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다음날 이른 아침. 육역은 눈을 뜬 순간 시야를 온통 차지한 큰 얼굴에 흠칫 놀랐다.
개숙이 그와 얼굴을 거의 맞붙여 눈을 크게 뜬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의 얼굴 위로 뚝 떨어질 것처럼.
“선배님.”
육역이 손으로 그를 살짝 막았다. 이제야 호흡이 조금 순조로워졌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개숙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묻고 싶은 아주 중요한 일이 있지.”
“말씀하십시오.”
육역은 그를 다시 막으며 제 몸을 버텼다.
“어젯밤, 네가 뭘 하고, 무얼 말했는지, 기억하냐?”
또 몸을 밀치며 개숙은 그를 무섭게 몰아붙이는 자세를 잡았다.
“어젯밤, 척 장군 쪽에서 술을 좀 마셨습니다.”
육역이 희미하게 웃었다. 다시 개숙을 떠받치고는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그 술은 향설주라 하는데, 선배님께서 드셔 본 적이 있으신지요?”
“향설주는 마셔 본 적이 없다.”
“색과 맛 모두 좋습니다. 쉽게 취하게 하지요. 선배님 드시고 싶으시면, 제가 잠복에게 상을 차리라고 할까요?”
개숙이 웃어 보였다.
“그거 좋지. 겸사겸사 닭발도 좀 사. 술이 있으면, 닭발이 있어야 흥취가 난다고 해.”
“알겠습니다.”
육역이 웃었다.
“돌아가 기다리시죠. 그가 사 오면 제가 선배님께 가져다드리라 하겠습니다.”
개숙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반쯤 가다가 이상하다 생각하여 돌아서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아니지. 내가 네게 물어볼 게 있었지. 어째 넌 나를 내쫓는 거냐?”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육역은 서두르지 않고 온화하게 웃었다.
“너 어젯밤 앞뜰에서 저 계집애한테 한 말, 아직 기억하지?”
개숙이 그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취했다느니, 무엇도 기억 못 한다느니, 그런 말은 집어 치워라.”
“기억합니다.”
육역이 말했다.
개숙도 그가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인정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의심을 품고 물었다.
“정말 기억해?”
육역이 담담히 웃었다.
“제가 한 말을 제가 어찌 기억 못 하겠습니까.”
바로 이때, 누군가 닫혔던 문을 밀고 들어왔다. 금하가 안으로 성큼 들어온 것이었다. 그녀는 눈언저리가 푸르스름한 것이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계집애야, 너 왜 왔어?”
개숙의 생각으로는, 그녀가 여기 있으면 자신이 육역의 마음을 떠보기가 불편할 듯싶었다.
“아저씨가 너 대신 얘 교육 좀 시키고 있다. 넌 이따 다시 와.”
금하는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눈은 육역만 바라보고 있었다.
육역은 깊은 숨을 들이켜고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한 채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문조차 두드릴 줄 모르는군. 육선문은 너희에게 이런 규율을 가르쳤던가?”
“……소관, 예의에 어긋났습니다. 대인께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금하는 화를 꾹꾹 누르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야야, 계집애야. 너 먼저 나가. 내가 너 대신 교육 잘 시킬게. 넌 다시 와라, 어?”
개숙은 금하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불손하게 개숙의 손을 뿌리쳤다. 육역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관 한 가지만 육 대인께 묻고 싶습니다. 물으면 바로 가겠습니다.”
“묻거라.”
육역이 미간을 찡그렸다.
“어젯밤 육 대인께서 앞뜰에서 하신 말씀, 진실입니까?”
“당연히 진실이다!”
그는 심지어 아주 잠깐의 사이도 없이 바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나는 이미 호 도독에게 말을 해두었어. 너희는 호위대와 함께 경성으로 가.”
금하는 얼음처럼 차디찬 그의 말을 들으며 그곳에 서 있었다.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요? 며칠 전까지도 아무 문제없었잖아요?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해요?”
육역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가까스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왜. 억울한가? 넌 줄곧 포두가 되고 싶다 하지 않았나? 내가 육선문의 총포두에게 편지 한 통은 써 줄 수 있다. 네가 강남과 양절에서 공을 많이 세웠다 하고, 그에게 널 승직시키라 청하지. 총포두는 내 신분과 체면을 보아 해줄 수는 있을 게야. 이것은 내가 네게 주는 보상으로 치지.”
금하는 그의 말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필요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렸으나 한 글자, 한 마디는 오히려 선명하고 또렷했다.
“이 도련님이 대인 따라다니며 손해를 본 것도 아니고 보상은 필요 없어요!”
화가 나 돌아선 그녀는 극도의 분노로 온몸의 힘이 거의 다 빠져나갔다. 문지방을 넘을 때, 다리 힘마저 풀려 그녀는 조금도 나가지 못하고 바로 비틀거렸다.
물론 육역은 많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개숙보다 빠르게 달려가 그녀를 끌어 당겼다.
육역의 품에 안긴 금하는 망연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을 내밀어 그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그와의 사이가 수없이 많은 산과 물로 가로막힌 것 같이 멀어 보였다. 사납게 그를 밀친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육역은 스스로도 똑바로 서 있지 못하여 문기둥에 기대서야만 했다. 가슴은 철덩이가 짓누르는 듯 답답하고, 숨은 턱턱 막혀 쉴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개숙이 고개를 저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네 분명……, 말할 수 없는 고충 같은 것이 있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저 앨 대해?”
육역은 무슨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손을 저었다. 개숙을 나가라고 할 수도 없어 자신이 방을 나왔다.
남은 개숙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생각하는 바가 있었다.
* * *
잠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육역은 그저 조용한 곳을 찾고 싶어 후원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의 다 와서 누군가 얘기를 하는 것이 들려 그는 걸음이 멎었다.
후원의 큰 회화나무는 회화꽃이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고, 그 아래 앉은 잠수는 매우 화가 난 얼굴로 잠복에게 얘기 중이었다.
“……아무리 대공자라 해도, 이 말은 그래도 해야겠어. 그분이 이번 일은 많이 심하셨어.”
“언제부터 네게 대공자의 일에 대해 떠들어도 된다 했어?”
잠복이 말했다.
“떠들지 못해도 나는 말해야겠어. 평소 금하는 보통 아가씨보다 훨씬 독하잖아. 우리가 함께 왜구 만났을 때, 나는 걔가 겁내는 걸 본 적이 없어. 어젯밤 대공자가 걔가 쓸모없다고 말하는데, 얼굴이 완전히 하얘지더라.”
잠수는 생각할수록 금하가 그런 취급을 당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됐어, 됐어. 그리고 ‘우리’라고 해? 넌 언제 그쪽 편에 섰냐?”
잠복이 의아해했다.
“내 기억으로 넌 원래 원 낭자 상당히 마음에 안 들어 했잖아.”
“나는……, 내가 이건 도리에 맞아서 그런 거지, 사이가 가깝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야.”
잠수가 이어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금하가 무공은 좀 떨어지지만, 확실히 사건 조사에는 능력이 좀 있어. 나는 정말 놀랐잖아. 대공자가 이렇게 걔를 희롱하다니, 난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네가 마음에 안 들면 또 어쩔 건데? 네가 원 낭자한테 장가라도 들 수 있어?”
잠복이 혀를 차자, 잠수의 목이 순간 뻣뻣해졌다.
“금하한테 장가들면 어때서? 내가 또 하지 못할 것도 아니잖아! 대공자는 싫다고 했고, 설마 다른 사람이 원하는 걸 못하게 하실까…….”
“미쳤구나, 너! 대담하게 이런 말이 잘도 나온다.”
잠복이 불쾌한 기색으로 되는 대로 작은 돌을 집어 그에게 던졌다. 잠수는 더 말하고 싶어 했으나, 잠복이 엄한 목소리로 소리쳐 그만둬야 했다.
“입 닥쳐, 더 이상 말하지 마! 이후 이런 분수도 모르는 말 내가 듣게 하지 마.”
“핏……, 만날 입 닥치래. 형은 본인이 엄마나 아버지라 생각하나.”
잠수가 코웃음 쳤다.
조금 먼 곳의 육역은 회랑의 기둥에 기대어 발밑까지 바람에 날려 온 회화꽃을 보고 있었다. 그는 고요히 말이 없었다.
* * *
양악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고, 순우민은 그를 도와 회화꽃을 씻어 홰꽃 보리밥을 지으려 했다.
“대양, 오늘 밥하지 마. 내가 나가서 밥 살게!”
금하가 양악을 끌고 나갔다.
어젯밤 육역이 너무 늦게 돌아와 다른 이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게다가 금하가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양악은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안 돼. 난 그래도 밥해야 해.”
“상관하지 마. 본인들이 알아서 찾아 먹을 수 있어. 굶는다고 안 죽어.”
금하가 그를 재촉했다.
“도련님이 밥 사는 건 드문 일이야. 너 내 흥 깨지 마.”
순우민이 젖은 손을 내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양 오라버니, 걱정 말고 가세요. 여기는 제게 맡겨 주세요.”
“어떻게 그래요.”
“순우 아가씨도 함께 가요!”
금하는 순우민도 함께 잡아끌었다.
“이 도련님이 한턱내는 이런 일은 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예요. 사양할 수 없습니다.”
순우민이 입술을 다물고 웃었다.
“좋아요. 갈게요.”
“시원시원하시네!”
금하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마침 마주 오던 사소를 만났고, 그 역시 함께 끌려갔다. 그리고 금하는 보기에 매우 그럴싸한 주루를 골라 들어갔다.
“너 횡재했냐?”
사소는 금하의 짠돌이 기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금하는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호기롭게 점원을 손짓하여 불렀다.
“여기 우선 술 두 근 가져와요!”
“시작하자마자 마신다고? 정말 횡재했어?”
사소가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양악을 바라봤다. 하지만 양악도 어깨를 으쓱해 자신도 모른다는 뜻을 알렸다.
그때 점원이 은근한 태도로 다가왔다.
“손님, 어떤 술을 원하십니까?”
“음……, 어떤 술이 가장 싸요?”
금하의 물음에 사소는 흐흐 하며 계속 웃었다.
점원은 여전히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장 싼 것은 찹쌀주이죠. 하지만 싸서 별로라고는 생각지 마세요. 이건 저희 가게에서 직접 빚은 찹쌀주로 가게 특선이고, 달고 향이 진해요. 허한 기를 다스리고, 소화기능을 좋게 하고, 혈액 순환을 도와 위를 따뜻하게 하죠. 게다가 아가씨들 입에도 가장 잘 맞습니다.”
“좋아! 그럼 먼저 네 근 가져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