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들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순우민은 어색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아예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심 부인이 맥을 짚어보시더니, 맥박이 약하지만, 평온해졌고, 분명 무사할 거래요.”
“상관 언니는요? 아직 지키고 있어요?”
“네.”
어젯밤 상관희가 비가 쏟아지듯 울던 모습이 떠올라 금하는 한숨이 나왔다.
“아예와 사가 오빠는 저렇게 마음이 안 맞는데. 온몸을 던져서 그를 구한 건 사실 상관 언니를 위해서였어. 저런 그의 마음은 돌덩이라도 뜨겁게 달굴 텐데, 하물며 사람이잖아……. 그러고 보면 아예는 예전에 그런 나쁜 일을 하고, 후에 많은 고생을 하네. 인과응보 이런 게 정말 있긴 하구나. 그렇지, 대양?”
양악이 그녀를 흘끔 보았다.
“금하 어르신, 눈앞의 일부터 신경 써라?”
“눈앞의 일? 성안에서 잠수 오라버니가 폭죽놀이용 화약까지 전부 가져와 지금은 성벽 위에 쌓아뒀잖아. 내 생각에 싸움이 시작되면, 밥 먹을 시간은 버틸 수 있어. 척 부인이 각 가정의 등잔 기름도 모두 모아 두 항아리 만들어 성벽 위에 두었어. 버틸 수 없을 때 바로 아래로 쏟아버리는 거지.”
그녀는 야금야금 음식을 다 먹었다.
“잠수 오라버니는 북진무사 출신답게 진짜 독해. 이건 그 오라버니 생각인데, 쇠사슬을 가져다 빨갛게 달궈서 왜구가 공성할 때, 아래로 내려 휘두르는 거야. 한 놈 맞힐 때마다, 한 놈 태워버릴 수 있어.”
듣고 있던 순우민이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신경 쓰고 있던 양악이 금하의 말을 제지시켰다.
* * *
이어진 이 하루는 금하가, 척 부인이, 온 신하성 사람이 진정 하루가 일 년 같음을 체험한 날이었다.
척 부인은 종일 성벽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금하는 그녀가 무언가 먹는 것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성벽 가로 밀려난 대포의 검은 몸통은 성 밖의 왜구를 조준하고 있었다. 비록 포탄은 없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제 나름의 용도가 있었다. 그곳에 버티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왜구를 겁에 떨게 할 뿐 아니라, 나중에 몇 사람이 힘을 합해 성벽에서 굴리면, 많은 왜구를 박살 낼 조화를 부릴 수도 있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성벽 위에 선 금하는 솥을 건 왜구가 밥 짓는 푸른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떠나려나, 아니면, 배불리 먹고 공성을 개시하려나?
이 하루 왜구는 움직임이 전혀 없어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성안에서는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심이 각종 억측을 낳았다.
“하루를 기다려도 원군은 오지 않았어. 아예 오지 않을 거야!”
“척 장군은 척 부인을 벌써부터 미워하고 있어서, 그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우리 모두 저 여자 때문에 죽게 돼!”
“원군은 오지 않아. 목숨을 구하려면 빨리 달아나. 저 여자한테 속아 넘어가지 마.”
아침부터 소곤소곤 속삭이는 사이로 각종 유언비어가 돌더니, 지금은 퍼지면 퍼질수록 더욱 소문의 강도가 세졌다. 처음에는 백성들 사이에서 퍼지던 것이 후에는 군인의 가족, 더 뒤로는 근위병까지도 척 부인의 눈치를 보는 것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주위는 반기를 드는 기운이 어슴푸레 차오르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사람들이 성루에서 철수하도록 부추기기 시작했고, 성벽 위 병기와 깃발을 든 병사들은 분분히 흔들렸다.
마침내 척 부인은 참을 수 없어 말로써 민심을 선동시키는 자는 체포하고 감옥에 가둬 처분을 기다리게 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원군은 지금 신하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척 부인이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척 장군께서 양절에서 왜구와 싸우신 지 오래인데, 언제 백성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그분은 말씀하시길, 무릇 나의 장병은 귀하고 생활이 유복할 것이며, 하늘의 뜻을 받아 관문을 지킬 것이요, 통솔하는 군졸은 밭은 갈지 않으나 먹을 수 있고, 천을 짜지 않으나 헐벗지 아니하고, 농상의 세금을 걷어 그를 공양하게 하고, 물의와 안락을 묻지 않고, 나라의 식량을 소모하되 실용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이는 즉, 그렇게 응축한 힘을 한순간에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척 부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활난을 제거하고, 흉포함을 달래면 민생은 따라오고, 민생이 순조로우면, 나라의 근본이 안정이 되니, 이 또한 백성을 보호하는 이유라 하였습니다. 오늘 왜구가 신하성 아래까지 쳐들어 왔는데, 척 장군은 분명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할 것이고, 그분도 우리가 버텨주길 바랄 겁니다. 원군이 도착하길 기다립시다!”
척 부인은 말을 잠시 멈추고 천천히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누군가 나의 가정사로 유언비어를 날조하였지요. 나는 여기서 단 한 번만 얘기합니다. 척 장군은 이 성에 내가 있든 없든 지원병을 보낼 겁니다. 만약 다시 간 크게도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군심을 미혹시키는 이가 있다면, 전부 왜군의 첩자로 판정해 처리하겠습니다!”
주위는 조용해졌고, 더는 함부로 지껄이는 사람이 없었다.
하늘 가, 마지막 태양 빛은 그 아래로 떨어져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 *
성벽 위의 횃불은 대단한 기세로 타오르고, 성 위와 성 아래는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척 부인은 집안에 대대로 전해지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갑옷 위로 불빛이 일렁이고, 표정은 의연했고, 어떤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을 만큼 기세는 늠름했다.
사람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꽉 쥐었고, 기수는 깃대를 꽉 움켜쥐었다. 금하의 화살통에는 그녀가 겨우 긁어 모아온 열 자루가 안 되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활을 잡은 그녀의 손에도 조금씩 땀이 배어났다.
달은 이미 중천에 걸렸고, 성루 위의 모래시계는 자시가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그때 성 밖에 주둔하는 왜구의 병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록 성벽까지 다가오진 않았으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다시 공격하려는 건가?
금하는 소리 없이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들고 활시위를 당겼다. 잠수는 묵묵히 화총에 화약을 채우고, 양악과 사소는 나란히 서서 팔뚝만 한 쇠사슬을 큰 화로에 넣었다.
높은 성루에 선 척 부인은 사람들이 까맣게 밀집한 곳을 바라보았다. 왜구의 대군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눈에는 결연함이 서렸다.
원군이 도착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이 성을 최후의 그때까지 지키겠다!
사람들이 적을 기다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필사의 일전을 치룰 각오를 하던 그때, 돌연 왜구의 대군 뒤편 밤하늘에서 한 줄기 불꽃이 터졌다. 그것은 공작의 푸른색으로 바라보는 이의 마음마저 밝게 빛냈다.
불꽃이 다 타버리기도 전, 이미 성벽 위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는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원군이 왔다! 정말 왔어!”
“척 장군이 오셨어! 척 장군이 오셨어! 기어이 오셨어!”
* * *
신하성은 함락시키지도 못했는데, 이제 또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되었으니, 왜구들은 이 싸움을 계속 끌 수가 없었다. 원래 성벽 앞으로 진격하던 대오도 철수를 시작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금하는 연신 잠수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시력 좋잖아. 빨리 봐요. 명군이 온 거죠! 깃발 보여요?”
지금은 아무리 뭐래도 밤이고, 수십 장을 떨어져 있었다. 잠수가 있는 힘을 다해 멀리 봐도 여전히 분명하게 보이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양군이 서로 마주친 곳에서 들려오는 병기 소리는 이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분명히 명군이다! 벌써 싸우고 있어!”
잠수가 확정적으로 말했다.
이제는 성벽 위의 사람들뿐 아니라, 성안의 사람들 전부 지원군이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순간 모두 마음이 탁 풀렸다.
성내 근위병을 모은 척 부인이 수비병에게 성문을 열라 명하고, 높은 소리로 말했다.
“나를 따라 성을 나가 적과 맞서라!”
성안에서 이틀 밤을 꼬박 울분을 참고 있다가 드디어 기를 펼 수 있게 된 것이다. 큰 소리로 화답한 근위병들은 무기를 들고 척 부인을 따라 왜적과 싸우기 위해 성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금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활과 화살을 옆에 놓고, 다른 이에게서 받은 낭선을 들었다. 그녀 또한 잠수와 사소의 뒤를 따라 성을 나서 적과 싸우러 가려는데, 결과는 성문도 나서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왔다.
“아저씨 절 놔주세요!”
그녀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개숙은 쯧쯧 혀를 차며 그녀를 나무랐다.
“원군이 이미 도착했어. 너 하나 없어도 부족하지 않으니, 넌 좀 끼어들지 마라. 무공은 어설프기 짝이 없으면서 꼭 사람 창피하게 해.”
“알았어요, 알았어. 안 가면 되잖아요. 아저씨가 먼저 저 놔주세요!”
개숙이 이제야 그녀를 놓아줬다.
“다른 사람이 급할 때 도와주는 거면, 나도 널 막지 않아. 하지만 좋은 일에 너까지 나서는 건 지금은 좀 생략 하자. 도검은 눈이 없어 부딪칠지도 몰라. 이젠 거의 다 되었으니, 넌 따라 다니며 성가시게 하지 마.”
“우리 이모가 아저씨 보내셨어요?”
금하가 사방을 살폈으나, 심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분은요?”
“원군이 이미 도착했다고 듣더니, 바로 돌아갔지. 나한테는 남아 널 지켜보라 하고.”
개숙이 하품을 하며 탄식했다.
“양 이틀을 제대로 잠도 못 잤다. 가자, 가자. 얼른 돌아가.”
밖에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인데, 금하는 어디도 갈 수 없이 억지로 남아야 했다.
양쪽으로 협공을 당하는 왜구는 한밤중인지라 명군이 도대체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명군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척계광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지원 왔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단시간에 참패를 했고,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목숨만 구해 도망쳐야 했다.
하반야가 되자 신하성 밖의 왜구는 죽거나, 사로잡히거나 하여 깨끗이 소탕되었다. 그리고 명군은 백 명 이상의 왜군을 사로잡았다.
명군이 지원한 장교 호수인이 말고삐를 놓고 척 부인 앞으로 나와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말장이 늦었으니, 부인 용서하십시오!”
척 부인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틀림없이 그대도 밤낮으로 달려왔을 겁니다.”
호수인이 말했다.
“왜군이 신하성으로 급히 행군한다는 소식을 받은 후, 말장이 즉시 출발하였습니다. 저는 원군이 늦을까 걱정했는데, 그때 장군께서 말씀하셨지요. 저는 서둘러 가기만 하라고요. 신하성은 반드시 별일 없을 거라고요.”
“장군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요?”
척 부인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네! 장군께서 부인이 성에 계신 한, 신하성은 최후의 순간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척 부인은 눈앞이 멍해졌다. 그러나 바로 뒤로 돌아서 옷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이 자신의 눈물을 보는 걸 원치 않았다.
꼬박 이틀 밤이었다. 어깨를 누르던 중압감, 마음의 고통 등을 척계광의 말을 들은 이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전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금하는 성문 옆에 서서 근위병들이 사로잡힌 왜구들을 성으로 압송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하성의 위급한 상황이 결국 해결되었으니, 이 며칠 그녀가 사소와 잠수 등과 힘을 쓴 것도 헛된 것은 아닌 셈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녀의 마음은 스스로에게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입술 가에 웃음기가 떠오르고 연이어 졸음이 밀려왔다. 이틀 밤을 꼬박 눈을 못 붙인 탓에 돌아가 먼저 잠을 보충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돌아섰을 때, 성문 밖에서 누군가 말을 끌고 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설핏 보였다. 그러나 금하는 너무나 피곤해서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몇 걸음 걷지 않은 그때, 그 흐릿하던 모습이 줄곧 그녀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익숙하고도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순간 금하는 제자리에 우뚝 서 넋이 나갔다.
돌연 그녀는 무언가를 깨닫고는 맹렬하게 돌아서 있는 힘껏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그다! 진짜 대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