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만약 그 자식을 맞아 뒈지게 하려 했다면, 나는 바로 머리를 까버렸어.”
사소의 어조는 가벼웠다.
그와 얘기를 하던 금하는 자신이 그의 머리를 까버리고 싶었다. 한숨을 삼킨 그녀는 돌아서 사소에게 던져진 사람을 보러 자리를 떴다.
상관희는 사소가 물에 흠뻑 젖은 것을 빼고는 다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다행이야.
그녀가 그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전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 왜구가 돌연 물속에서 튀어나왔다. 손에는 낭선을 들었고, 온몸에는 억수같이 물을 흘리며 그는 사소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때의 사소는 청박하를 등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귓가에 대고 머리를 세게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내려 했을 뿐 한순간 아무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다.
“넷째야, 조심해!”
다급히 외친 상관희가 앞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다리의 부상을 생각지 못했다. 순간 비틀거린 그녀는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그때 한 사람이 그녀를 스쳐 사소의 앞을 막았다. 바로 아예였다.
“흡!”
아예는 낭선에 찔리는 동시에 오히려 낭선을 움켜쥐었다. 힘껏 힘을 쓰며 버티고, 왜구의 왼쪽 가슴 상처를 둔중하게 가격했다.
이 왜구는 최후로 남은 힘을 써서 사소를 급습했었다. 하지만 이젠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입으로 선혈을 내뿜고 얼굴을 하늘로 젖힌 채 물속으로 쓰러졌다.
잠수는 그가 아직 죽지 않았을까 염려해 장창으로 그를 기슭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여러 번 찔러 보고, 그가 내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이번 사고는 매우 돌발적이었다. 병사들로 가장한 대오의 백성들이 죽은 후 다시 강시처럼 움직이는 왜구를 언제 본 적이나 있던가. 그들은 다들 놀라 흙빛이 된 얼굴로 먼 곳으로 피했다.
사소가 돌아서 아예를 부축했다. 그 왜구는 최후의 일격을 쓴 것으로 힘은 비할 데 없이 컸고, 아예의 상처는 심각한 상태였다. 선혈이 쉴 새 없이 밖으로 스며 나왔다.
“아예야, 아예……!”
상관희는 그가 몸을 던져 사소 대신 이 일격을 막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금 그가 중상을 입게 되니, 진작 이전의 응어리는 까맣게 잊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예는 그녀에게 가슴 아프게 웃어 보였다.
“양악이 말했어요. 내가 살아 있어야 그래도 당주를 도울 수 있다고……. 정말이었네요, 정말 잘됐어요.”
“아무 말 마요. 얼른 우리 이모 쪽으로 옮겨요!”
금하는 손에 닿는 대로 큰 옷자락을 잡아당겨 아예의 상처에 겹쳐 놓고 힘껏 눌렀다. 아예를 업은 사소는 급하게 순우 가를 향해 달렸다.
상관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오안방 당주였고, 방의 사무를 처리함에 있어 결단력이 있고 명쾌했다. 그러나 연약한 모습은 거의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런 일은 더더욱 없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을 것처럼.
“언니, 상처가 깊긴 하나, 급소를 맞진 않았어요.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거예요.”
금하도 상관희가 이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양악에게 눈짓했다.
“대양, 네가 상관 언니를 업고 돌아가. 너도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여긴 내가 뒤처리할게.”
양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부했다.
“조심해. 저 수문은 잊지 말고 다시 내려놓고.”
“알았어.”
양악과 상관희가 돌아간 후, 금하는 잠수와 힘을 합해 축을 돌렸다. 두껍고 무거운 철 수문을 다시 내렸고, 수문에 사람도 남겨 지키게 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일반 백성으로 적을 상대할 줄은 몰라, 금하는 그들에게 기교 하나를 가르쳤다.
“손을 수면에 드러난 수문 위에 놓고 있으세요. 물 아래 누군가 있어 수문을 톱질하기 시작하면, 손바닥은 바로 진동을 느낄 수 있죠.”
수문은 매우 두껍고 무거워 톱질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재빨리 사람을 보내 알려도 늦지 않았다.
적절히 조치한 후에도 금하는 여전히 물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수가 그런 금하를 보고 의심을 품었다.
“너 또 무슨 생각해?”
“사가 오빠한테 얻어맞은 그 왜구는 정말 무사히 돌아갔을까요?”
이 왜구의 생사는 원군이 올 때까지 공성계가 버틸 수 있느냐까지 달려 있었다. 금하는 매우 마음을 졸이며 강기슭을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다가 그래도 분명히 알아봐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내가 물속에 들어가 볼게요.”
그녀는 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단 한 번 깊이 숨을 들이켠 후 바닥까지 잠수해 들어갔다.
잠수는 수영을 할 줄 모르니 지금은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에겐 낯선 일이지만, 잠수는 저도 모르게 괴로워하고 있었다.
밤인 데다가 물속은 더욱 어두컴컴했다. 다행히 금하는 방위감이 매우 좋은 편으로 기억에 의지해 그 왜구가 도망간 궤적을 찾으며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잠수는 강변에서 수면을 응시하며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그러다 왜구가 시체가 되어 벌떡 일어난 그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날까 두려워졌다.
그는 족히 한참을 기다렸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
“왜 안 나와.”
이때 수면이 갈라지고 누군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나 금하뿐 아니라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끌어 올려요!”
금하는 그 사람을 물가로 끌고 왔고, 잠수가 뭍으로 끌어올린 후,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이 일그러졌다.
“죽었어!”
금하는 푹 젖은 몸으로 뭍으로 올라와 버럭 화를 냈다.
“내가 진작 사가 오빠 손은 일의 경중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분명 등 복판의 요혈을 맞췄을 거야. 이 사람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죽었어요.”
잠수는 이미 죽은 왜구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이렇게 되면, 너희들 이번 연극은 망한 거네.”
“반나절 헛고생했죠. 하……, 성 밖의 왜구는 성안에 대한 사정을 몰라요. 여차하면 다시 한 번 진공하겠죠.”
금하의 근심은 깊었다.
“성안 화약 부족해서 어쩌죠? 저들이 다시 공격하면 바로 우리 사정을 꿰뚫어 볼 텐데요.”
* * *
날이 점점 밝아왔다.
아예의 상처는 제대로 잘 처리했으나, 상처는 매우 심해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옆에서 내내 지키는 상관희는 아무 말도 없이 그를 지켜만 봤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양악, 사소와 금하는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이미 성벽으로 다시 돌아갔다.
하룻밤을 꼬박 지켰으니, 근위병들은 아직은 버틴다고 하지만 일부 백성은 힘이 들어 벌써부터 감당하기 역부족이었다.
성벽 아래쪽으로 사람의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집에 있던 부인들이 죽과 밥을 가족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
성벽의 돌계단에 기대있던 금하는 주위에서 풍기는 죽 냄새를 맡았다. 뜨거운 열기에 싸인 사람들의 얼굴을 보다보니 문득 뱃속이 텅 비었음을 느꼈다.
“척 장군이 오려면 얼마나 더 지켜야 해요?”
옆에 있던 부인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이제 하룻밤 지났는데, 원군이 올 리는 없겠죠?”
“어디서 아녀자가. 허튼소리 하지 마!”
“허튼소리 한 거 아니에요. 듣자니 척 장군은 밖에 첩도 몇 두고, 아이까지 몇이나 낳았대요. 이 척 부인은 사납고 아이를 낳을 수가 없대요. 사람들 전부 말하는데, 아마 척 장군은 일찌감치 부인이 거추장스럽다고 일부러 원군을 보내지 않는 거래요.”
“목소리 좀 낮춰! 다시 허튼소리 하지 마. 척 장군이 어찌 그런 사람이야. 당신 아녀자들이란……, 됐어, 됐어, 나 다 먹었으니, 빨리 가. 돌아가서는 함부로 쓸데없는 말 하지 마!”
“…….”
금하는 배를 감싼 채 이런 뒷말을 듣고 있었다. 성벽 위에 서 있던 척 부인의 모습이 떠올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척 부인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럼 그분의 마음은 또 얼마나 힘들까.
“원 낭자! 원 낭자!”
누군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에 금하는 일시에 정신을 차렸다. 다시 자세히 들어보니 순우민의 목소리였다.
금하는 재빨리 돌계단에서 일어섰다.
“여기 있어요!”
찬합을 든 순우민이 다소 힘들어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제가 밥을 가지고 왔어요. 양 오라버니는요?”
금하가 대답하기 전 양악이 돌계단을 내려왔다. 순우민의 목소리를 들은 그도 빠르게 다가와 그녀가 들고 있는 찬합을 받았다. 찬합은 상당히 무게가 나갔다.
“순우 아가씨,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서 하룻밤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잖아요. 배고프죠?”
순우민이 온화하게 말하며 찬합의 뚜껑을 열었다. 맛있는 냄새가 확 풍기는 것이 제일 위쪽에 노릇하게 구운 전병이 눈에 들어왔다.
금하는 이미 배고픔이 극에 달해 전병부터 집어 뜯었다. 그런데 그걸 본 양악은 정신이 멍해졌다.
“이 전병…….”
순우민은 부끄러워하며 입을 다물고 웃었다.
“제가 구웠어요. 오라버니 하는 거 몇 번 보았잖아요. 이거 좋아들 하시니, 한번 해 봤어요. 양 오라버니도 드셔보세요. 아직은 뭔가 부족하죠?”
금하는 입 안에 가득 든 전병을 꿀떡 삼키며 놀라워했다.
“순우 아가씨, 이 전병을 직접 구웠어요? 대양이 한 것보다 더 맛있어요.”
양악이 그녀를 흘끔 노려보고는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나에 대한 애정이 식었군!”
순우민이 입술을 다물고 빙긋 웃었다. 두 번째 찬합을 열어서는 죽을 담아 금하에게 주었다.
“원 낭자, 죽 좀 드세요. 목메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네네…….”
금하는 황급히 그릇을 받았고, 순우민이 자신의 것까지 담으려 하자 양악이 급하게 말했다.
“제가 할게요. 이 죽도 아가씨가 끓이셨어요?”
순우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양 오라버니가 말한 대로 죽 끓일 때, 기름 몇 방울 넣었어요. 드셔보세요. 어때요?”
이전 순우민이 종종 부엌에서 도와주긴 했어도 양악은 그녀가 자신이 평소에 무심코 한 말까지 이렇게 자세하게 기억할 줄은 사실 생각지 못했다.
양악은 다시 멍하니 굳었다.
“이게 바로 타고난 거죠.”
금하는 먹으면서도 당당히 설명했다.
“대양이 내게는 열 번을 말해도, 난 이렇게 맛있고 걸쭉한 죽을 끓일 수 없어요. 순우 아가씨를 장래 누가 아내로 맞을지, 정말 복이 많을 거예요.”
양악이 팔꿈치로 금하의 뒤통수를 툭 쳤다.
“무슨 헛소리야. 순우 아가씨는 대부호 집에 시집가실 테고, 이런 일은 전혀 할 필요가 없으셔.”
“그렇구나.”
생각하던 금하가 돌아서 헤헤 웃었다.
“그러니까 복 많은 건 우리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