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금하는 완전히 넋이 나갔다. 심 부인 또한 놀란 나머지 그에게 다급히 추궁했다.
“육병은 하언과 비록 사이가 가깝다고 할 순 없어도 서로 존중하는 쪽이었어요. 그가 왜 하언을 죽여야 했죠?”
“그건 그 이전에 하언이 육병을 탄핵하는 상주서를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지. 증거가 확실하여, 그는 원래 성상께 육병을 처벌해 달라고 상소를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병이 찾아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고, 그 굴욕을 보여서인지 최종적으로 하언은 육병을 놓아주었어.”
심 부인은 들을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하언이 그를 놓아줬으면, 그는 더욱 고마워해야죠. 어떻게 오히려 하언을 해치려 해요?”
“육병이 어떤 사람이던가. 그는 성상과 친구로 자랐고, 세상사 도도하고 자만심이 넘치는데, 어찌 이런 치욕을 견딜 수 있겠어. 그일 이후, 그는 하언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게지. 내가 육병의 곁에 있었는데, 어찌 모를 수가 있겠어.”
양정만의 어조는 느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육병도 내 원수라고요!”
순간 금하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이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양정만이 아픈 눈빛으로 금하를 바라봤다.
“그렇다! 바로 육역이 육병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네가 그와 함께 있는 걸 막아야 했단다. 우선 하언에 대한 육병의 감정상으로는 그에게 일단 네가 하언의 손녀라는 게 알려지면, 널 죽이지는 않더라도 절대 네가 시집오게 하지는 않을 게다. 그걸 차치하고라도 육역은 원수의 아들이다. 하가 백 명의 생명이, 또한 임가의 칠십여 명의 생명 전부가 네 가족이고 친족이었어. 네가 어찌 원수의 아들을 사랑할 수 있느냐. 그러니 그에게 시집가는 건 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금하는 진열장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데 양정만의 말을 듣는 내내 몸에는 연이어 오한이 밀려들었다. 한기는 뼛속까지 스미고, 심장을 씹어 삼킨 듯해 그녀는 결국 더는 서 있지 못한 채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심 부인은 오래도록 고요했다. 그러다 돌연 양정만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제는 왜 내게 이일을 말하지 않았어요?”
양정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육병이 오라버니를 잘 챙겨줬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일을 숨기고 싶었던 거죠? 만약 이 아이가 육역과 함께하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면, 오라버니는 계속 내게 감췄겠죠. 그렇죠?”
양정만을 가리키는 심 부인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오라버니는 우리 금하를 이리 오랫동안 보살펴줬고, 나는 감사하고 있어요. 언니를 위해 복수할 방법은 없으나, 나는 조금도 오라버니 탓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날 속여요!”
양정만은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심 부인은 자신이 육역의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극에 달했다.
“내가 육병의 아들을 구할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어. 세상에, 이건 진정 하늘만큼 큰 웃음거리잖아! 육병은 우리 집안을 완전히 부숴버렸는데, 나는 진짜 우습게도 그 아들의 생명을 구하다니.”
금하는 시선을 들어 심 부인을 바라봤다. 숨은 턱턱 막히고, 보이는 것은 전부가 고통이 되었다.
한참이 지난 후, 돌연 심 부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어. 그가 아직 여기 있잖아. 내가 약을 배합하기만 하면, 그를 죽일 수 있어. 그를 죽일 수 있어…….”
심 부인이 이러며 밖을 향해 걸어가니, 멍하니 듣던 금하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일어나는 것조차 늦어 바닥을 기고 굴러 심 부인에게 달려들었다. 그저 심 부인의 다리를 죽어라고 껴안고 매달릴 뿐이었다.
“이거 놔!”
심 부인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금하는 죽을힘을 다해 그녀를 껴안고, 머리를 아래로 숙인 채 조금도 손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이내 심 부인이 벌컥 화를 터트렸다.
“얼른 날 놓아! 집안이 망하고 가족이 죽은 심정이 어떤 것인지 네가 알아? 그들은 네 아버지, 네 어머니이고, 원래 전부 너와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그들이 모두 죽었어! 원수의 아들이 이렇게 눈앞 가까이에 있는데, 원수조차도 갚지 않는 건 사람의 자식이 아니야!”
말 한 마디 한 마디 전부가 채찍이 되어 금하의 심장을 무겁게 내리쳤다. 그녀라고 어찌 모를까, 어찌 이해할 수 없을까. 금하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젖었지만, 손만은 한사코 풀려 하지 않았다.
양정만도 곁에서 보고 있었으나, 이 상황은 말리려야 말릴 수 없고,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니 그는 결국 견디지 못하여 고개 숙여 눈물을 흘릴 뿐이다.
“어젯밤 네게 말해준 그 많은 일이 헛되었구나. 네 마음속에선 부모님, 외조부 외조모 전부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 너 자신은 복수할 수 없다지만, 그렇다고 네가 날 막을 수도 없어! 넌 임가의 아이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나는 임가의 자손이야!”
격분한 심 부인이 금하를 몇 대 때렸다.
그러나 금하는 대답할 수 없어 오열만 할 뿐이었고, 심 부인에게 육역을 해치러 가지 말라고 어찌 애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문득 금하가 심 부인을 살짝 놓고는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재빨리 심 부인을 향해 머리를 땅에 거듭 부딪히며 고두의 절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또 이어서 한 번, 부딪히는 것은 빠르고 급했으며 그녀가 부딪힐 때마다 푸른 벽돌이 쿵쿵 소리 내며 울렸다.
“너…….”
제자리에 선 심 부인은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파 어떤 말로도 입을 열 수 없었다.
밖에 있던 개숙이 안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상황에 그가 놀라 물었다.
“왜 이래? 이 아인 왜 머릴 온통 부딪혀 벌게졌어?”
심 부인은 고개 숙여 금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 한가득이었다.
금하는 알고 있었다. 심 부인을 가장 막지 말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이란 걸, 그녀 자신이 가장 막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래서 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하여 심 부인을 말릴 염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쿵쿵 머리를 찧어 절을 하는 것 뿐.
“대체 왜 이러나?”
큰 이나, 작은 이나 모두 울고 있을 뿐이다. 개숙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해 육병이 구경을 사주하여 쓴 상주서로 하가와 임가가 쓰러졌어요. 말 좀 해 봐요. 백 명이 넘는 하가 사람, 칠십여 명의 임가 사람이 쟤 정인 하나를 막아내지 못하네요.”
심 부인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진작 알아서 그때 나는 육역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래야 부모님께 면목이 섰을 거예요!”
“육병도 당신 원수였어?”
개숙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찧고 있는 금하를 다시 바라보았으나, 그 또한 한순간 당황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어떻게 이 매듭을 풀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후로 더이상 너는 나를 이모라 부르지 마. 언니에게 너 같은 아이는 없어!”
심 부인이 금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어나. 난 네가 올리는 절 같은 건 견딜 수 없어.”
금하의 눈물은 계속 흘렀고, 이마를 찧는 것도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바닥의 벽돌 위로 금하의 이마에서 흐른 피가 붉게 흩뿌려졌다.
“이러지 마. 쟤한테 어떡하라는 거야? 이건 이 아이더러 죽으라 강요하는 거잖아.”
개숙은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심 부인을 타일렀다.
내당에 있던 육역이 들은 건 어렴풋한 소리였다. 급하게 달려온 그는 금하가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심장으로 커다란 고통이 밀려들었다.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간 그가 그녀를 일으키려 했다.
“금하, 어서 일어나!”
하지만 금하는 초조해하며 그를 가라고 밀었다.
“가요! 얼른 가요!”
육역을 바라보는 심 부인의 눈에는 불길 같이 타오르는 분노가 더욱 분명해졌다.
“육역, 지난 원한을 논하지 않더라도, 내가 당신 생명을 구한 적이 있죠?”
육역이 금하를 부축해 일어났다. 피가 흐르는 그녀의 이마를 제 손으로 덮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생명은 선배께서 구하신 겁니다. 가져가신다 해도, 전 절대 다른 말 하지 않겠습니다.”
“안 돼, 안 돼……. 안 돼요…….”
다급한 금하의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녀는 애원의 눈빛으로 심 부인을 바라봤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육역이 다정한 어조로 금하를 위로했다.
“내가 말한 것 기억하지? 얼마나 큰 원한이든, 원수가 누구이든, 너 대신 내가 다 잘 처리할 거다. 아버지가 하신 일을 내가 맡는 거야. 아버지 빚을 아들이 갚는 건 원래 당연한 도리야. 내게 시간을 줘. 내가 네게 타당한 결말을 내줄게.”
“결말? 어떤 결말이 하가와 임가의 백이 넘는 사람의 목숨에 견줄 수 있을까?”
심 부인이 그에게 물었다.
깊게 숨을 들이켠 육역이 입을 열었다.
“저는 반드시 전력을 다할 것이고, 뜻을 이루지 못해 제 목숨으로 상쇄한다 해도, 절대 두말 않겠습니다.”
심 부인은 그와 금하를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눈빛은 가눌 수 없는 괴로움으로 가득했다.
“나는 오늘 당신에게 목숨으로 갚으라 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내가 당신 말을 믿어서가 아니고, 이 아이 때문이에요. 하지만 저 아인 오늘 당신 대신 용서를 바라며 불효 불충했어요. 우리 임가의 아이가 되기에는 지극히 어울리지 않아요.”
심 부인은 울음 섞인 숨을 들이 켠 후 금하를 향해 말했다.
“나는 원래 금하 널 데리고 영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단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가문을 저버렸다는 자각에 금하는 얼굴도 들 수 없었다. 눈물은 멈출 수 없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심 부인이 돌아서 나간 후 개숙도 따라 나갔다.
육역이 금하를 부축했지만,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육역을 한 번 보고는 가볍게 그의 손을 밀었다. 스스로 천천히 밖을 향해 걸었다.
눈부신 태양이 한창 좋은 날이다.
머릿속이 텅 빈 금하는 망연히 고개 들어 태양을 바라봤다. 반짝이는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 쬐이고, 지나치게 환한 빛은 강하게 눈을 찔렀다.
그 순간, 금하의 몸이 흔들거렸다. 그녀는 돌계단 위에서 그대로 굴렀다.
* * *
“아이고, 내가 진즉 말했잖소. 자네 이러는 건 아일 사지로 내모는 거야.”
침상의 금하를 보는 개숙은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이 아이가 누굴 건드리기나 했어, 원한을 사기나 했어. 머리는 깨진 데 없나 모르겠네.”
심 부인은 금하의 이마에 난 상처를 적당히 처치해 놓았을 뿐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과 어제 당신이 이모란 걸 알고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지. 둘이 아주 다정하게 밤새 얘기도 했는데, 오늘은 자네가 안면 싹 바꿔서 널 인정하지 않는다 하고, 불효 불충하다고 퍼붓고……. 얘는 아이야. 영리해 보이긴 하나 사실 고지식한데, 어딜 이걸 견뎌낼 수 있겠어. 자네가 얘한테 집안의 원한을 말하고, 백 명 넘는 가족을 말해도, 금하는 자기 부모 모습조차 기억 못 하는데, 어찌 자네와 같이 원한을 품을 수 있냔 말이야.”
심 부인은 시종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대신 개숙이 계속 이어 말했다.
“엄밀히 따지면, 나도 육가와 일가지. 아니면 자네는 먼저 나로 원한을 풀어. 자르든 찢든 나는 전부 자네를 따를 테니까.”
개숙의 손에는 손수건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옷소매로 심 부인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내가 오늘 또 옷을 갈아입어서 깨끗해……. 자네가 내게 분명 손 못 댄다는 걸 알아. 내가 육가와 거의 상관없는 먼 일가라서 그런 건 아니잖아. 아주 가까웠더라도 자네는 분명 손대지 못했어. 금하를 다시 생각해 봐. 이 아이는 아무리 나이가 어리긴 해도, 자기 사람이라 확신하면, 절대 흔들리지 않아. 육역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마 이 아이도 반은 죽어 나갈 거야. 자넨 아이가 이런 걸 잘 이해해 줘야지.”
심 부인은 침상에 조용히 누워 있는 금하를 바라보았다.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아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