
당장 가려는 가 했는데, 생각과 달리 그는 돌연 다시 돌아와 심 부인 앞에 반쯤 몸을 굽혔다. 그리고 그녀의 발을 손으로 감싸더니 다른 건 모두 잊은 듯 푹 빠져서 세심히 어루만졌다.
그렇게 한참을 실컷 어루만지고서도 엄세번은 아쉬움이 가득한 모습으로 자리를 떴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고서야 심 부인의 팽팽하게 긴장했던 등도 일시에 힘이 풀렸다. 그녀의 손과 이마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 * *
심 부인을 지키는 이들이 모두 고수인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심 부인이 심부에 갇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짐작하면서도, 금하는 경솔하게 쳐들어갈 수가 없었다.
밤이 오기만을 기다려 야행복으로 갈아입고 복면을 쓰고서야, 그녀는 개숙과 조용히 담장을 넘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다 폐가로 보여서 누구라도 이 안이 이리도 화려하고 사치스러울 줄은 생각 못 할 터였다. 그리 크지 않은 정원에는 강남의 작은 다리와 물 흐르는 풍경을 본 따 만들어 두었고, 나무다리의 칠에는 아마도 진주분을 섞었는지, 달빛이 비치는 다리는 전체가 부드러운 빛이 떠다니듯 둘러싸고 있었다.
밤이 되었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아 시녀 둘이 복도 끝에 앉아 물에 발을 담그며 놀고 있었다. 희고 깨끗한 두 발로 연못 속의 작은 물고기를 희롱하며 놀았다.
금하는 인공으로 만든 언덕 뒤에 숨어 뛰어나갈 기회를 엿봤다. 그리고 적당한 기회가 오자, 개숙과 나누어 여자들을 제압했다.
“말해. 심 부인이 어디 있지?”
그녀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으나, 놀란 시녀들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심 부인이 누군지 몰라요.”
“스물 일고, 여덟 살 정도의 여인이 갇혀 있지 않아?”
금하는 비수를 그녀의 목덜미에 바짝 붙인 채 바로 이어 물었다.
여자는 감히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입만 뻥긋거렸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공자께서 임릉이라 불렀어요.”
임릉은 바로 심 부인의 이름이었다.
금하가 급히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지?”
“그분, 그분은 공자의 방에 있어요.”
시녀의 말에 개숙은 일시에 온몸의 피가 머리 꼭대기로 치솟는 것 같았다. 돌연 시녀를 누르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 여자의 목을 비틀어 끊어 버릴 것 같았다.
“아저씨.”
금하는 개숙에게 기다려 보라 눈짓하고는 이어서 물었다.
“너희 공자의 방이 어디야?”
시녀가 손을 내밀어 본채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래? 땅 아래?”
어리둥절해진 금하가 비수를 더욱 바짝 댔다.
“나랑 장난해?”
“정말이에요. 공자는 시원한 걸 몹시 좋아하세요. 그래서 방을 거기에 만들었어요. 본채의 병풍 뒤로 내려갈 수 있어요.”
놀란 시녀가 황급히 사실을 털어놨다.
시녀의 모습으로 보아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금하는 개숙과 시선을 마주하고 눈짓을 했다.
순간 개숙은 바람처럼 손을 뻗어 여자 둘을 단숨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바로 본채 쪽으로 가려는데, 금하가 그를 붙잡았다. 우선은 어두운 나무 그늘로 몸을 숨기자고 손짓을 해보였다.
본채 쪽으로 가는 길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해 금하의 마음은 점점 더 두려워졌다. 무언가 이상한 것 같은데, 또 어디가 이상한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다.
금하는 엄세번의 배를 떠올렸다. 그곳 역시 곳곳에 기이함이 가득했었고, 사람을 은근히 두렵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