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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99)화 (199/224)

199화

금하가 성벽으로 밀리자, 육역은 경악했다. 달려가 그녀를 구하려 했으나, 왜구가 순간 긴 칼을 맹렬히 휘둘러 그는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문득 바닥의 쇠사슬을 본 육역이 발로 차올리고 그 끝을 금하에게 던졌다.

쇠사슬은 성인의 팔뚝만큼 굵었다. 끌기도 쉽지 않건만, 던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육역의 어깨 부상은 아직 낫지 않아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이때 이미 벽돌 틈으로 버티고 있던 금하의 손가락에서는 힘이 빠지고 있어 더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손이 미끄러진다 해도 바로 추락할지 모른다. 그때 마침 쇠사슬이 날아왔고, 육역의 목소리도 들렸다.

“잡아!”

그녀는 눈앞에 늘어진 쇠사슬을 재빨리 붙들고 필사적으로 기어올랐다. 그 사이 기회가 남았다고 판단한 좀도둑이 동삼의 긴 비수를 들어 육역을 찔렀다. 육역은 한 손으로 쇠사슬을 쥐고 다른 손으로 그의 공격을 막았다.

육역은 가로막힌 성벽 때문에 금하가 쇠사슬을 잡았다는 것만 알 뿐, 그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사고라도 생길까 두려운 마음에, 왜구를 피한 그는 팔에 힘을 줘 쇠사슬을 힘껏 끌어당겼다.

그 쇠사슬을 따라 금하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성벽 위로 가볍게 떨어져 굴렀다.

금하는 무사했다. 빠르게 한숨을 돌린 육역이 왜구를 상대하여 연이어 몇 초를 겨루었고, 기어이 그는 왜구를 처리했다.

“육 대인…….”

금하는 자신보다 그가 다친 것이 걱정되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을 테지만.

“목숨을 구해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육역은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돌아서 바로 걸어갔다.

쇠사슬은 상당히 무거웠다. 그가 쇠사슬을 내려놓았을 때에는 이미 온몸의 내력을 전부 써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그는 가슴의 답답함을 지독히도 견뎌야 했다. 금하가 보고 있다는 생각뿐, 계단이 꺾어지는 곳까지 가까스로 걸어가서야 더는 참지 못하고 선혈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도 못했다. 혹여라도 금하가 무언가 알아챌까 두려워, 육역은 벽을 짚고 일어나 힘겹게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금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왜구의 시신을 먼저 살피고서야 그녀는 느린 걸음으로 성벽을 내려왔다.

계단에 이르렀을 때, 바닥의 선혈을 발견한 금하는 그 자리에 아득하니 얼어붙었다.

* * *

별원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잠수에게 물어 육역이 이미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무슨 일 있냐? 안색이 안 좋다.”

“별일 아니에요. 육 대인은…….”

“외출했다 돌아오셔서 계속 방에 계신다.”

“돌아오신지 얼마나 됐어요?”

“한참 됐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금하는 잠수와 헤어져 육역의 방 앞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육역은 분명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가 흘린 것이 분명한 피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그녀는 기어이 육역의 방문을 두드렸다.

“육 대인, 다치신 거죠? 괜찮으세요?”

잠시 후, 안에서 육역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다치지 않았어. 가거라.”

금하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편히 가버릴 수도 없었다. 창 아래 조용히 쪼그리고 앉아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기다렸다.

만일 안에서 육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자신이 제때 달려가 그를 도울 거라는 그런 생각뿐이었다.

방 안의 육역은 좌선하여 운기조식 후, 침상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는 부지불식간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사방은 흐릿하고 아스라한 안개로 휩싸였다. 그는 성벽으로 돌아와 있었고, 그 위에 서서 금하가 성벽 아래로 던져진 것을 보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그녀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에게……, 손이 닿지 않았다.

금하는 무겁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몸에서는 빠르게 선혈이 터졌고, 검붉은 피가 한순간 시야를 온통 적셨다.

순간 놀라 벌떡 일어난 육역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을 헐떡거렸다. 거친 숨결이 새어나오고, 고함이라도 터질 것 같아 그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금하야, 원금하!

꿈인가, 생시인가?

한순간 그는 구분이 되질 않았다. 침상을 내려와 방문을 열고 누구라도 찾아 절박하게 묻고 싶었다.

“육 대인?”

순간 뒤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아주 조심스러운…….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금하는 이제 막 바닥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옷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었다.

“저, 저는 대인 내상 입으신 게 염려되었을 뿐이에요. 저를 구하려고…….”

그녀는 말을 다 하지도 못했다. 다음 순간, 이미 육역의 품 안에 단단히 안겨 격렬하고 불안정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 소리도, 바들바들 떠는 어깨의 떨림까지도 분명히 느껴야 했다.

그녀는 여기 있어! 죽지 않았어!

팔을 다쳤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육역은 두 팔을 힘껏 그러모았고, 그에게 평온을 가져온 온기를 기꺼이 제 안에 가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그때 돌연 누군가 무거운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금하야!”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이 들어 육역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꽉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을 조금 풀었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니 짙은 황혼을 등진 누군가 서 있었다.

준엄한 눈빛을 한 사람, 그는 바로 양정만이었다.

* * *

양정만의 다리 상처는 아직 다 낫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걸어 다니지 말아야 하고, 장거리 여정은 더욱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양악의 편지를 받자마자, 사백리의 충고도 뿌리치고 신하성으로 부랴부랴 온 터였다.

그런 그가 별원에서 금하와 육역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그에게는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일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장, 어떻게 오셨어요?”

금하가 놀란 시선으로 양정만을 바라봤다.

“다리는 다 나으셨어요?”

양정만의 뒤에 있던 양악은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말라며 다급히 손짓했다.

양정만은 금하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육역을 향해 규정대로 공수의 예를 표했다. 그러나 어조는 상당히 무뚝뚝했다.

“육 대인, 변변치 못한 제자가 분수를 몰라 자신의 본분을 잊은 것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육역이 양정만을 주시하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양 포두는 신하성에 어찌 오셨습니까?”

“두 제자가 아직은 어린 나이인데, 왜구가 흉포하게 날뛰는 곳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 이 늙은 몸은 한가로이 할 일이 없으니, 한 번 확인하고자 온 것입니다.”

양정만의 시선이 금하를 향했다.

“금하는 나를 따라오너라.”

“……네.”

금하는 사부의 말을 따라야 해서 그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음도 놓이지 않아 불안하게 육역을 바라봤다.

그러나 시선이 마주친 그 역시 깊어진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아. 가 봐.

마치 그리 말하는 것 같아 금하도 가까스로 그에게 웃어 보이고, 양악과 양정만을 부축해 양악의 방으로 돌아갔다.

“금하 넌 네 잘못을 아느냐?”

양정만은 자리에 앉자마자 금하에게 화를 냈고, 양악에게도 호통을 쳤다.

“둘 다 무릎 꿇어!”

양악이 쿵 하며 무릎을 꿇었다. 금하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무릎을 꿇으면 대장의 화를 풀게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양주를 떠나기 전, 내가 네게 금하를 잘 지켜보라 하였다. 넌 대체 무얼 한 것이야!”

양정만이 양악에게 벌컥 화를 냈다.

참을 수 없던 금하가 끼어들었다.

“대장, 저 아무 일 없이 멀쩡히 잘 있잖아요? 어디 다친 곳도 없고요. 대양은 저를 아주 잘 보살펴줬어요.”

그녀는 떳떳했다. 방금 전 육역과 그러고 있던 것을 대장이 보아 조금 곤란한 것이지,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네가 감히 지금 할 말이 있어? 방금, 방금……, 아가씨는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거늘. 육역이 어떤 신분이더냐. 네가 어찌 그와 부적절한 관계가 될 수 있더냐!”

양정만은 화가 나 손이 다 떨렸다.

“네 이런 일을 나는 네 어머니께 어떻게 설명하라고…….”

그가 한창 꾸짖는 사이, 누군가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두 사람 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양악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밖에 선 이는 바로 심 부인이었다.

양정만은 심 부인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얼이 빠졌다. 한순간 누가 먼저 아는 척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한 세월이 이미 오래다. 각자 겪은 변고는 말할 것도 없이 기구한 것이니, 귀밑머리는 세월의 풍상이 담담히 내려앉아 이전 그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양정만이 그 세월을 고스란히 맞았다. 그는 조옥에 들어가 다리가 부러졌고 육선문에서 세상과 타협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는 해도, 큰 신임을 받지도 못했다.

그때 그 원기 왕성하고 기개 늠름하던 양립과는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이모!”

금하는 대장의 분부가 없으니 차마 일어나지도 못한 채 심 부인을 불렀다.

“우리 대장이세요. 제가 늘 말씀드렸죠.”

양정만은 금하가 이리도 낭랑하게 부른 ‘이모’ 소리에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떨린 입술을 몇 번이나 앙다물고서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저……, 저이를 네가 이모라 부른다고?”

안으로 들어온 심 부인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맞아요! 절 이모라 불러요.”

“네가 정말 살아 있던 것이냐?”

양정만이 말했다.

“그해, 나는 네가 돌연 엄세번의 암살을 강행했단 말을 들었다. 다들 네가 죽었다고 했어.”

심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누군가 절 구해줬어요. 그때 나는 경성에 가서 오라버니를 찾았는데, 오라버니는 조옥에 갇혔고, 살길이 전혀 없다는 말만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죠?”

두 사람의 주거니 받거니 하는 문답은 듣고 있는 금하와 양악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모, 대장을 아세요? 두 분 알던 사이셨어요?”

금하가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금하를 바라보던 심 부인은 기어이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언니를 대신하여 제가 감사드려요. 지금껏 이 아이를 너무도 잘 보살펴 주시고, 무공도 가르쳐 주셨죠.”

금하는 들을수록 머릿속에 흐릿하게 안개가 낀 것처럼 어리둥절해졌다.

“에?”

양정만은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원래 더 잘돼야 했는데, 내가 능력이 없었다.”

“대장, 이모,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양정만은 심 부인의 말에 부인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니 완전히 확신이 선 심 부인은 이제 금하를 향해 돌아섰다. 참지 못한 눈물이 그녀의 볼 위로 주륵 미끄러져 굴렀다.

“얘야, 나는 네 친 이모야! 네가 나를 이모라 부르고 있었지. 정말로 그렇게 부르는 게 맞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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