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76)화 (176/224)

176화

달빛도 별빛도 스러진 칠흑 같은 밤.

6척의 대복선이 소리 한 점 없이 바다를 가르고 천천히 잠항의 항만을 향해 갔다. 상어 가죽의 잠수복을 입은 육역은 뱃전에 기대어 잠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같은 잠수복을 입은 남도행도 서 있었다.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바다 속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어 보였다. 어두컴컴한 해수 위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하얀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선단을 지휘하는 이는 왕숭고였다. 그리고 유대유는 이때 육로로 군대를 인솔하여 잠항을 향해 출발한 후였다.

이내 대복선은 잠항에 다가섰다. 잠항 양쪽 절벽 위에 설치된 화기의 습격을 피하고자, 왕숭고는 대복선을 잠항 밖에 세웠다. 화염방사수는 화염방사기를 조절해 방사 위치를 확정한 후, 화약을 채워 넣고 명령을 기다렸다.

선체의 엄호 하에 육역과 남도행 등은 선미 쪽에서 바다 속으로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인원 모두 상어가죽의 잠수복을 입었고, 입에는 숨을 돌릴 수 있는 두 척 길이의 갈대를 물고 있었다.

육역 일행이 뱃전 옆에서 헤엄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왕숭고의 시력으로는 수면 위로 드러난 가느다란 갈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명군이 연일 태만하고, 잠항을 한참이나 공격하지 않아서일 테지만, 잠항 내의 왜구도 상당수가 해이해졌다. 바다는 기이할 만큼 조용했고, 대복선은 잠항 밖에 일자로 정렬해 있건만, 왜구는 이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 안의 목제 모래시계에서는 모래가 조금씩 떨어져 내렸다. 왕숭고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고, 고요한 바다 깊은 곳에는 수십의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잠항 내부를 향해 접근 중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모래 한 알이 떨어진 순간, 왕숭고는 모래시계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낮고 무거운 음성이 어둠 속을 울렸다.

“발사!”

대복선 마다 이십 기의 분통화기가 배치되어, 여섯 척에는 분통화기가 모두 일백이십 기가 실렸다. 이 일백여 기의 분통화기가 잠항 내의 왜구선을 향해 동시에 발사되고, 화약은 분사되며 불을 뿜었다. 불꽃은 돛에 닿자마자 즉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해 잠항의 항만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불은 돛과 돛대, 갑판 등 사방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배를 지키던 왜구는 너무 갑작스러워 손쓸 틈도 없고, 상황도 파악하지 못해 명군과 싸울 방법을 전혀 찾지 못했다. 놀라서 황급히 배에서 뛰어내린 그들은 허둥지둥하며 항구 안으로 숨기 바빴다.

어두운 곳, 반쯤 물에 잠긴 육역은 그들이 잠항으로 들어간 입구를 눈으로 확인했다. 암벽의 움푹 팬 곳을 찾은 그가 인원을 인솔하여 뭍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들은 잠수복을 벗고 방수포로 싸둔 은사면갑으로 갈아입었다.

원래 잠항으로 통하는 입구는 큰길이었다. 그러나 명군과의 교전 후, 왜구는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해 그 길을 폐쇄했다. 그 외에 산의 절벽에 파놓은 지름길은 수비하는 이들이 지키고 있고, 길은 구불구불하게 위로 향했다. 이 역시 지키기는 쉽고, 공격은 어려운 지형이었다.

육역은 앞서 나아가며 절정의 경공을 펼쳤다. 산 절벽 가까이 붙어 앞으로 나아가면서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에는 기척 하나 없어 마치 귀신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배에 큰불이 났기에, 입구 가장 바깥의 수비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긴장한 눈으로 불에 타고 있는 배를 주시하고 있다가, 육역이 그의 눈앞에 나타나고서야 얼이 빠졌다. 미처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 그는 소리 없이 목이 비틀려 힘이 쭉 빠진 채 고꾸라졌다.

입구에서 위로 올려다보면, 내부로 들어가는 지름길은 험준하고 좁았다. 그리고 절벽 사이에는 울림이 있어 위에서 왜구가 하는 말소리가 아래에서도 매우 똑똑히 들렸다.

소리를 듣고 판별한 결과 위쪽에는 적어도 3명의 왜구가 있었다.

비수를 소매에서 꺼낸 육역이 바닥을 찍고 날아오르는 것처럼 가볍게 절벽 사이를 옮겨 다녔다. 그리고 왜구를 발견한 순간, 비수가 세차게 튀어나온 동시에 그중 한 명이 소리를 내며 땅으로 쓰러졌다.

나머지 왜구 둘은 칼을 뽑아 휘둘렀다. 그러나 육역은 한 바퀴 몸을 돌려 수월하게 두 사람 틈으로 미끄러졌고, 어떻게 힘을 썼는지 알 수도 없는 가벼운 손짓으로 그중 한 사람의 칼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칼은 회전하여 오히려 왜구의 목덜미를 향했다. 힘에 밀린 칼은 더 찔러 들어가 목덜미에서 튄 선혈이 온통 절벽 위로 튀었다.

눈 깜짝할 사이 두 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남은 이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으나, 갑자기 우뚝 몸을 굳히고 바로 앞을 향해 쓰러졌다.

쓰러진 왜구를 받쳐 든 남도행이 가볍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옆으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탄식했다.

“오호, 선재善哉라! 시주께서 내세에는 평안한 집에 다시 태어나고, 더는 이런 칼에 피를 묻히는 일을 하지 않기를 기원하오.”

“뭣하면 자네가 이들에게 재라도 올려 주지?”

육역은 왜구가 지녔던 화총을 거뒀다. 아래쪽 병사에게 던져주며 남도행을 무심히 놀렸다.

왜구들의 화총을 찾은 남도행도 자신이 사용치 않고 옆의 병사에게 전했다. 그 또한 웃으며 가볍게 답했다.

“저는 그러고 싶습니다만, 애석하게 재 올리는 법기를 안 가져왔지 뭡니까.”

다시 앞으로 나아가니 절벽 옆으로 그리 크지 않은 천연의 동굴이 있었다. 왜구가 잡다한 물건을 쌓아두는 곳으로, 배에서 가져온 수리해야 하는 방패, 갈고리, 도끼 같은 것들이 이곳에 쌓여 있었다. 절벽은 습해서 물건들도 전부 곰팡이가 슬기 시작해 독한 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육역은 인원을 이끌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걷는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 삼십 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것으로 이내 정면으로 맞닥뜨릴 것 같았다.

육역은 인원을 데리고 신속하게 철수하여 잠시 동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동굴은 크지 않았으나 다행히 매우 어두웠고, 폐기된 방패가 매우 많아 은폐물로 쓸 수 있었다.

적당히 몸을 숨긴 사람들은 일개 소대의 왜구가 줄줄이 줄을 지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발걸음이 매우 급한 것이 분명 왜선의 불을 끄러 서둘러 달려가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동굴을 지나자마자, 육역은 즉시 일행을 끌고 뛰어나와 상대가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그들을 공격했다.

좁은 산길 위로 쇠뇌 몇 발이 연달아 쏘아졌지만, 왜구는 이미 얼마 남지도 않았다.

여러 날을 별러왔던 병사들은 지금 마치 산을 나온 맹호와 같았다. 예리한 칼이 살을 베는 소리가 들리고, 선혈은 절벽 위로 낭자하게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은 왜구의 시신이 층층이 쌓였다.

소식을 전하려 돌아서 도망가던 왜구는 등에 비수를 맞아 꽥 소리와 함께 거꾸러졌다. 그를 지나치던 육역이 비수를 회수해 소매 속에 숨긴 후, 다시 빠르게 위로 향했다.

그들이 위를 향해 얼마 걷지 않아 갑자기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미 잠항 내부에 도착한 것이다.

원래 정한 계획은 그들 병사를 양쪽으로 나누어 육역이 인원 반을 이끌고 화약고를 폭파하러 가고, 남도행이 나머지 반을 이끌고 왜구가 명군의 진공에 대비하여 설치한 기관을 파괴하러 가는 것이었다.

유대유에게 신호를 쏘아 올릴 화약통은 남도행이 갖고 있었다. 기관 파괴가 성공하기만 하면, 유대유는 당장 군대를 이끌고 총공을 시작할 터였다.

“우리 한 번 겨뤄봄이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신호발사 전에 화약고가 터지면 대인이 이기는 겁니다.”

남도행이 육역에게 웃어 보였다.

“단오가 다가옵니다. 진 사람이 가흥루의 쫑즈粽子를 사는 걸로 하지요.”

육역이 빙긋 웃었다.

“좋은 생각이군, 내기 성립이야!”

두 사람은 각각의 인원을 데리고 나뉘어 자신의 임무를 시작했다.

남도행은 이전 잠항에 몰래 한 번 왔던 터라, 이번 길은 익숙한 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끄는 인원은 왜구가 기관을 설치한 방어선에 도착했다.

뒷산의 불붙은 왜선은 앞산의 왜구까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했다. 아마도 그들이 명군이 해로를 통해서는 잠항을 공격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앞산의 왜구는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였고, 허둥대는 모습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명군이 군사를 철수시켜 휴전한 지 여러 날이 지나서인지, 그래도 얼마간의 효과가 보이고 있었다. 방어선을 지키는 왜구는 수가 많지 않고, 다소 태만해진 모습까지 명백히 보인 것이다.

조금 전 뒷산의 배가 불에 탄다며 누군가 뒤쪽으로 뛰어간 것을 절벽 위의 그들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깊은 밤이기도 한 터라 야경을 서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왜구는 전부 삼삼오오 서로 기댄 채 눈을 붙이고 휴식 중이었다. 경계를 담당한 왜구도 마지못해 담에 기대어 서 있었고, 가끔은 졸기도 했다.

남도행이 손을 들어 야경을 서는 왜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졸던 왜구는 홀연히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하여 그를 바라봤다.

“피곤하시겠습니다?”

남도행이 친절하게 물었지만, 왜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왜구의 몸이 흐물거리며 쓰러져 뒤쪽의 병사에 의해 한쪽으로 끌려갔다. 그때, 남도행의 가벼운 손짓을 따라 병사들이 왜구의 방어선 안으로 일제히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막 잠에서 깨어 어리둥절한 왜구들을 벼락 치듯 신속히 처리한 후, 투갑총, 표창 등의 무기를 있는 대로 전부 산 아래로 던져버렸다. 대포 몇 문은 도저히 움직이질 않아 화약을 거꾸로 넣어 몸통을 폭파시켰다.

대포가 폭파되는 둔중한 울림이 온 잠항의 지면을 진동시켰다.

그 순간, 왜군의 우두머리인 모해봉은 항구의 선박 상황을 살피려고 움직이던 걸음을 멈췄다.

아뿔싸! 이건 명군의 성동격서(*동쪽을 치겠다고 공언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치다.) 계책일 가능성이 있어!

뒤늦게 깨달은 그는 서둘러 앞산으로 가 방어 병력을 배치했다.

검은빛의 밤하늘, 한 줄기 밝은 빛이 피잉 소리를 내며 구름을 향해 곧장 날아갔다. 이내 펑하며 터지더니, 선명하게 아름다운 청록색의 불꽃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모해봉은 고개를 들고 바라본 순간, 온몸에 두려움이 덮쳤다.

산 아래, 유대유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일시에 기쁨으로 빛났다.

신호를 본 육역도 남도행이 이미 목적을 달성했음을 알고는 살짝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기억 속의 방위도에 의지해 계속 무기고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

수비가 삼엄하군.

그들이 발견한 건물은 진정 삼엄한 수비로 8명의 왜구가 밖을 지키고 있었다. 뒷산 왜선의 화재를 보고, 앞산 대포의 폭파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지금껏 직무를 이탈하지 않았다.

분명 여기가 무기고겠군.

속으로 추측한 육역이 양쪽으로 나누라 하는 손짓을 하니, 그 뜻을 알아들은 병사들은 둘로 나뉘어 건물을 돌아서 조용히 왜구들을 포위해 나갔다.

상황을 주시하던 육역이 작은 돌 몇 개를 집어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겼다. 돌은 근처를 때렸고, 수위들의 주의를 끌었다.

“뭐야?”

수위는 고개를 내밀어 살피자마자, 칼을 든 그대로 육역에게 어두운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그리고 끙 소리 한 마디 내지도 못한 채 흐물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왜 그래?”

그가 돌아오지 않자, 다른 수위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육역이 바로 동양어로 대답했다.

“배에 불이 붙었어. 모두 얼른 가서 불을 끄라고 해! 얼른 가!”

수위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의혹을 품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중 두 사람이 머뭇거리면서도 소리가 난 육역 쪽을 향해 왔다. 다른 몇 사람은 부근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몰래 포위를 좁혀 오던 병사들이 갑자기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곳의 왜구들은 항구 입구의 왜구들보다 분명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소수로 다수를 상대함에도 조금의 열세도 보이지 않았다.

왜구 한 놈이 재빨리 옆으로 비켜 화총을 발사하려 하자, 가까이 있던 육역이 바로 비수를 날렸다. 비수는 왜구의 왼쪽 어깨에 정확히 박혔고, 손을 떤 왜구가 발사한 총알은 빗나가 처마를 맞췄다. 깨진 기와 더미가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