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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203)화 (203/224)

203화

“사실은 자네도 이런 도리쯤 이해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자네는 일시적으로 이 고비를 넘지 못한 것이지, 맞지?”

개숙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다시 치솟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심 부인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었다. 흐느낌이 차오른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개숙이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조용조용 달랬다.

“자네 알지. 십 년 전 자네가 엄세번을 찔러 죽이러 가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나는 자네 첫 숨이 가까스로 돌아오는 걸 보고, 그때 바로 생각했어. 다시는 자네를 이렇게 살게 할 수 없다고. 아무리 큰 원한이라도, 제 생을 다 쏟아 부어 복수하는 것과 남은 생을 잘 살아 보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심 부인은 조용히 개숙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해 정난의 변(*명의 연왕(영락제)이 건문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건.) 때 말이야. 당시 궁중에는 기막힌 변화가 있었고, 강산의 주인이 바뀌었어. 우리 조사께서는 궁 밖으로 도망쳐 구걸을 하면서도 계속 주군을 찾으시며, 그분이 잘 살아남아 주셨기만 바라신 거야. 그들 누구도 투항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더는 누구의 시중도 들지 않으셨어. 누구의 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고, 어느 누구의 녹봉도 받지 않으셨지. 그러나 그들은 복수도 하지 않으셨어. 그들은 단지 잘 살아남아야 주군을 찾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야.”

개숙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오늘 금하가 자넬 막지 않았다 해도, 내가 바보짓 못하게 했을 거야. 육병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봐. 휘하 금의위가 온 명나라에 다 퍼져있고, 조선에도 금의위 첩자가 있을 정도지. 자네가 만약 육역을 죽였으면, 그가 온 명나라를 죄다 뒤집었을 거야. 그리고 자네를 찾으면……, 나는 자네와 남은 반평생 편안하게 살고 싶어.”

심 부인의 눈물이 개숙의 어깨를 흠뻑 적셨다. 이내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금하 깨어나면 우린 바로 떠나요.”

“좋아.”

개숙은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더는 아이 욕하지 말어. 자네 아니라도 이 아이 마음은 이미 넘치게 힘들어.”

심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숙은 일어나 문을 열고 나섰다. 육역은 여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개숙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지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 * *

문득 금하는 멍멍하고 아득한 기분으로 깨어났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아 천천히 눈을 뜨니, 침상 가에 앉은 심 부인이 보였다.

“이모…….”

금하는 조금은 머뭇거리며 그녀를 불렀다. 바라보던 심 부인이 손을 뻗어 이마에 닿으려던 금하의 손을 막았다.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만지지 마. 상처는 별일 없을 거고, 그저 크게 부풀었어. 며칠이 지나면 천천히 가라앉아.”

“이모 화 안 나셨어요?”

금하는 순순히 손을 내려놓고,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의 눈빛처럼 보는 이의 심장을 더욱 아프게 했다.

잠시의 침묵 끝에 심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난 네 아저씨와 함께 떠날 거야. 앞으로의 일은 네 스스로 잘 생각해 보고 하거라.”

“어디로 가세요?”

금하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나도 모른단다. 우선 떠나는 거지. 아마 간 곳이 좋다고 생각되면, 거기 살겠지.”

금하의 눈가가 단번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이후 저는 이모와 아저씨 못 보는 건가요?”

“앞으로 나와 네 아저씨가 안정되면, 어쩌면 편지를 쓸 수 있겠지. 그러지 못할 수도 있고.”

심 부인은 고개를 돌린 채 깊은숨을 들이켰다.

“사실 만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을 거야.”

“안 돼요.”

금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결국 심 부인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그녀의 혈육이었고, 금하의 마음에 그녀는 매우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심 부인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연이어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네 아저씨가 말씀하셨어. 어떤 상황이든 삶을 잘 살아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넌 잘 살아가야 해. 언니와 형부가 널 어렵게 도망시켜 새로 태어나게 했으니, 넌 반드시 잘 살아가야 해.”

금하는 이마의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심 부인은 해야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하고서야 일어나 문을 나섰다. 육역은 그때까지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심 부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설마 아직도 저 아이와 함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육역이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감히 과욕을 부리진 못합니다.”

그를 주시하던 심 부인은 끝내 무슨 말도 더 하지 못한 채 바로 자리를 떴다.

방 안에는 금하뿐이었다. 육역이 조용히 문을 열었고, 그 사이로 비스듬히 스며든 햇볕이 그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늘여 놓았다.

금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양은 그의 장포 위에서 아롱대며 담황빛의 무늬를 그렸다. 왠지 모르게 그의 온몸에 스민 외로움과 쓸쓸함이 금하의 가슴에도 함께 스몄다.

夕阳依旧垒,寒磬满空林。

석양은 오공대를 아쉬워하며 천천히 떨어지고, 청아한 풍경 소리 텅 빈 숲에 가득하다.

- 당, 유장경 <秋日登吴公台上寺远眺 가을날 오공대 위의 산사에 올라 멀리 바라보다> 중

금하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시구는 그를 닮았다. 비록 이곳은 산속이 아님에도 주변 가득 스민 황막함과 쓸쓸함은 금하에게 여전한 한기로 덮쳐왔다.

천천히 가까이 온 육역이 침대 가에 반쯤 굽혀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고도 짧은 반나절. 하지만 두 사람은 세상의 큰 변화를 직접 겪은 듯했다. 상대의 초췌한 얼굴이 눈에 들어와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서로를 아파했다.

금하는 붉어진 눈을 들어 그를 보고만 있었다. 가슴 속 첩첩이 쌓인 수많은 언어는 기어이 한자도 말할 수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켠 육역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넌 내일 원래 정한 대로 백록과 경성으로 돌아가는 거야, 괜찮지?”

금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움직임을 따라 눈물방울이 뚝 떨어져 뺨으로 굴렀다.

육역이 손을 내밀어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훔쳐 주고 조용히 말했다.

“네 이 모습은 전혀 온몸에 바른 기운이 가득한 육선문 포쾌 같지 않아.”

금하는 양주에서 그와 함께 사건을 처리하며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소관은 조정의 포쾌로서 온몸에 호연정기가 가득합니다. 온갖 잡귀라 한들 감히 가까이 오질 못하지요.”

조금은 웃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성격 급한 눈물이 더 급하게 흘렀다.

“아직 날 믿어?”

육역이 물었다.

금하는 주저함 하나 없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말 기억해. 스스로를 탓하지 마! 나는 네게 모든 일의 결말을 내줄 거야.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야. 그 동안 넌 잘살아 가면 되고, 다른 생각하지 말고, 어떤 복수도 하려 하지 마. 네게는 너무 위험한 것들이다. 이해했지?”

육역은 더없이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그녀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려는 듯했다.

금하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한 거다?”

금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바라보던 육역은 희미하게 웃었다.

육역의 손끝이 금하의 얼굴선을 따라 천천히 쓰다듬었다. 시선이 맞닿았을 때, 애틋하게 웃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눈물 가득한 그녀의 눈가를 입술로 쓸어주고, 미끄러지듯 콧등을 내려와 눈물에 젖었던 입술 위에 숭배처럼 입 맞췄다. 이내 육역은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얼굴을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나의 금하, 금갑신인께서 보우하셔서 재난을 만나면 상서로워지고, 화를 만나면 복이 되길…….”

* * *

별원 안 상관희도 행장을 꾸렸다. 그녀의 다리 부상은 이제 거의 완쾌가 되어 사소와 함께 남소림의 사형들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가시려고요?”

아예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상관희는 행장을 꾸리던 손을 잠시 멈췄다. 짐에서 검은색 옷 한 벌을 꺼내어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돌아서 아예에게 다가갔다.

“상점에서 산 거라 네게 잘 맞을까 모르겠어.”

아예는 일순 멍해졌다.

“소방주의 체격에 맞춰 산 겁니까? 그럼 아마도…….”

“아니야. 네 체격에 맞춰 산 거야.”

상관희가 옷을 그의 손에 들려줬다.

“난 네가 방에서 늘 검은 옷을 입은 걸로 기억하고 있어.”

“당주…….”

아예는 저도 모르게 예전 습관대로 그녀를 불렀다.

“나는 엄가가 건재하는 한 네가 방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안다.”

상관희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

“넌 이후로 어찌할 생각이야?”

“……군에 들어가려고요.”

아예가 웃어 보였다.

“당주처럼 왜구와 싸울 겁니다.”

상관희는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러고는…….”

아예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왜란은 결국 평정될 거고, 엄가도 영원히 득세하진 못할 거야. 난 방에서 널 기다릴게.”

상관희는 차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치 평소 방의 일을 당부하는 것처럼.

열기가 눈가로 몰린 아예는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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