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왕숭고의 일처리는 효율이 매우 높았다. 그는 그날 해가 지기 전에 오십 명을 모두 선발한 후 번호를 매겨 연무장에 가지런히 줄을 세웠고, 육역이 와서 그들의 능력을 확인해볼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른 아침 육역과 유대유의 비무는 사병 대다수가 보았다. 설령 보지 않았다 해도, 그일 이후 누군가가 과장스레 떠든 얘기는 자연스럽게 군영으로 퍼졌다.
군대 내 유대유의 휘하 중에도 그와 몇 초식 이상 겨룰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연무장에 모인 눈앞의 이 오십 명은 본래 육역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해도, 그 비무 후에는 다들 은근한 탄복을 금치 못하는 중이다.
육역은 그들에게 두 명씩 짝을 지어 겨루라 한 후, 자신은 옆에서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그런 후 장점과 단점을 취합한 결과에 따라, 3인을 한 조로 묶었다.
잠항 진공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육역이 남은 기한 동안 그들의 훈련을 강화해 달라고 요구한 것 외에도, 왕숭고는 그들의 사기진작과 협심을 위하여 함께 먹고 잘 수 있게 조처를 해줬다.
이렇게 훈련하기를 여러 날.
육역은 유대유에게 배를 청하여, 몇 차례 잠항 해역의 실사를 나갔고, 자신이 몰래 잠항만까지 잠수하여 바다의 거리와 필요한 시간을 계산해냈다.
* * *
깊은 밤, 육역은 늘 그렇듯 등잔불 아래에서 남도행이 그려준 잠항 방위도를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때 문득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 와라.”
요즈음 유대유는 항상 샹쯔를 보내 말을 전하거나 물건을 전하곤 했으니, 지금 문을 두드린 것도 샹쯔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문을 밀고 들어오는 이의 발걸음 소리가 차이가 있었다. 평소 샹쯔의 소리와 다르다는 생각에 육역이 시선을 들었다.
―― 군복을 입은 남도행이 육역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육역을 바라보았다.
평소 남도행은 항상 도사의 포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 사병의 옷인 청포에 황색 전포를 입고, 머리에는 단정하게 흑색 챙 모자를 쓰고 있으니, 지금은 조금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자네……, 이번에는 유가군에 들어갔나?”
육역이 웃으며 물었다.
웃던 남도행도 육역이 부르길 기다리지도 않고 알아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제가 기왕 육 대인의 수레가 되기로 하였는데, 이번 잠항 잠입에 제가 안 가면 도리가 아니지요.”
“자네 어찌 알았나?”
육역이 순간 주춤했다. 이일은 그, 유대유와 왕숭고 셋 외에는 아는 이가 없었다. 훈련 중인 오십 명의 병사들도 자신들이 대체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몰랐다.
“잠항 방위도를 그릴 때 저도 이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대인께서 인원을 선발하시고, 바다도 몇 번 나가신 것을 보다보니, 대략 대인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지요.”
남도행이 탁자 위의 방위도를 보고는 손으로 몇 군데를 찍었다.
“이곳의 감시가 가장 엄밀하여, 당시 저는 접근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짐작으로는 이곳이 분명 무기와 탄약 창고일 겁니다.”
정신을 집중한 육역이 지도를 살폈다. 그의 손가락은 탁자 위를 연달아 두드렸다.
만약 화약고를 폭파하여 왜구의 탄약 공급을 끊을 수 있다면, 진공하는 명군의 사상자를 크게 줄일 수 있을 터였다.
“저를 데려가십시오. 제가 그곳을 폭파하겠습니다!”
남도행이 육역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육역은 희미하게 눈썹을 세우며 웃었다.
“흠, 자넬 안 데려간다면, 나는 이 무기고를 폭파하지 못한다는 말로 들리는군?”
남도행도 웃어보였다.
“설마 대인과 저도 연무장에 가서 비무를 한 판 해야 데려가실 수 있는 겁니까?”
콩알만큼 작게 타고 있는 등잔불 아래, 육역은 남도행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자넨 알아야 해. 내가 자네를 남기는 건 더 큰 쓸모를 위해서야.”
“저야 당연히 알지요. 하지만 대인을 잃으면, 거침없이 쳐들어가 일당백 할 수 있는 저란 수레도 힘을 써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남도행이 정색했고, 육역은 여전히 침묵했다.
생각에 잠겼던 남도행이 다시 말했다.
“어린 아가씨는 신하성에서 대인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육역이 그를 흘끔 바라 봤다. 시선이 마주친 남도행이 웃으며 말했다.
“착하고 어린 아가씨를 너무 오래 그리 두지 마십시오.”
“무슨 실없는 소리를.”
육역은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리고 남도행은 여전히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항 잠입은 지극히 위험합니다. 하지만 대인과 제 무공으로 제대로 호흡을 맞추고, 서로를 보호하며 안전하게 물러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요. 형님, 우리가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육역이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려는 순간, 다시 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샹쯔의 음성이었다.
“육 대인, 장군께서 대막사로 와주십사 하십니다.”
육역은 대답 후, 남도행을 흘끔 바라봤다. 이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다.
“따라오게. 유 장군에게 얼굴을 알려야지. 아니면, 사람들은 자네를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첩자인가 의심할 거야.”
그가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당연히 승낙의 의미였다. 소망을 이룬 남도행은 웃으며 일어나 그를 따라 대막사로 향해 갔다.
* * *
유대유는 성격이 원래 소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그렇기에 평소 대막사 안은 더럽고 무질서하다 할 순 없어도, 그렇다고 깔끔하다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막사로 들어가자마자 육역마저도 놀랐다. 막사 안은 이쪽저쪽에 한 무더기씩 갑옷이 쌓여있어 들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유대유는 마치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된 것처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그 난장판 안에 앉아 있었다.
“동생, 얼른 와서 내가 무슨 좋은 물건을 손에 넣었는지 봐!”
유대유가 육역을 보자마자 웃으며 말했다. 육역은 갑옷 하나를 들어 자세히 살폈다.
“이것은……, 은사면갑이군요?”
“과연 물건을 알아보는군!”
유대유가 활짝 웃었다.
“내가 어렵사리 수십 장을 손에 넣었어. 마침 이번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보통의 면갑(*면직으로 만든 전투복. 호신용.)은 일곱 근의 면사를 써 만드는 것으로 겹저고리 안에 천을 넣고, 굵은 실로 단단히 꿰매어 물에 담가 적신다. 그런 후 다시 꺼내 바닥에 깔고, 발로 밟아 모양을 잡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이상 팽창을 막기 위해, 햇볕에 말린 후 거둬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면갑은 비를 맞아도 무거워지지 않고, 곰팡이가 슬지 않으며 조총으로는 크게 상처입힐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은사면갑이란 면사에 은사를 넣어 짠 천으로 만든 것으로 가볍고 얇으나, 견고함은 오히려 크게 향상된 제품으로 근거리의 조총으로는 구멍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만드는 비용 또한 매우 비쌌다.
이번에 유대유는 이 은사면갑을 손에 넣기 위해 분명 많은 비용이 들었으리라.
“형님, 은자가 좀 있으셨습니까?”
육역이 물었으나, 유대유는 자세한 내막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은자 얘긴 안 해. 먼저 말해. 이거 좋아, 안 좋아?”
“당연히 좋습니다.”
육역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좋으면 됐어! 이따가 다들 오라 해서 몸에 맞나 보게 입어보라 해. 고칠 곳이 있으면, 얼른 해야 해.”
유대유는 얘기를 하는 도중 육역을 따라온 사람이 은갑을 입어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눈에 상대는 매우 낯선 이였다.
“누구냐?”
은갑 안에서 머리를 쑥 내민 남도행이 유대유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랫동안 유 장군의 명성을 들어 흠모해왔습니다. 영웅호걸의 기개를 지닌 장군을 오늘 뵙게 되어 소생 대단한 존경심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유대유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육역을 바라봤다. 눈빛이 말하는 뜻은 명확했다.
이놈은 어디서 온 놈이야?
육역이 마침 면갑을 다 입은 남도행을 잡아끌었다.
“장군, 지도를 제게 그려 주기 위해 특별히 잠항 잠입의 모험을 한 친구가 바로 이 사람입니다.”
잠항에 잠입하고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평범한 이는 아니다. 유대유는 즉시 남도행을 다른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외람되지만, 귀하의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황송합니다만, 모두가 형제이니, 저를 친근히 소남이라 부르시면 됩니다.”
남도행이 면갑의 허리를 정리하고 유대유에게 물었다.
“이번에 저도 육 대인을 따라 잠항으로 갑니다. 한 벌 입어도 되겠지요?”
멈칫하던 유대유가 즉시 말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다른 사병들이 은사면갑을 입어보는 사이, 육역은 왕숭고를 한쪽으로 불러 조용히 물었다.
“이 은사면갑의 값이 많이 나갈 텐데, 장군께서는 어디에서 은자가 나셨습니까?”
왕숭고는 대답에 주저했다.
“그건……, 육 대인 묻지 마십시오. 장군께서도 제게 말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육역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제가 알기로 내려온 은자는 전부 화기를 사들였고, 그것마저도 부족했습니다. 장군의 재정은 지극히 어려울 때인데, 설마 출처 불명의 은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왕숭고가 놀라 펄쩍 뛰었다.
“은자는 정말 출처 깨끗한 겁니다.”
육역은 그를 응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왕숭고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잠항으로 가겠다고 한 그날부터, 장군은 줄곧 이 일로 신경을 쓰셨습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주무셨죠. 이 은자는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보검을 팔아 마련한 것입니다. 그 검은 집안에 몇 대를 전해졌고, 이미 그분 댁에서 가장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죠.”
유대유가 이 일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팔 줄 생각지 못했다. 육역은 마음 깊은 곳이 감동으로 지르르 울렸다.
“어디에 파셨습니까?”
“저는 이미 말을 많이 했으니, 더 묻지 마십시오. 장군께는 그분만의 긍지가 있으십니다. 육 대인은 그분의 정만 받아들이시면 되고, 이래야 장군께서도 마음이 편하십니다.”
왕숭고는 육역이 더 물을까 염려해 급하게 공수를 하고 군무를 한다며 바쁘게 뛰어 갔다.
대막사 안의 유대유는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사병들이 은사면갑을 입어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육역은 온갖 감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든 화약고를 폭파하여 잠항을 단숨에 손에 넣어야 한다.
육역의 눈빛은 더없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