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어렴풋한 밤기운이 그들을 막고 있다고 해도, 금하는 변함없이 육역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넘치는 기쁨을 누를 수 없어 그를 향해 힘껏 달렸다.
그녀는 달려가는 도중, 적과 싸우고 돌아오던 잠수와 사소를 스친 것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수는 처음 금하가 환한 얼굴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맞으러 오는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그들을 본척만척할 줄이야. 경악을 금치 못하여 고개 돌려 금하가 향한 곳을 바라봤다.
“저 계집애, 어디로 달려가?”
사소도 이상하게 여겨 고개를 돌렸다.
금하는 곧장 육역의 앞까지 달렸다. 함빡 웃음 머금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오셨어요?”
“음.”
육역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손을 내밀어 금하의 볼에 붙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도 이미 왜구의 신하성 공격은 끝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멀쩡하게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진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금하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으나, 무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 가득히 기쁨이 넘쳐흘렀으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곁눈질하는 사람이 있든 없든 다가가 그의 허리를 단단히 껴안고, 온몸으로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육역 또한 팔을 뻗어 금하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댄 채 거의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만족스러운 듯, 한없이 미안하다는 듯.
“육 대인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사소가 씁쓸해 하며 쯧쯧 혀를 찼다.
“저 계집애, 사람들 많은 곳에서 조금도 자중을 못 해요.”
잠수 또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것을 보니 마음 깊은 곳이 이상하게 조금은 견디기 힘들어졌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거둔 그는 성문 위의 못 자국 개수를 세고 있었다.
조금 먼 곳에서는 남도행이 육역과 금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 숙인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고, 말의 갈기를 쓰다듬어준 그는 말을 끌고 어둠 속으로 점점 잠겨들었다.
* * *
한참이 지나서야 금하는 손을 살짝 풀었다. 그제야 그의 왼팔이 힘을 쓸 수 없음을 깨달아 급히 물었다.
“손 다쳤어요?”
“잠항에 있을 때, 화총에 살짝 스쳤어. 찰과상이야.”
육역이 두루뭉술 가볍게 얘기했다.
밤이라 그의 안색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말을 끌고 성으로 들어와 금하는 불빛에 비친 육역의 안색을 살폈다. 그제야 그의 안색이 놀랄 만큼 창백한 것을 알아차렸다.
이때가 되어서야 잠수도 달려와 인사를 했다.
“대공자!”
“먼저 돌아가 쉬는 게 어때요?”
금하는 육역이 다른 중요한 일이 남았다고 할까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그는 부상까지 입은 몸인데 어찌 견딜 수 있을까.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이슬을 밟고 길을 재촉하여 달려 왔다. 몸은 또 부상을 입은 터라 지금 육역은 거의 의지로 버티는 중이었다. 그리고 바닥난 체력은 얼마 견디지 못함을 그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금하에게 고개를 끄덕인 육역이 잠수에게 말했다.
“네 형은 경성으로 돌아가 일 처리를 하고 있다. 며칠 지나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 거라.”
이건 원래 잠수도 묻고 싶은 말이었으니, 그는 즉시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두어 걸음을 걷던 육역은 돌연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걸음은 비틀거려 서둘러 다가간 잠수가 금하를 도와 육역을 부축했다.
“대공자!”
“빨리요! 빨리 대인을 업어요.”
금하가 급히 말했다.
“팔에 부상을 입었어요. 얼른 우리 이모가 보셔야 해요.”
잠수는 육역의 부상 소리에 두말하지 않았다. 바로 그를 등에 업고는 서둘러 별원으로 달렸다. 금하 또한 빠르게 그의 뒤를 따랐다.
* * *
육역의 상처를 다시 싸 묶고서야 심 부인은 일어났다. 의료보따리를 옆에 있던 개숙에게 넘겼다.
“이모, 어때요? 심해요?”
금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이번 부상이 지난번 입은 상처에 영향을 줄까요? 예전 상처가 재발하면 어떻게 돼요?”
“계집애야.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냐?”
개숙이 의료보따리를 단단히 싸매며 말했다.
“내 보기엔 쟨 아무렇지도 않아. 자는 것도 얼마나 달게 자니. 아주 좋아. 별일 없어.”
“아저씨가 뭘 아세요. 얼굴이 종이처럼 하얀데, 어디가 좋아요!”
금하는 계속 초조해했다.
심 부인은 개숙에게 말하지 말라 눈짓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금하를 위로했다.
“팔은 화총에 다쳤으나, 다행히 탄피를 제대로 빼냈어. 상처 처리도 아주 적당하여 곪지도 않았지. 하지만 그는 이틀 내내 말을 타고 있어서 상처 아물기가 쉽지 않았던 거야. 이후로 잘 쉬고 보양하면 괜찮을 게다.”
“그런데 왜 기절했을까요?”
금하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상처 처리하며 아팠을 텐데도 깨지 않아요.”
“피곤하니 당연히 자야겠지. 원기를 잘 회복시키면, 자연히 깨어난단다.”
“정말 자고 있을 뿐이에요?”
심 부인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자고 있단다. 설마 넌 그를 깨워야 만족하겠어?”
금하는 심 부인의 명확한 말을 듣고서야 조금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침상 가에 앉았다.
“제가 지키고 있을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얼른 부르러 갈게요.”
이런 것은 사실 불필요했으나, 아무래도 금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지키게 하는 것이 나을 수 있어 심 부인은 수긍을 했고, 개숙과 방을 나갔다.
“저 아이, 내 손자에게 상당히 마음을 쓰는군.”
걷던 개숙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심 부인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도 육역의 신분을 알죠. 저는 원래 저 아이가 그와 가까워지는 걸 바라지 않았어요. 육역이 저 애에게 진심이 아니라고 우려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는 금하에게 정말 진심이군요. 아니었으면 부상당한 몸으로 이렇게 먼 길을 달려오지 않았을 거예요. 분명 왜구가 신하성을 공격한다는 얘길 듣고, 위험할까 걱정한 거겠죠.”
개숙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자네 관가 사람 좋아하지 않잖아?”
“그렇죠. 좋아하지 않아요. 정말 치가 떨리도록 미워해요.”
심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금하는 나와 다르고, 육역의 신분은 그녀를 보호할 수 있기 딱 좋아요. 아내로 맞이하면 좋고, 첩실로 삼아도 어쩔 수 없죠.”
“잠깐, 잠깐. 저 계집애 어디가 첩실이 될 재목이야.”
“그 재목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애한테는 반드시 든든한 후원자가 있어야 해요. 훗날 모든 일이 드러나면…….”
“무슨 모든 일이 드러나?”
개숙이 고개 돌려 그녀를 바라봤지만, 심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 * *
육역이 깨어났을 때, 따스한 석양은 창문을 비치고, 남은 석양빛이 방으로 스며들어 금하의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빛나게 했다.
그의 침대 가에 얼굴을 돌려 엎드린 금하는 그의 손을 잡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잠을 자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평온한 장면을 육역은 오래도록 조용히 보고 있었다. 석양이 서쪽으로 넘어가고, 마지막 남은 석양빛마저 방에서 사라졌어도, 그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으로 드물게 고요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양악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금하야, 와서 뭐라도 좀 먹어.”
그가 우선 들고 있던 쟁반을 탁자에 놓았다. 부싯돌을 들어 등잔불도 켜다가 육역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웃었다.
“육 대인, 깨셨군요!”
육역이 몸을 받쳐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금하에게 손이 잡혀 살짝 몸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양악에게는 그녀를 놀라게 하지 말라고 눈짓을 주었다.
“잠들었어요?”
양악이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니, 과연 금하는 자고 있었다. 그가 속삭이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육 대인께서 드세요. 하루 꼬박 누워계셨는데, 배고프시죠?”
육역이 고개를 저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양악에게 물었다.
“금하는 지친 것이지?”
양악이 웃어 보였다.
“왜구가 도착한 후로 잠을 못 잤어요. 그리고 대인이 기절하셔서 심하게 놀랐죠. 줄곧 돌본다고 여기서 움직이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잠 대인이 몇 번이나 교대하려고 돌아가 쉬라 해도 듣지 않았고요. 오히려 잠들 줄 생각도 못했네요. 아마 피곤을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리자, 편치 않게 몸을 뒤척이던 금하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제일 먼저 육역을 살폈다. 그런데 그는 이미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시에 정신이 든 금하가 함빡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인, 깨셨군요! 어디 불편한 곳이 있어요? 제가 얼른 이모 불러올게요.”
“난 다 좋아. 서두를 필요 없다.”
“정말 괜찮아요?”
금하는 불빛에 비친 그의 안색을 세심히 살폈다. 이전에 비해 혈색은 다소 회복했지만, 여전히 안심은 되지 않았다. 금하는 그의 이마를 만져 보고, 또 그의 맥을 짚었다.
“열은 없고, 맥박은 평온하고……. 제가 한 번 보게 혀 좀 내밀어 보세요.”
육역은 그녀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금하의 말에 정말 혀도 내밀어 그녀에게 보였으니, 만사 그녀의 말에만 무조건 따르는 중이다.
“금하야, 괴롭혀드리지 마. 육 대인 얼른 뭐 좀 드시게 해야 해.”
옆에 있던 양악은 이들의 모습을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금하가 꿈에서 방금 깨어난 듯 정신을 차리고 튀어 올랐다.
“맞다. 분명 배고프실 텐데. 얼른 좀 드세요……. 대양, 뭐 했어?”
“어죽.”
‘어’자를 들었을 뿐인데도 금하는 매우 고통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그 물고기들은 아직 다 안 먹었냐?”
“아직 멀었지. 여러 마리 절여 두었어. 나중에 튀겨 먹을 거야.”
육역이 몸을 일으켰다. 양악이 전한 겉옷을 받아 걸치고, 바닥에 내려서 탁자로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흠, 내가 없던 동안 너희는 큰돈을 벌었구나. 매일 매일 생선과 고기로 진수성찬이었나?”
금하가 그를 위해 죽을 담았다. 바람 불어 식히며 불평을 토했다.
“어디 고기가 있어요. 생선뿐이지. 이 며칠 우리는 매일매일 생선을 먹었어요. 길을 가면 고양이들이 뚫어지게 쳐다본다니까요.”
“여긴 어디지?”
육역이 보기에 방은 꾸밈이 매우 격조가 있어 관역이나 객잔은 아닌 듯했다.
“여긴 순우 가의 별원이에요. 순우 어르신이 피난을 가셔서 집사 서 할아범이 이 별원을 우리에게 먼저 살라고 내 줬죠……. 이 일은 말하자면 길어요. 먼저 드시면, 제가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육역은 먹으며 한편으로 금하가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쫑알쫑알 얘기하는 것을 전부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