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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206)화 (206/224)

206화

다수의 관원이 엄세번을 모시고 자리에 앉았다. 잔을 들 무렵, 형부우시랑 언무경이 엄세번의 눈치를 보며 운을 띄웠다.

“엄 공자, 제가 먼저 공자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공자의 이번 사건은 성상께서 삼법사에 공동 심리를 하라 보내셨지요. 우리가 여러 번 의논한 심의 결과는……, 순은 삼천 냥입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엄세번은 딴청을 하며 귀를 후볐다.

“얼마?”

그의 표정을 살피던 언무경이 넌지시 떠보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이천 냥?”

“뭐라고?”

엄세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마, 많습니까? 그……, 그럼 일천 냥? 아시다시피 성상께서 엄중히 심문하라 명령을 내리셨죠. 우리도 보고는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엄세번이 마지못해 말했다

“난 천 위로는 안 되오. 이렇게 합시다. 순은 팔백 냥.”

“팔백 냥?”

언무경이 난처한 표정으로 다른 관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지라, 어쩔 수 없이 그가 억지로 웃으며 말해야 했다.

“그럼 공자 말씀대로 순은 팔백 냥으로 하지요.”

작은 곁방 안, 금하는 들으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어 낮은 목소리로 양악에게 물었다.

“뭐가 팔백 냥이야?”

양악 또한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겠다는 뜻을 알렸다.

밖에서는 떠들썩한 술자리가 계속되고 있는데, 그때 돌연 누군가 다가와 고했다.

“육 첨사가 상서 대인을 뵙기를 청합니다.”

순간 금하는 정신이 멍해졌다.

육 첨사? 육역?

그가 경성으로 돌아왔어?!

“어느 육 첨사?”

구 상서가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사이, 누군가 즉시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전했다.

“그가 경성으로 돌아왔어?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이게…….”

당당한 형부의 좌시랑도 이때만큼은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엄세번은 무슨 좋은 말을 한다 해도 명색이 조정의 죄인이었고, 육선문에서 그에게 연회를 베푼 것을 육역이 본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다.

그때 엄세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보니 육 첨사가 경성으로 돌아왔군. 얼른 얼른 부릅시다!”

구 상서는 엄세번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워 육역을 들여보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곁방의 금하는 육역의 모습이 보이자, 울컥울컥 무언가 차올라 목이 메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를 단단히 주시하면서도, 그를 더 가까이, 더 자세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안타까웠다.

“여러 대인께서 모두 계셨군요. 제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미소를 머금은 육역이 앉아 있는 관원들에게 예를 표했다.

육역을 본 엄세번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사람을 불러 육역에게 의자와 식기를 가져다주라고 하고, 그와 양절의 풍토와 인심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고서야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오늘 구 상서는 중요한 일이 있어 찾아 왔나?”

“엄 공자가 경성으로 돌아오셨다는 얘길 들은 아버님께서 제게 문안을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제 형부의 감옥으로 갔다가 허탕을 칠 줄이야 생각도 못 했지요. 그제야 공자께서 구 대인 댁에 계신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육역은 더없이 한가로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기거하심이 불편하실까 염려가 되어 특별히 찾아뵈었는데, 육선문의 포쾌들까지 전부 공자의 살병풍이 되어 편의를 봐 드릴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제 걱정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육역의 말에 앉아 있던 관원들의 얼굴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엄세번이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호탕하게 웃었다.

“걱정이 지나쳐, 걱정이 과해……. 참, 자네가 아직 모르는 게 있는데 말이지. 방금 저들이 내게 말하더군. 삼법사가 공동심리해서 이미 내 죄명을 순은 팔백 냥 횡령으로 정했다고 말이지.”

이제야 금하는 조금 전 관원들과 엄세번의 가격 흥정이 무엇 때문인지 깨달았다. 순간 저도 모르게 냉소가 솟구쳤다.

엄세번은 공부시랑이라는 직위였는데, 매년 횡령하는 순은이 백만 냥뿐일까. 그런데 지금 최종적으로 겨우 순은 팔백 냥의 횡령으로 죄명이 확정되다니, 아마 들으면 거리의 아이들까지도 우스워 죽겠다고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 말에도 육역의 안색은 변함없이 평온했다. 앉아 있는 삼법사의 관원들을 천천히 눈빛으로 훑고는 잠시 후 담담히 웃었다.

“역시 제 걱정이 지나쳤습니다.”

이때 바람을 따라 은행잎 하나가 가벼이 날아들었다. 바로 육역의 앞자리에 떨어진 것을 그가 집어 자세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성하의 여름이건만, 어찌 이 잎은 이미 누렇게 변했을까요? 가을은 아직 멀었는데, 이리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은 분명 길조가 아닙니다. 듣자니, 여름 날씨에도 가을 날씨 같은 날이 있어 살을 에는 스산한 기운이 많다지요. 엄 공자께서는 부디 몸조심을 많이 하십시오.”

그의 이번 말은 말 속에 뼈가 있었다. 그가 가리키는 뜻이야 머리 좋은 엄세번이 어찌 알아듣지 못할까.

“자네와 나, 우리 둘 다 나무 아래 있다네. 살을 에는 스산한 기운이 있는 이상, 육 첨사도 몸조심을 많이 해야 할 걸세.”

엄세번이 웃음을 머금고 말하자, 육역은 미소로 응대했다. 이미 더 할 말은 없어 그는 바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그가 육선문을 나선 후, 엄세번의 얼굴에 흐르던 웃음은 점점 냉소로 변하여 풍기는 한기는 사람을 오싹하게 했다.

* * *

3일 후.

삼법사는 안건을 최종적으로 심의하여, 공부시랑 엄세번에 대해 권리를 독점하고 직무를 농단하여 순은 팔백 냥을 횡령하였으니, 뇌주로 유배시킬 것을 판결하였다.

성상은 또한 이번 처벌이 과중하다는 생각으로 만약 다시 추응룡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면 즉시 참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황이 이러하니, 표면상으로 엄가는 타격이 심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상의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엄가를 무너뜨릴 길을 틀어막은 것이었고, 더는 엄가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쪽에서는 엄가의 반격을 손 놓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엄세번은 아예 뇌주로 가지도 않았다. 내내 산수를 즐기며 놀다가 도리어 강서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과 건물을 화려하게 지어 금의환향한 듯 즐겼다.

경성으로 돌아온 이래, 금하는 계속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눈앞에서 엄가가 이리도 횡포하고 기고만장한 것을 보니, 문득문득 암담한 생각이 밀려 왔다. 그녀는 순찰할 때도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뿐 아니라, 사건 조사할 때도 종종 넋을 놓았다.

양정만은 금하의 시름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책망치 않고 양악에게 금하 대신 일을 더 분담하라고 했을 뿐이었다.

오늘 저녁은 금하와 양악이 야간 순찰을 돌아야 할 순번이었다. 그녀는 양악의 뒤를 천천히 따라 거리를 걷다가, 어느 새 금수교 부근에 도착했다.

등불이 휘황하게 켜질 무렵은 금수교가 가장 떠들썩하니 북적일 시간이다. 양쪽 기슭의 주루에는 화려한 등롱이 높이 걸렸다.

“너희 어머니 이젠 두간 매대 가지고 여기로는 안 오신다며?”

양악의 무심한 듯한 물음에 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리 옮기셨어. 동복가에 책 구연해주는 다관이 있어. 그 안에 있는 게 여기보다 장사가 잘돼. 게다가 바람 불거나 비 맞을 일도 없어서 나와 아버지도 한시름 놓았어.”

거리는 수많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그때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은 금하의 눈앞에 정말 공교롭게도 점쟁이의 모습이 스쳤다. 황금빛 동제의 방울을 들고, 머리에는 표표건을 쓴 그는 때마침 길을 따라가며 사람들의 점을 봐주고 있었다.

순간 금하는 넋이 나갔다. 저도 모르게 떠올린 건, 처음 육역을 만났던 그 밤. 그때의 그는…….

금하는 코를 훌쩍거렸다. 짧고도 짧은 불과 몇 개월일 뿐인데, 그때와는 이미 많은 것이 변했다.

“내 얘기 좀 들어 봐, 금하 도련님아.”

양악이 노점 매대와 부딪치는 것을 막기 위해 금하를 끌어당겼다.

“나는 네가 도둑 잡기를 기대하진 않아. 그래도 길은 좀 잘 걸어 다니자. 너 보다 보면, 누가 너한테 도둑질이나 안 해가도 다행이겠어.”

그에게 끌려 비틀거리던 금하가 다시 시선을 들었을 때, 시야에 돌연 익숙한 모습이 스쳤다. 고개를 홱 돌린 그녀는 그대로 우뚝 굳었다.

육역이 맞은편 기슭의 다리 입구에 서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는 강물이 가로 놓이고, 북적이는 인파가 가로막았다. 또한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선대의 원한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모든 것 너머에 서 있는 그를 금하 역시 바라보는 중이다. 마음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괴롭고 슬펐지만, 그의 마음 또한 지독하게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금하는 자신은 매우 잘 있다고, 그러니 마음 놓으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를 향해 온힘을 다해 웃어 보이고, 울음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입술을 짓깨물었다.

육역도 마음의 고통을 지그시 억누른 채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 세상 누구보다 그녀에게 따뜻하던 그 웃음 그대로.

강물은 여전히 흐르고, 인파 또한 그들의 앞을 가리며 북적거렸다. 그러나 같은 곳에 함께 하진 못해도 두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하나가 되었다.

* * *

궁궐의 담 안, 남도행은 백록을 돌보는 일 외에 성상에게 늘 불려가 도학에 대한 담론을 나눴다. 그는 성상의 총애를 받아 서원에 들어가 성상에게 점을 쳐 주게 되었고, 남蓝 신선으로 존경받았다.

육역이 잘 알고 있는 건 엄숭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조정의 아무리 많은 이를 구슬린다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오로지 엄숭에 대한 성상의 신임을 천천히 잃게 해야만 진정으로 엄가의 뿌리까지 뽑을 수 있었다.

성상은 태감을 믿지 않고, 대신을 믿지 않고, 오로지 도사만 믿었다. 남도행이 궁중에서 성상의 총애를 얻는 것이 바로 가장 좋은 선택이었으나, 이일은 단시간에 이룰 수는 없었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단계를 밟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육역은 사람을 보내 엄숭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엄숭이 궁에 들어가려 한다는 걸 알게 된 후, 남도행에게 비밀리에 알렸다.

그예 남도행은 즉시 점을 쳐 신선의 말을 빙자하여 성상에게 아뢨다.

“오늘 간신의 주사(*황제에게 알리는 일.)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은 신선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는데, 반나절이 지나 엄숭이 진짜로 알현을 하러 온 게 아닌가. 성상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알게 모르게 엄숭에 대한 간신의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이런 육역의 생각을 남도행은 꿰뚫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방법이 좋긴 하나 낙숫물이 댓돌 뚫기를 기다리듯 끈질기게 노력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엄가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그냥 두지 않고 반격해 올 것이다.

또한 바로 이즈음이었다.

원래는 양절에서 왜적과 잘 싸우고 있어야 했던 유대유가 벼슬을 박탈당하고, 조옥으로 호송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도망치는 적을 놓아주어 화를 남에게 전가시켰다는 죄명이었다.

육역은 유대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었고, 그는 절대 도망치는 적을 놓아줄 리가 없었다.

육역은 금의위의 밀정을 통해 즉시 전체 사안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유가 투옥되는 진정한 원인을 알게 된 순간, 육역의 심장은 화가 치밀어 터질 것 같았다.

양절의 해안을 따라 왜구의 무리가 전횡을 일삼으며 떠돌았다. 호종헌의 병력은 한계가 있어서 그들을 수습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그들은 복건까지 침범하기에 이른다.

이에 복건 순무(*지방행정장관.)가 크게 노하여 호종헌이 적을 놓아주고 도망치게 하여 화를 남에게 전가시켰다고 도찰원 감찰어사 이호에게 고변한 것이다.

이호가 복건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호종헌은 자신의 사람 중에 내부 사실을 알린 첩자가 있었을 거라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한바탕 제 사람들에 대한 뒷조사를 한 그는 유대유도 복건인이라는 사실을 시기적절하게 알아냈고, 이호에게 고변한 것이 유대유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 이후 호종헌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누명을 유대유에게 씌워 성상에게 상소를 올렸다. 모든 것은 유대유가 왜구를 제대로 잡아들이지 못하고 태만한 탓으로 복건까지 왜구가 넘나들게 했다고.

성상은 대노했고, 즉각 유대유의 관직을 삭탈하고, 조옥에 잡아넣으라 명령을 내렸다.

이 적을 무찌를 줄만 아는 고지식한 장군 형님은 평소 친교도 제대로 맺어둔 이가 없으니, 누명을 써도 그를 위해 말해줄 이 하나 없었다.

육역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원자 하나 없는 유대유 같은 사람에게 조옥이 얼마나 험한 곳이던가. 들어간 후 무사히 몸을 빼려한다 해도 아마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는 사람을 빼낼 방법을 먼저 생각해 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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