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74)화 (174/224)

174화

“육 첨사, 육 첨사?”

그가 넋이 나가 멍해 있자, 왕숭고가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불렀다.

육역은 정신이 돌아왔어도 한순간 얼굴의 깊은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를 본 유대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지. 오늘은 어렵사리 마련된 화통한 술자리인데, 이런 지나치게 애정에 몰두한 얘기는 말하지 않아도 그만이야. 괜히 흥만 깼어. 자! 다시 한 사발 비워!”

지금은 양정만의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다시 추스른 육역은 술 한 사발을 가득 따라 존경을 표하고는 단숨에 마셔 버렸다.

이렇게 육역이 술도 단번에 비우고, 거절이나 머뭇대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니, 유대유의 기쁨은 감출 수 없이 커졌다.

“시원시원하군! 군대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야. 지금껏 내가 서먹하게 대했지만, 오늘 육 첨사만 괜찮다면, 내가 자네를 형제로 삼으려는데, 생각이 어떤가?”

유대유의 말을 듣자마자, 옆에 있던 왕숭고는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아. 느낌이 안 좋아.

육역이 어떤 신분인가. 금의위 최고지휘사 육병의 아들로 밖에는 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들로 당장이라도 대막사부터 해변까지 줄을 세울 수 있었다. 장군이 취흥에 젖어 이런 말을 하였으니, 육역의 마음은 분명 불쾌할 터였다. 게다가 대놓고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어찌 난감한 장면이 아닐 수 있나.

왕숭고가 원만한 수습을 위해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육역이 술 사발을 놓고 일어났다.

하, 진짜 안 좋아!

왕숭고는 또 한 번 저도 모르게 외쳤다. 육역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찰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옷차림을 가다듬은 육역이 유대유에게 공경의 술잔을 올리는 게 아닌가.

“형님께서 윗분이시니, 제 술 한잔을 먼저 받으십시오!”

이렇게 명쾌한 육역의 말과 행동은 유대유의 성격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그는 당장 손을 뻗어 육역을 붙들고는 크게 웃었다.

“좋다! 열정이 가득하여 마시는 차가운 술은 한 방울 한 방울이 마음을 적셔 영원히 기억된다고 했지. 우리 두 사람은 오늘 예로 구애받지 말고, 술로써 맹세하여 생사를 함께 하는 형제의 연을 맺는 거야!”

“형님! 이제 우린 형제가 되었으니, 저는 형님을 허물없이 대하겠습니다. 동생에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서슴지 말고 말하게!”

“제가 인원을 인솔하여 잠항에 잠입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형님의 잠항 공격을 돕겠습니다!”

육역이 강조하듯 거듭 말했지만, 유대유는 그가 원하는 것이 결국은 이 일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여 멍하니 굳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였어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옆에 있던 왕숭고는 이 계책을 미리 듣지 못한 터라 이 대화를 들어도 알아듣지 못했다.

“잠항 잠입이요?”

이내 육역이 왕숭고에게 전체 계획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왕숭고는 이제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바로 일어난 그는 해안방비도를 찾아 대복선 화염분사기의 사정거리와 항구의 깊이를 계산해 보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장군, 이건 정말 좋은 계책입니다!”

유대유라고 이것이 좋은 생각이란 것을 어찌 모를까. 다만…….

이들을 이끄는 이는 무공이 반드시 고강해야 했다. 이곳 군에서 유대유를 제외한다면 무공으로 따져서는 육역이 바로 가장 최고의 인선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그는 출신이 금의위이니, 종적을 감추거나 근접 격투를 하는 등의 기술이 다른 이보다 월등히 뛰어남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육 첨사는 갈 수 없습니다!”

왕숭고가 미안한 표정으로 육역을 바라봤다.

“첨사께 만약 사고라도 나면, 우리는 위쪽에 해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장군, 제가 가겠습니다!”

하지만 유대유는 왕숭고에게도 고개를 저었다.

“군대 통솔을 말하면, 자네는 훌륭한 장수이지. 하지만 각개전투 능력을 말한다면……. 라오왕, 자네는 이 일에는 끼지 말고, 날 도와 군영에서 무공이 뛰어난 이 오십 명을 선발해 주게. 내가 직접 병사를 인솔하지.”

“장군께서 어찌 가십니까!”

“형님은 가실 수 없으십니다!”

육역과 왕숭고 동시에 유대유의 말을 가로막았다.

“형님은 일군의 최고 지휘관입니다. 형님이 안 계시면, 어찌 군대의 사기가 안정되겠습니까. 설령 안팎에서 서로 호응할 수 있다 하더라도 잠항을 함락시키는 것은 여전히 고생스러운 일이고, 형님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셔야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고, 용기를 불러일으켜 적을 무찌르게 할 수 있습니다.”

육역의 말은 정당한 논리를 갖췄으니, 유대유는 전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왕숭고도 옆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쳤다.

“바로 이 겁니다. 이 이유 때문이지요! 장군께선 어찌된 상황이든 가실 수 없습니다.”

유대유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형님께선 설마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아닐세.”

“그럼 원인은 제 아버님이시군요. 그래서 저를 무시하시는 겁니다.”

유대유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언제 자넬 무시했다고! 단지……, 자네한테 사고가 생기면, 우리가 춘부장께 말씀드리기가 어렵다는 거지.”

“형님, 이 군영에 병사가 얼마나 있습니까?”

육역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 묻자, 유대유는 어리둥절해졌다.

“……이만 육천 명일세. 왜 그러나?”

“말씀해 보시죠. 이 이만 육천 명 중 아버지 없는 이가 있습니까?”

육역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들은 나아가 싸울 수 있는데, 왜 저는 안 됩니까? 형님은 저를 얕보실 뿐 아니라, 제 아버지도 무시하시는군요.”

“그게 아니지. 나는…….”

“제가 형님을 존경하는 것은 형님께서 개인의 득실을 따지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온힘을 다하심이 좋기 때문입니다. 어찌 오늘 형님께서는 잠항의 공격이 아니라, 제가 형님께 엮이게 될까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육역이 다시 극단적인 해결방법으로 직설을 해버렸다. 그의 말에 부끄러워진 유대유가 갑자기 일어섰다.

“내 훌륭한 아우여! 오늘 자네가 이렇게까지 얘기했으니, 나는 이 임무를 자네에게 맡기지!”

“장군…….”

왕숭고는 유대유를 막을 수 없었고, 육역은 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왕 부사, 마음 놓으십시오. 이일은 제가 아버님께 서신을 쓸 것입니다. 제게 불의의 변고가 생긴다 해도, 절대 다른 이를 끌어들이지 않을 겁니다.”

육역이 이리도 세심하게 생각하는지라 왕숭고도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제가 반드시 가장 실력 좋은 이들로 뽑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큰일을 정한 세 사람은 그릇을 맞부딪히며 술을 실컷 마셨다. 마음은 기쁨에 들떴고,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 * *

밤이 깊어 갔다. 침상에 누운 육역은 엎치락뒤치락할 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꼬리를 무는 건 해로를 통한 잠항 잠입뿐 아니라, 유대유가 한 말들 때문이기도 했다.

양정만과 심 부인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로, 이것은 심 부인이 양정만이 양악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은 후 왜 생각을 바꾸어 남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왜 유난히 금하에게 마음을 쓸까? 양악이 아니라?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이유가 있을까?

유대유의 말에 의하면, 양정만이 흠모하던 이는 임가의 큰딸, 바로 하장청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이런 걸 보면, 당시 하가의 변고에 대해 그는 분명히 내막을 알고 있을 테고, 그 테두리 안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 수 있다.

그가 북진무사에 갇힌 일과 정말 관계가 있을까?

아랫방 침상에서 자던 잠복은 안쪽 육역이 뒤척이는 소리에 설핏 깨났다. 육역이 오랫동안 잠들지 못하니, 이내 불을 켜고 들어가 물었다.

“대공자, 술 드신 게 불편하신 겁니까? 제가 가서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해 올릴까요?”

육역이 일어나 앉고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

잠복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그저 물에 적신 수건을 짜서 건네줬을 뿐이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한동안 덮고 있자니, 몽롱하던 머릿속도 제법 깨어난 것 같았다. 육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필을 준비해.”

잠복은 어리둥절했으나 차마 더 묻지 못하고, 지필을 준비했다.

그리고 육역은 편지 한 통을 다 쓴 후 밀랍으로 봉하여 그에게 내줬다.

“날이 밝자마자, 너는 다시 경성으로 가거라. 이 서신을 가져다 내 아버님께 드려. 그런 후, 나는 네게 비밀리에 한 가지 일을 조사시키려 한다.”

육역의 어조는 매우 진중하였다.

“어떤 일입니까?”

“양정만이 십여 년 전 어떤 연유로 북진무사에 잡혀 들어갔는지,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 또 풀려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육역이 당부했다.

“꼭 기억할 것은 이 일은 반드시 비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거야. 누구도 눈치 채게 해선 안 돼.”

잠복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양정만의 자료는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안에 없던가요?”

“그의 자료는 누군가에게 일정 부분 고의로 폐기되었다.”

술의 뒤끝이 좋지 않아, 육역은 통증이 이는 미간을 꾹 눌렀다.

“기억해. 반드시 비밀로 진행해서 아버지께 들키지 않도록 해.”

“게, 게다가 어르신마저 속여야 합니까?”

잠복이 말을 조금 더듬거렸다.

“그래. 내 짐작으론 고의로 자료를 폐기한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이실 거야.”

“어르신께서는…….”

“그리고 경성에서 넌 다시 남경부로 가 하장청 일가 사람들을 조사해라. 크고 작은 것 가리지 말고, 하장청부터 그의 부인, 집안의 가복, 내왕하던 친척과 친구까지 모조리 조사해. 자세할수록 좋아.”

잠복은 이것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대공자 어찌 하장청을 떠올리셨습니까? 그가 잠항과 관계가 있는지요?”

“이것엔 내 나름의 필요한 이유가 있어. 이 두 가지 일은 반드시 신중하고 조심해서 해야 한다는 걸 기억해라. 절대 남에게 발각되어선 안 돼.”

“소관 알겠습니다.”

허나 자신이 가버리면 육역 혼자 이곳에 남게 되는 것이다. 잠복은 마음이 매우 불안해졌다.

“대공자, 여긴 어디까지나 군영입니다. 바로 잠항과 전투가 시작될 텐데, 저를 보내시면 주변에 사람 하나 없는데, 어떡하시려고요?”

“넌 언제 이렇게 시시콜콜 전부 따지는 잔소리쟁이로 변했더냐.”

육역은 이제 다른 말은 접고 재촉했다.

“일찍 쉬거라. 내일 아침 일찍 넌 길을 서둘러야 해.”

그의 명령을 거역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잠복은 여전히 마음 또한 놓지 못해 불안한 눈초리로 육역을 바라보았다

“대공자, 계획을 짜시는 것도 괜찮고, 다 괜찮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관병이 아니고 전투는 그들의 일입니다. 대공자께선 절대 전쟁터로 가실 수 없습니다. 제가 어르신께 말씀드려야 할 것은…….”

“걱정 마라. 내게도 계획이 있다.”

육역이 하품하는 척을 하고, 그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잠복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