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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72)화 (172/224)

172화

원래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육역 자신이 잠항으로 잠입하려 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남도행이 그 생각을 알게 되었다.

3일 전 그는 자신이 잠항에서 돌아오길 기다려 달라는 소식을 창문을 통해 육역에게 남겼고, 오늘에서야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남도행이 단신으로 어찌 잠입했는지는 육역이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떤 어렵고 위험한 일을 겪었는지 또한 육역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잠항 내부와 왜구의 주요 기계 장치에 대한 상세한 도면을 이렇게 그려 넘겨줬다는 것뿐이었다.

조용히 타오르는 등불 아래, 육역은 탁자 위에 도면을 펼쳤다.

산을 따라 곳곳에 지어진 울타리, 어두운 곳에 숨겨진 각종 화기 등은 각각의 위치마다 화기의 종류와 사정거리에 대한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었다.

이 화기의 위치 역시 지독하리만큼 교묘하여 명군이 잠항 앞에 겹겹의 시신을 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되었다.

육역은 하룻밤 꼬박 지새며 지도를 보았고 하룻밤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상당히 잔인한 결론에 도달했다.

……명군이 돌발스러운 유격전으로 공격한다 해도 잠항은 여전히 함락시킬 수 없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육역은 도면을 품속에 넣은 채 대막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 앞으로 대막사가 몇십 보가량 남았을 때, 막사의 장막을 걷고 유대유가 안에서 나왔다.

온전히 쉬고 있던 이 며칠도 유대유는 쉴 수 없었다. 전쟁 걱정으로 마음이 불안한 그는 이곳에서 밤을 보내며 작전 방안을 연구하곤 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피로가 가득한 얼굴을 사납게 문지르다가 문득 육역이 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먼빛으로 공수하는 육역을 보며 유대유는 먼저 다가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또 하지 않았다.

“장군?”

육역이 넌지시 눈치를 살피니, 유대유가 결국은 입을 열었다.

“오늘까지 이미 9일을 충분히 쉬었소. 내 보기에 때가 거의 된 것 같아.”

“장군 서두르지 마십시오. 장군과 이 일을 상의하고자 왔습니다.”

육역이 안으로 청하는 손짓을 하자, 유대유는 그를 따라 다시 대막사로 들어갔다. 그러자 육역이 품속의 도면을 꺼내 유대유에게 전했다.

“이게…….”

유대유는 도면을 몇 번이나 뚫어지게 보았다. 미간은 점점 더 심하게 뒤틀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무언가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도면은 어디에서 구했소?”

“제 아끼는 벗이 제가 잠항 전쟁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알고는 저 대신 잠항에 잠입하는 모험을 감수했지요. 그리고 이 도면을 그려 제게 준 겁니다.”

유대유도 잠항에 잠입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나 대신 자네 벗에게 전해주시게. 나 유대유가 그에게 은혜를 빚졌다고……. 도면상의 주석을 자네는 정확하다고 믿을 수 있나?”

육역이 말했다.

“저는 그를 믿습니다.”

유대유는 침묵에 잠긴 채 아주 오래도록 도면을 들여다보았다. 오랜 출정의 경험상 그는 분명히 알아차렸다. 일단 명군이 기습적으로 강공을 퍼붓는다 해도, 화기가 있는 한 사상자는 무수히 많아질 것이고, 잠항 공략은 여전히 희망이 없었다.

“도면을 봤으니, 자네도 이 전투는 이기지 못함을 분명 알겠지.”

그가 육역을 바라봤고, 육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장군을 찾은 것은 장군과 이 일을 상의하기 위해섭니다. 고민을 해보았습니다만, 명군이 순조롭게 산을 공격하려면, 오직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야만 가능합니다.”

“안팎에서 서로 호응을 한다?”

유대유가 순간 주춤거렸다.

“잠항에 수십 명을 잠입시켜 잠항 내부는 큰 혼란을 일으키고, 또 봉화 연기를 신호로 진공하는 명군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을 하면, 단번에 잠항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육역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수십 명?”

유대유가 고개를 저었다.

“잠항에 잠입하는 것은 절정의 경공 고수라야만 왜적의 이목을 피할 수 있고, 멀고 험난한 길을 넘어 들어갈 수 있지. 군사 중에 무예가 고강한 이가 비록 있긴 하나, 경공이 훌륭한 이는 매우 적어. 접근하자마자 왜구에게 발각될 걸세.”

“멀고 험난한 길을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잠수에 능한 이를 찾으면 됩니다.”

육역이 그에게 설명했다.

“제가 잠항의 항만을 살펴보니, 여러 척의 전함이 정박해있고 전함에는 항상 왜구가 타고 있습니다. 이 항만과 잠항 내부는 반드시 통하는 통로가 있을 것이고, 우리는 이곳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로로 상륙한 다음 다시 통로를 찾는다?”

유대유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수십 명의 목표로는 너무 과해. 매우 쉽게 발각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왜구는 통로를 닫을 것이고, 이 수십 명은 번쩍이며 드러난 과녁이 되지 않겠나. 헛된 죽음이 될 뿐이지.”

“이 부분은 저도 고민했습니다. 대복선 화염분사기의 사정거리는 수십 장에 이르죠. 그걸 이용해 항만 내에 정박한 왜선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배에 불이 붙으면, 왜구는 분명 배를 버리고 잠항 안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그때 이 혼란을 틈타 잠항 내로 잠입할 수 있습니다.”

육역은 이 일에 대해선 이미 자세하게 구상해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유대유의 머릿속은 이 전술을 반복해서 검토하고 있었다. 흠잡을 데가 없다고 말할 순 없으나, 지금으로선 확실히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수십 명이 잠항에 잠입하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일일세. 일을 마치고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네.”

유대유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오를 이끌 사람은 어떻게 뽑을까. 그에게는 이것 역시 문제였다.

이때 육역이 일어나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가 재능은 부족하나, 무공을 배웠고, 수영도 괜찮습니다. 장군께서 제게 사람들을 데리고 잠항에 잠입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자네!”

크게 놀란 유대유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내 어찌 자네에게 위험을 무릅쓰라 하겠나.”

“장군께선 제 무공이 너무 모자라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육역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무슨…….”

육역이 유대유의 말을 막고, 명쾌하게 답했다.

“장군도 저도 모두 무예를 익힌 사람들이니, 연무장에서 실력을 보셔도 무방합니다. 제가 만약 장군을 이기면, 장군께선 제가 사람을 이끌고 잠항에 잠입하도록 허락하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유대유는 이양흠(*명대, 항왜 명장. 장이곤丈二棍의 창시자.)을 스승으로 모셔 그에게 검술을 배웠고,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로 숭산 소림사의 무승조차 그에게 패한 전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육역이 자신과 무예를 겨루겠다고 하니, 젊은 사람이 위아래를 모른다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와 비무를 하려는가?”

그가 물었다.

“정말입니다.”

“그래, 좋군!”

유대유가 승낙했다.

“자네가 나를 이긴다면, 방금 자네의 말대로 하게. 단, 자네가 진다면, 이의 없이 반드시 내 처분을 따라야 해.”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육역이 설핏 웃어 보였다.

* * *

연일 쉬던 중이었으니, 관병들도 한가로이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장군과 저 금의위 어른께서 연무장에서 무공을 겨룬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러니 밥 한 끼 먹을 시간도 지나지 않아 커다란 연무장 주변은 물 샐 틈도 없이 병사들로 둘러싸였다. 다리가 불편한 병사까지도 지팡이를 짚고 달려와 이 북적거림에 한몫 보탰다.

잠복은 간신히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온몸은 벌써 진땀이 가득 흐르고 마음은 조마조마 견딜 수가 없었다.

육역은 어젯밤 저 도면을 받은 이후, 그에게 무슨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공자가 등불 앞에 앉아 밤을 새웠다는 것만 알 뿐, 대공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대공자가 갑자기 왜 유 장군과 비무를 하려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육역은 나이가 새파랗게 젊은 데다 경성의 공자이니, 비록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했다 해도, 아마 무공은 깊이가 깊지 않을 것이다. 유대유는 그 생각을 해서인지 옷조차 갈아입지 않았다. 상당히 편한 마음으로 병기대 앞에 선 그가 육역이 먼저 병기를 고르라며 손짓을 했다.

“장군께서 형초장검을 잘 쓰심을 압니다. 그러나 진정 정통한 것은 곤법(*곤봉술.)이시죠.”

육역이 빙긋 웃으며 장곤 하나를 집었다.

“장군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을!”

유대유도 장곤 하나를 집었다.

소식을 들은 왕숭고도 달려와 둘러싼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연무장 안을 바라보았다.

큰일이군. 유 장군 성격이 직선적이라 육 첨사와 불쾌한 일을 만드신 모양이야. 그렇다고 연무장에서 따지기를 하시다니.

그는 단지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육역과 유대유가 비무를 위해 연무장에 섰다.

각자 봉 하나씩 들고 일장의 거리로 떨어진 두 사람은 발을 살짝 엇갈려 자세를 잡았다.

유대유는 그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육역은 어쨌든 육병의 아들이고, 비록 그를 이겨야 하나 그의 체면도 살려줘야 했다. 그러니 그와 몇 초쯤은 겨뤄줘야 그를 가르쳐 줬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방어 자세는 취할 것도 없이, 유대유의 손에서 모양을 그리며 휘둘러지던 장곤이 육역의 정면을 파고 들어가 상대의 봉을 때렸다.

육역은 몸을 빗겨 물러났고, 곤봉 끝을 타고 내려와 깎아내듯 그의 손을 내리쳤다. 그러자 유대유는 몸을 뒤집어 뛰어올랐다. 육역은 희작과지(*喜鹊过枝 왼발로 뛰어올라 허공을 차고 곤봉을 내리치는 초식.)의 초식으로 봉을 타고 올라 봉과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유대유가 어떤 수로 뛰고 피하든 그는 끝까지 육역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원래 유대유는 육역과 대략 몇 초만 겨룰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특히 육역의 경공은 매우 훌륭하여, 장곤의 초식은 그의 손에서 더욱더 정교하고 빠르게 변하여 그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를 따돌리지 못한 유대유는 나아가기 위해 오히려 뒤로 물러섰고, 마전참초(*유대유가 쓴 검경의 초식 중 한 가지.)를 시전하여 연이어 삼보를 나아가 육역을 압박했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몇 초를 겨뤘다. 왕숭고는 유대유가 든 봉의 기세가 한 수 접어준다는 뜻으로 살짝 누그러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결코 의견 충돌로 벌어진 비무가 아님이 분명해졌으니 그 또한 어느새 마음을 놓았다.

주위 관병들은 으르렁거리듯 고함을 질렀으며, 자신의 장군을 성원하는 기세는 드높고 세찼다. 물론 거기 섞인 잠복은 매우 불만스러웠다. 유감스럽지만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그 혼자만 목이 찢어지라 자신의 편 이기라 외친다고 해서, 무수한 관병의 함성은 누르지 못한다. 그는 잔뜩 불만 서린 얼굴로 연무장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연무장 위에선 유대유가 육역을 바라보며 웃었다.

“실력이 좋군, 한 번 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손에 든 봉을 회전시키며 다섯 보를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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