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93)화 (193/224)

193화

육병이 어떤 신분이던가. 그에게 이것은 씻을 수 없는 크나큰 치욕일 터였다.

그가 또 어찌 이런 수모를 아무렇지 않다고 무심히 삼킬 수 있었겠나. 분명 하언에 대한 증오심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가의 위부터 아래까지 백여 명, 임가의 위부터 아래까지 칠십여 명, 전부 그녀의 친족들이었다.”

육역의 목소리는 뜻을 알기 어려울 만큼 갈라졌다.

“그녀를 어떡해야 할까?”

“대인은 아가씨가 진상을 알게 된 후, 대인을 미워할까 두려우신 겁니까?”

남도행이 물었다.

“날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걱정하는 건 그 아이가 집안의 원한과 나 사이에 놓여 입지가 어려워지는 것이지.”

육역은 한없이 울적한 모습이었다.

“그녀에겐 이모가 있고, 양정만도 있으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선, 심 부인은 육가도 원수인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양정만은 그해 아버지의 곁에 함께 있었고, 그는 이 일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정말 이래도 저래도 다 어렵군요. 제 생각엔 아가씨가 다른 이와 함께인 것이 대인과 함께인 것보다 조금은 나을 겁니다.”

남도행이 말했다.

“대인께서 처음부터 아가씨를 가까이해선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됐습니다, 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운명인 것을요!”

“그녀를 가까이해선 안 되었다…….”

육역이 마치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건 지금도 늦지 않았을지도.”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육 대인, 저희 장군께서 얼른 오십사 하십니다! 지난번 대인께서 말씀하신 일은 가능성이 보이신답니다.”

하사관 한 명이 급하게 별원으로 왔다. 금하는 그를 육역에게 데려다 주었고, 바로 그에게 보고했다.

육역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정말 가능성이 생겼던가?”

하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군께서 사람들에게 사방을 찾아보라 하셨고, 원래는 바닷속에서 신령한 큰 거북이를 찾으려 하였으나, 여러 마리를 찾아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침 공교롭게 주산에서 한 마리 백록白鹿을 발견했습니다. 장군께서 말씀하시길 백록은 상서로운 동물로 비록 백호에 미치지는 못하나, 역시 쉽게 얻을 수 없으니, 육 대인께서 오셔서 뜻하시는 것과 맞는지 보시라 하셨습니다.”

“백록!”

옆에 있던 금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분명 이건 성상께 헌상할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녀는 육역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지금껏 흰 사슴을 본 적이 없어요. 저도 가서 볼 수 있을까요?”

그녀를 바라보는 육역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내 그는 기뻐하던 얼굴빛이 변하고 미간마저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간단히 말했다.

“넌 갈 필요 없다.”

“하지만 저는…….”

금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육역은 이미 하사관과 움직였다. 더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낙담의 한숨을 내쉬고, 무의식적으로 벽돌 틈새를 발끝으로 찼다.

금하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육역은 돌아볼 필요도 없이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뭉근히 아파왔지만, 이건 모두 그가 반드시 참아야 하고, 감내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는 절대 마음이 약해질 수 없었다.

그는 어젯밤 이미 분명하게 마음을 정리해놓았다.

금하는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결국 알게 될 것이다. 그녀가 진상을 알게 되면, 그럼……, 두 사람 앞에 가로놓이게 될 하가와 임가의 사그라진 이백여 명의 생명은 그가 해결할 수 없고, 뛰어넘을 수도 없는 응어리가 될 터였다.

또한 두 사람 간의 이 연분이란 앞으로 그녀의 심장을 찌를 예리한 칼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차라리 지금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게 할지언정, 훗날 그녀가 육친의 정과 자신 사이에서 고통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완전무결하고, 몸과 마음으로 모든 것이 온전한 그녀. 그에겐 지금 그것만이 가장 중요했다.

* * *

척 장군부로 가는 길, 육역은 금하가 실망하던 모습이 줄곧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장군부에 도착하고도 하사관이 일깨우지 않았다면, 육역의 정신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을 터였다.

“육 첨사, 드시죠! 백록은 후원에 있습니다.”

척계광이 그에게 공수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장군!”

후원에 도착한 육역이 본 것은 정원에 있던 백록이었다. 백록은 과연 온몸이 설백처럼 하얀 것이 머리 위의 녹각조차도 순백이었다. 나무 아래 늠름하게 서 있으니, 타는 듯 붉은 석류화가 그 몸에 얼비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만약 금하가 함께 있었다면, 백록을 너무도 좋아하여 시선도 떼지 못했을 텐데. 육역은 그녀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척계광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이라 그들도 짐승 덫을 쓰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포위를 좁혀서 사로잡았지요. 그래서 이 녀석 몸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습니다. 다만 놀래서 먹이를 먹으려 하지 않아 다소 말랐습니다.”

육역이 옆에 있던 당근 하나를 집어 앞으로 나와 먹이려 했다. 허나 백록은 놀라 바로 뒷걸음질하고, 전혀 먹으려 하질 않았다. 바닥에 있는 물그릇도 밟아 뒤집혀 있었다. 물조차 마시지 않은 것이다.

들고 있던 당근을 거두어들이던 짧은 순간, 육역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재빨리 파고들었다……. 맞아. 지금이 바로 내가 간절히 기다리던 가장 좋은 그 기회야!

육역이 즉시 척계광을 향해 돌아서 말했다.

“장군, 제게 청이 또 하나 있습니다.”

“말해 보시오.”

“제가 곧 한 사람을 데려올 터이니, 오로지 그에게만 이 사슴의 먹이를 주라 하십시오. 그 외에는 누구도 이 사슴에게 가까이 오게 하거나, 먹이를 먹일 수 없게 해주시지요.”

척계광은 바로 육역의 말을 이해했다.

“자네 의도는 사슴에게 주인을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군.”

“맞습니다. 장군께서 승낙하시겠습니까?”

“이 일은 쉽네. 내 명령 한 마디면 돼.”

“감사합니다, 장군!”

육역이 말했다.

“참, 장군께서 백록을 잡은 이 일은 가능한 빨리 호 도독께 보고하시고, 호 도독과 서 사부를 신하성으로 오라 하십시오.”

“이 사슴은 호 도독을 위해 찾은 것인가?”

“맞습니다! 이 일은 장군의 공로가 지대하시니, 호 도독이 필시 기뻐할 것입니다.”

척계광은 육역이 하는 일의 관대함에 찬탄할 수밖에 없었다. 백록을 찾은 것은 자신의 덕이 아니었건만, 그는 호종헌에게 자신의 공이라 하라고 한다. 당장 그도 지체하지 않고, 호종헌에게 즉시 보고할 편지를 쓰기 위해 서재로 향했다.

“서 사부도 와야 하나?”

“그렇습니다. 서 사부가 꼭 와야 합니다. 설령 호 도독은 오지 못한다 해도, 서 사부는 와야 합니다.”

육역이 답했다.

척계광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무엇도 묻지 않았다. 바로 그의 말을 따라 편지를 썼고, 편지는 밀랍으로 봉해져 군정 급보로 호종헌 쪽으로 보내졌다.

백록을 얻게 되었으니, 첫 걸음은 매우 순조로운 셈이었고,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일이 반드시 최대한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엄세번이 참뜻을 깨닫기 전에 호종헌은 이 백록을 성상 앞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 * *

마음에 근심이 자리 잡은 터라 육역은 척 장군이 가마로 배웅하겠다는 호의를 완곡히 거절하고, 홀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육역이 길모퉁이를 돈 순간, 그는 매우 무료한 표정의 금하가 별원 밖 돌계단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그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육역은 길모퉁이로 피하긴 했어도 어쩔 수 없이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바보 꼬맹이. 조금 전 내가 그리 매몰차게 대해 실망도 했으련만, 넌 왜 화를 낼 줄도 몰라? 여전히 날 기다리며 뭘 하는 거야?

육역은 그녀를 보면서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마도 다시 그녀를 실망시켜야 할 거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괴로움과 실망이 극에 달해 무슨 수를 써도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저 이렇게 벽에 기댄 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갑자기 그의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착한 손자야, 너 여기서 뭐 하냐?”

너무도 가까이 다가온 개숙의 커다란 얼굴이 육역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선배님…….”

육역은 한순간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어 얼떨결에 물었다.

“어떻게 나오셨습니까?”

“나는 뭐 나오면 안 되냐?”

개숙은 육역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 손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어째 좀 멍청해 보인다. 너 머리 부딪쳤냐?”

“아닙니다.”

“저 꼬맹이는 문 앞에서 널 반 시진 가량이나 기다렸는데, 넌 여기 서서 뭐 하니. 내가 다 피곤해 견딜 수가 없어.”

개숙이 육역을 잡아끌고 되돌아갔다.

“가자. 왜 빨리 안 가고 그래.”

육역은 별 도리 없이 개숙을 따라 돌아가야 했다.

금하는 그들을 보자마자 빠르게 맞이하러 나와 웃으며 물었다.

“육 대인, 백록 보셨어요? 어때요? 듣기로 백록은 상서로운 동물이라 제왕의 총명을 의미한다고 하던데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 전, 육역은 냉랭하게 말을 잘랐다.

“되었다. 아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으스대지 말거라. 이일은 지금 떠들기에는 적당치 않아. 넌 가는 곳마다 떠벌려 내 일을 망치지 마라.”

이 말은 매우 심해 금하를 넋이 나가게 했을 뿐 아니라, 개숙까지도 넋이 나가게 했다.

“아…….”

금하는 한참이 지나서야 반응하며 겸연쩍어 했다.

“알겠습니다.”

육역은 더는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 너 이 자식…….”

오히려 개숙이 이 말에 화가 잔뜩 치받아 쫓아가 욕이라도 한두 마디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금하에게 단단히 잡혔다.

“너 나 붙들고 뭐 하자는 거냐. 쟤가 방금 한 말 너도 들었잖니. 정은 정, 묘는 묘, 무슨 빈틈 하나 없잖아. 어디에 인정머리가 있더냐?”

개숙의 불만에도 금하는 손을 떼지 않고 끌어당겼다.

“아저씨는 저 상황이 아니니 그 고통을 모르세요. 대인이 요즘 근심거리가 너무 많았어요. 그런 일이 만약 아저씨나 제게 닥쳤다면, 성격상 대인보다 지금 더 탈이 났을 거예요.”

개숙이 미간을 찡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계집애. 이 못난 것 좀 보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