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모해봉은 잠항 내에서 들린 화총 소리에 안색이 한순간 새파랗게 질렸다. 급히 달려온 부하가 정신없이 보고했다.
“선주께 보고합니다. 산 아래 명군이 갑자기 진공을 시작했고, 공세가 맹렬합니다. 산 위의 화기는 누군가에게 파괴된 것이 화총, 투갑총 전부 보이지 않고, 대포는 내부가 폭파되었습니다……. 산 위에 아마도 첩자가 잠입한 것 같습니다.”
다른 부하도 빠르게 달려와 보고했다.
“선주께 보고합니다. 항구로 통하는 지름길에서 형제 수십 명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모해봉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며 즉시 명령했다.
“신속히 조총대를 앞산으로 이동시켜 명군을 저격해. 사람을 데리고 무기고로 가서, 마지막 두 문의 대포도 끌어내. 그리고 남은 사람은 항내로 잠입한 명군을 전력을 다해 깨끗이 소탕한다. 절대 그들이 무기고에 접근하게 해선 안 돼!”
* * *
조금 전 화총소리는 틀림없이 모해봉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지금은 속전속결이 필요한 때로 더는 숨을 필요가 없었다. 수위를 죽여 버린 육역은 조총으로 문 자물쇠를 폭파해 열고 문짝을 걷어찼다. 그러나 실내에 보관된 물건이 그를 순간 넋이 빠지게 했다.
수비가 삼엄한 이 건물은 무기고가 아닌 왜구의 식량 저장실로 안쪽에 놓인 것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곡식, 절인 고기, 절인 생선 등이었다.
아마도 모해봉이 잠항을 사수해 오던 생활도 그리 편치는 않았을 터였다. 일단 명군의 경계를 뚫고 보급 물자를 몰래 받는 것도 매우 한계가 있을 터. 그들은 잠항에서 입고 먹는 것을 줄이며 이곳을 지켜오고 있던 것이다.
왜구는 많았고, 분명 이 단속에 복종하지 않는 이가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저장실 밖에 8명의 감시를 세워두는 것도 당연한 일일 수 있었다.
육역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 저장실이 모해봉에게는 매우 중요하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조금도 쓸모가 없었다. 남도행의 판단 착오였고, 그는 무기고를 다시 찾아야 했다.
육역은 왜구가 쫓아오기 전, 저장실에 횃불 몇 개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신속히 그곳을 떠났다.
모해봉의 명령을 받은 왜구들은 사방에서 그들을 찾는 중이다.
“여기서 흩어지자.”
육역의 이 명령 이후로는 3인이 조를 이뤄 각자 행동하게 된다. 먼저 무기고를 찾는 이가 무슨 일을 막론하고 무기고를 폭파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병사들이 명을 받아 각자 흩어진 후, 육역은 한 건물의 용마루로 뛰어올랐다. 어둠의 엄호를 받으며 진정한 무기고의 위치를 찾기 위해 은밀히 움직였다.
이미 여러 곳에서 병사들이 왜구와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육역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적은 숫자가 많고 아군은 적었다. 시간을 끌수록 유 장군은 공격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번 데려온 병사들은 전부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 상, 모해봉은 이미 앞산으로 병사를 증원했고, 남도행 쪽의 상황도 지금은 어떠한지 모른다.
그때 한 떼의 왜구가 매우 급한 걸음으로 멀지 않은 곳을 지났다. 그들은 동양어로 대화하고 있었고, 육역은 어렴풋이 ‘최후의 대포 두 문’이란 말을 알아들었다. 문득 느낌이 온 그가 신형을 가볍게 날렸다.
왜구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다. 높은 곳에 있던 육역은 몸을 숨길 겨를도 없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그런데 육역이 몸을 날려 용마루를 뛰어넘었을 때였다. 차가운 빛줄기가 허공을 가르고, 이를 빠르게 알아차린 육역이 공중제비를 하며 구사일생으로 암기를 피했다. 그러나 두 발이 다시 용마루에 닿자마자, 화총을 발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탕!
소리가 들린 곳을 파악할 틈은 없었다. 면갑으로 보호되지 않은 왼쪽 팔에서 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해지고, 비틀거리던 육역의 신형이 지붕에서 떨어졌다.
분명 왜구들은 육역이 맞은 것을 보고 그가 떨어진 곳으로 서둘러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하여 본 것은 땅 위에 흩뿌려진 혈흔 뿐,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육역은 지독한 통증을 감내하며 여전히 그 왜구 무리를 쫓고 있었다. 한쪽 옷자락을 대강 찢어 핏자국이 바닥에 남지 않게 상처를 싸맸고, 그러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움직임은 귀신처럼 빨랐다.
왜구 무리는 어느 건물 앞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석벽의 가장자리에 산세를 따라 돌을 쌓아 지은 곳이었다.
건물 앞에는 수비 둘뿐으로 저장실과 비교하면 매우 차이가 났다. 어두운 곳으로 몸을 피한 육역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이 무기고라면, 지키는 이가 너무 적어. 설마 모해봉은 누군가 무기고를 습격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그가 생각하는 사이,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영패를 꺼냈다. 수위는 확실히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그들은 양쪽으로 각각 다섯 명씩 나뉘어 문에 매달렸다. 전부 열 명이 동시에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육역은 매우 좋은 청력으로 문 뒤에서 끽끽 소리를 내며 돌고 있는 톱니바퀴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제야 모든 것을 일시에 깨달았다.
이 무기고의 문은 매우 무거워 적어도 열 명의 힘이 필요했고, 더불어 좌우 양쪽의 문을 동시에 움직여야 열 수 있던 것이다. 그러기에 모해봉은 이곳에 수위병을 겹겹이 세워 수비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었다.
문은 석문이었고, 기름칠한 경첩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돌았다. 왜구들은 온몸으로 문짝을 떠받치며 힘겹게 한 걸음씩 안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가까스로 한 사람이 빗겨 지날 수 있는 틈을 벌렸다. 그러나 마지막 두 문의 대포를 끌어내려면, 이 넓이로는 충분치 않아 왜구들은 계속하여 아주 조금씩 문을 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한창 전력으로 밀고 있을 때, 문득 사람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스쳤다. 그들은 제때에 알아차렸지만, 그 사람은 더욱 빨라 이미 무기고로 진입한 후였다.
“누구냐!”
소스라치게 놀란 왜구 둘이 즉시 앞 다투어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퍽퍽 몇 번의 소리가 들렸을 뿐, 두 사람은 나란히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땅에 쓰러졌다.
밖에 있던 왜구들은 벌컥 성을 내며 날뛰었다. 누군가 당장 화총을 꺼내어 화약과 탄약을 채워 넣다가 우두머리에게 사납게 제지당했다.
“여기선 절대 불을 켜선 안 돼!”
무기고 안에는 화기 외에도 화약 상자들이 보관되어 있다. 일단 불이 붙으면, 그 뒤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기고 안, 육역은 이들을 쫓아 계속 달려 왔고, 또 방금 왜구를 상대한 터라 상처 입은 왼팔에서는 더욱 선혈이 솟았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누르며 무기고 안을 훑어보았다.
모해봉의 지략은 빈틈이 없었다. 이 창고의 서쪽은 천연의 석벽이었고, 나머지 부분도 돌을 재료삼아 쌓아 올린 것이다. 입구의 문 외에는 창문도 없었다. 단지 석벽 높은 곳에 두 개의 통풍구가 있을 뿐이었다.
문밖에서 또 한 명의 왜구가 들어오려고 하자, 육역은 비수를 뽑았다. 날아간 비수는 바로 왜구의 목구멍에 박혔다.
“너희가 다시 들어오려 한다면, 나는 즉시 여길 불태울 것이다!”
육역이 동양어로 말하자, 바깥의 왜구들이 흠칫 굳었다. 이내 그들은 아우성처럼 고함을 질렀다.
“여길 불태워? 너도 살아나가지 못해!”
이 순간 잠항의 산 아래에서는 죽음을 무릅쓴 명군이 왜구가 겹겹이 설치한 장애물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고, 산 위에서는 남도행과 잠항으로 잠입한 병사들이 왜구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을 떠올리며 육역은 이를 악물었다. 다친 팔은 점점 더 심각하게 피가 스몄지만, 상관없었다. 육역은 무표정하게 화약 상자 하나를 비틀어 열고, 대포에 화약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펑! 펑!”
두 번의 거대한 울림이 들린 후, 뒤이어 더욱더 큰 폭발음이 따랐다. 폭파의 강한 충격에 무기고 밖 왜구들은 수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고, 어지럽게 돌덩이가 쏟아져 내리며 이내 전체 무기고가 다시 울린 폭발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 * *
퍽!
용마루에 머리를 부딪친 금하는 졸음이 일시에 싹 가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옆에 있던 잠수가 그녀를 흘끔 보았다.
“밤샘도 무리면서 굳이 와서 그러냐?”
이마가 조금 까진 것 같아 만져 보니, 약간의 축축함이 느껴졌다. 과연 손에도 피가 묻어나 금하는 근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며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 거죠. 예전에는 이삼일 새는 건 일도 아니었는데……. 얼마나 됐어요?”
“삼경 다 됐어.”
잠수가 말을 하자마자 먼 곳에서 야경을 도는 딱따기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삼경이었다. 그는 품속을 더듬어 엄지손가락 크기의 작은 도자병을 꺼내 금하에게 건넸다.
“맡아 봐. 정신이 맑아질 거다.”
금하가 받아 마개를 뽑고 맡아 보니 박하의 청향이었다.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 과연 머릿속이 아주 또렷해졌다. 그녀는 다시 마개를 잘 막아 잠수에게 돌려주며 한껏 부러워했다.
“좋은 물건이네요. 역시 금의위. 제대로 갖췄군요.”
잠수는 병을 받지 않고 어색하게 말했다.
“네가 가져라.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사람 무시하나. 나도 평소에는 필요 없어요.”
금하는 육선문이 금의위만 못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억지로 원래대로 돌려줬다. 어쩔 수 없이 받은 잠수는 한참이 지나 다시 낮은 소리로 말했다.
“듣자니 성상께서 교지를 내리셔서 유대유 군영의 총병 이하 전부를 파직하셨단다.”
“유대유?”
금하는 순간 멈칫하다가 즉시 반응했다.
“잠항에 있는 거기죠? 이일이 육대인과 관련 있어요?”
“몰라. 그런데 대공자가 그들의 안 좋은 모습을 보고했다는 소문이 있어. 원래 성상께서 한 달 내 잠항을 함락시키라는 기한을 주셨다네? 하지만 기한이 되지도 않았는데, 유대유의 직위를 거두신 거지.”
경성에 있을 때, 금하는 일찍이 대장이 유대유의 인품에 대해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항이 함락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유 장군은 몹시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대인이 어찌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해요. 우리 대인은 그런 분 아니에요.”
그녀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으니, 잠수는 뭐라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쉿……, 움직임이 있어요.”
그때 금하가 그에게 골목 안을 보라고 눈짓했다.
골목 안쪽, 미세하게 삐걱대는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동삼과 그의 아내가 나무 상자를 옮기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자는 두 사람이 들어도 매우 힘겨울 만큼 무거워 보였다.
* * *
동삼은 상자를 큰 회화나무 아래로 옮긴 후 자신의 아내를 보냈다.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 남아 상자를 지키고, 긴 담뱃대를 꺼내 뻐끔뻐끔 연기를 뿜었다. 짙은 어둠 속, 연기는 담뱃대 위로 날름날름 피어올랐다.
그가 세 번째 연초를 채워 넣을 때, 주위에 발걸음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들은 큰 회화나무 아래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당주!”
“당주!”
금하는 이 소리에 속으로 생각했다.
동삼이 원래 당주였구나.
여러 길을 거쳐 모인 이들은 이십여 명으로 옷차림도 제각각이었다. 금하가 대략 살펴 본 사람들은 정말 천태만상으로 나무꾼부터 상점 점원까지 직업이란 직업은 모두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나무 아래 전부 모인 후에야 동삼은 나무 상자를 열기 위해 몸을 굽혔다.
……바로 지금이 움직이기 가장 좋은 기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