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창고 앞에 선 그녀는 사람들을 쏘아보며 연이어 두 번 물었다. 거듭된 묵직한 목소리와 타고난 장중한 위엄 앞에서 누구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다리가 아파 견딜 수 없던 라오섭은 창고 문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나 척 부인을 가리켰다.
“이……, 여자가 되어 어찌…….”
척 부인은 차가운 얼음장 같은 얼굴로 그의 말을 중단시켰다.
“왜구가 코앞까지 쳐들어오고, 신하성이 이리도 위급하거늘 넌 대체 어찌된 인간이기에 지극히 진부한 고지식함으로 감히 내가 병기를 가져다 적과 싸우겠다는 뜻을 막는 것이냐! 빨리 창고 문을 열어라! 척계광이 돌아오면, 그에게 얼마든지 나를 찾아오라 해!”
그녀가 뜻밖에도 장군의 이름을 직접 부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라오섭은 그녀의 기세에 눌려 더는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일어나 군계고의 큰문을 열었다.
이 한바탕 소란을 보게 된 금하는 척 부인에게 더더욱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인, 진정한 대장부십니다!”
이 말은 어색하게 들려 사소는 그녀를 흘끔 보았다.
“칭찬이지?”
금하는 그를 거들떠도 안 보고, 마구 뛰어 척 부인을 따라 군계고로 들어갔다.
군계고 안에는 쓸 수 있는 무기가 적지 않았다. 방패부터, 칼, 창, 검, 미늘창, 활과 화살 그리고 각종 화기까지 모두 있었다. 척 부인은 유일한 대포 한 문도 성벽으로 옮기라 했고, 그런 후 남은 2, 30개의 화총도 근위병들에게 나눠주었다. 단, 화기를 받은 이는 무조건 전부 성벽 위로 올라가야 했다.
금하는 화기를 쓰지 못해 활과 화살을 고르고 화살통도 등에 멨다.
사소와 잠수는 이전 동삼에게서 뺏은 화총을 썼다. 양악에게도 한 정 남겨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은 대도, 낭선, 장창 등은 척 부인이 깨끗이 손질한 후 전부 동성 문 아래로 옮기라 했다.
자시가 되어 성 안의 육십 세 이하 남자들이 성문 아래 모였을 때, 척 부인은 젊고 힘이 있는 이들을 뽑아 무기를 배분했다. 그리고 그들 전부를 성벽으로 오르게 하여, 전투태세를 확고히 갖추고 적을 기다렸다.
* * *
금하와 일행은 짬을 내 별원으로 돌아왔다. 양악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적절히 자리를 잡아준 후 별원으로 돌아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성계!”
양악도 이 계책을 듣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이건 서책의 이야기가 아니잖냐. 그분은 제갈량이 아니고, 왜구도 사마의가 아니야.”
“되든 안 되든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 왜구는 이미 이십 리 밖에 있고, 아마 날이 밝기 전에 도착할 거야. 이 성에는 노인과 부녀, 아이뿐인데, 그들을 어디로 도망가라 해.”
금하는 조금의 낭비도 할 수 없어 양악이 잘 끓여 두었던 주양원소 네 그릇을 담아와 나눠주었다.
“넌 이 상황에서도 들어가냐?”
사소는 비록 이리 말하긴 했으나, 그 또한 두말없이 받았다.
“오빠, 이게 마지막 한 끼가 될 수도 있어.”
금하가 그에게 빨리 먹으라 재촉했고, 다른 한 그릇은 잠수에게 주었다.
잠수는 금하의 말에 순간 멍해졌다. 그리고 금하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만약 왜구가 척 부인의 공성계를 간파하여 바로 성을 공격하면, 성내의 방어 능력으로는 날이 밝을 때까지도 버티지 못한다. 그때는…….
“원 낭자는 이따 순우 아가씨에게 가서 그분을 잘 보살펴 줘.”
잠수는 침음했다.
“항주성에서 대공자께서 내게 두 사람 잘 돌보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
금하는 잠수가 말한 의도를 알아들었지만, 그를 힐끗 보았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악도 이어 말했다.
“금하야, 지금 이 상황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어. 이건 도둑이나 조몰락거리는 그런 작은 일이 아니야. 넌 어쨌든 아가씨고, 이따 내가 널 순우 아가씨 토굴로 데려다줄…….”
금하는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말을 끊었다.
“대양, 어떻게 너마저도 이런 말을 해?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게 어쨌든 아가씨라는 그런 말이잖아. 너 봐라. 지금 성벽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야? 척 부인이야!”
“척 부인은 총병의 딸로 피는 못 속여. 너야말로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마.”
양악이 말했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버지 쪽에 나는 무슨 말씀을 드리니.”
“지금 상황이 예삿일도 아니고, 대장이 여기 계셔도 날 막지 못하셔. 내가 만약 순우 아가씨처럼 닭 한 마리 붙들어 맬 힘도 없으면, 그럼 나도 포기하겠지. 하지만 내가 하찮은 무공이라도 할 수 있는 이상, 나도 오라버니들한테 폐는 끼치지 않을 거야. 게다가 나는 공문 사람이기도 한데, 넌 어떻게 당장 눈앞에 닥친 여기서 나한테 비겁한 사람이 되라 하니.”
한바탕 쏟아낸 금하는 연신 주양원소를 입에 퍼 넣으며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몹시 화가 난 모습으로 바로 자리를 떴다. 바라보던 사소가 쯧쯧 거리며 연신 혀를 찼다.
“저 계집애 성깔 한 번 대단하네!”
양악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단한 성깔이 무슨 소용이에요. 능력이 대단해야죠.”
자신의 몫을 다 먹은 잠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다행히 원 낭자의 능력이 대단치 않으니, 왜구가 공격하자마자 기절시켜서 메고 돌아옵시다.”
이런 말이 잠수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해 사소는 그를 힐끔 보았다.
“그쪽이 쟤 메고 돌아올래?”
“전 기절시키고, 그쪽이 멥니다.”
* * *
자정 무렵, 신하성의 성벽 위는 이미 서 있는 사람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맹렬히 타오르는 수십 개의 횃불은 그 빛이 칼등 위로 너울거렸고, 화총통 위 그리고 팽팽하게 긴장한 얼굴마다 일렁이는 불빛이 비쳤다.
숨소리, 그리고 횃불이 맹렬하게 타오를 때의 펄럭거리는 소리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눈은 성을 감싸고 있는 묵직한 어둠 속을 향했다. 눈빛으로 이 칠흑 같은 밤의 장막을 완전히 태울 수 있기를, 그래서 왜구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기를 그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금하는 활과 화살을 껴안은 채 성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고 쉬고 있지만, 머릿속은 미친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왜구의 군대가 성 아래 도착한 후의 여러 가능성이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순간 펼쳐졌다.
가장 좋은 상황은 당연히 왜군이 공격하기 전 원군이 도착하는 것으로 그럼 모두 크게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잘 수 있었다. 가장 나쁜 상황은 왜구가 공성계에 넘어가지 않아 강공을 퍼붓는 것이다. 그럼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남은 것은 목숨을 건 일전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지 상황은……, 왜구는 잠시 공성계에 넘어간다. 하지만, 성안에 이렇게 많은 수비 병력이 있다고 믿지 않아 성 밖에 머물며 허점을 찾는다.
허점, 허점……. 금하는 순식간에 청박하가 생각나 활과 화살을 안은 채 벌떡 일어섰다.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가 척 부인을 찾았다.
척 부인은 마침 화기의 탄약을 전부 성벽 위로 옮기라고 명령 중이었다. 왜구가 성을 공격할 때를 대비해 화기로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청박하…….”
금하는 척 부인을 끌어당겨 급하게 말했다.
“왜구는 수영을 잘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분명 성내로 잠입해 명군의 속사정을 알아보라고 청박하로 사람을 보낼 겁니다.”
척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예상해서 청박하 입구를 이중으로 막게 하고, 근위병을 보내 지키라 하였습니다.”
금하는 급히 설명했다.
“부인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셨어요. 그들이 만약 사람을 보내 명군의 속사정을 알아본다면, 우리는 상대방의 계략을 역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그들이 성안에 수비군이 많이 있다고 잘못 알게 하는 겁니다.”
“…….”
척 부인은 어리둥절해졌다.
“어떻게 역으로 이용합니까?”
금하가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여차여차 이렇게 한다며 한바탕 이야기를 풀었다.
* * *
등불이 반짝이는 깊은 밤의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마치 원소절처럼 길 양쪽의 점포에는 전부 등을 달고 오색 천을 묶었으며 각종 등롱 또한 높이 매달았다.
육역은 그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인파 중에서 어리고 작은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아이는 한곳에 서서 그를 보며 달콤하게 웃고는 돌아서 앞을 향해 걸었다.
육역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따라 갔다. 깡충깡충 뛰는 아이의 움직임은 제비처럼 유연했다.
작은 여자아이는 대부호의 집 앞에 도착했고, 손발을 함께 써 문 앞의 돌사자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또 돌사자의 입에 손을 넣어 사자가 물고 있는 석주를 열심히 휘저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집 위에 걸린 편액에서 ‘하夏’ 자가 느닷없이 눈으로 쑥 들어왔다.
육역은 돌연 눈을 뜨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꿈에서 깨어났다.
“깨셨군요.”
남도행이 가까이 다가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은밀한 말이라도 하듯 조용조용 중얼거렸다.
“왜 바보처럼 보고만 계실까? 머리는 터지지 않았는데, 다른 데 고장이 났나……. 제가 누굽니까, 알아보시겠습니까?”
뒤의 말은 육역에게 물은 것이다.
육역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남도행이 급히 그를 도와 앉혔다.
“팔에 총탄을 맞았으나, 다행히 깊은 곳을 다치진 않았습니다. 기절하셨을 때, 제가 이미 파편은 전부 제거하였지요.”
남도행이 가볍게 말하다가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물었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육역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고 오히려 물었다.
“잠항 전황은 어떠한가?”
“잠항은……?”
남도행이 빙긋 웃었다.
“대승입니다!”
육역이 즉시 한숨을 돌리고 또 이어 물었다.
“모해봉은?”
“그는 일부 왜구와 함께 가매령으로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이 잠항에는 과연 밖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더군요. 유 장군이 이미 병사를 보내 추격 중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남도행이 말했다.
“오히려 대인께서 유 장군과 왕 부사를 크게 놀라게 하셨지요. 처음에 무슨 수를 써도 도저히 대인을 찾질 못한 겁니다. 나중에는 무기고의 돌무더기 안에 깔렸을 거라고 짐작하고는 유 장군이 사람들을 데려다 돌 더미를 파냈습니다.”
그때 유대유가 성큼 걸어 들어왔다. 육역이 이미 깨어난 것을 보자마자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자네가 깨어났군. 온종일 꼬박 정신을 잃었지. 이제 깨났으니 됐어, 깨났으니……. 참, 머리는 문제없는 게지?”
“전 매우 좋습니다. 형님, 걱정할 필요 없으십니다.”
육역이 말했다. 그리고 그가 또렷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서야 유대유는 마음을 놓았다.
“그럼 됐네, 아……. 이번에 성공은 했으나, 너무도 위험했네. 무기고 폭파로 자네는 하마터면 목숨을 걸 뻔 했지. 이 은혜는 이 유대유가 가슴에 새겨 둘 걸세.”
“형님, 저를 형제로 생각하신다면, 다시는 이런 말씀 마십시오.”
육역이 웃어 보였다.
“전부 은사면갑 덕택입니다. 아니었으면, 석문 뒤로 피했다고 해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