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옷을 갈아입고 나온 척 부인은 계집종 한 명을 데리고 금하와 잠수를 따라 별원에 도착했다.
“이 사람입니다!”
잠수가 나서서 나뭇간 구석에 움츠리고 있던 왜구를 끌어냈다. 또한 입을 틀어막았던 거친 천을 빼낸 후 척 부인에게 말했다.
“이자는 암기에 능합니다. 어제도 입안에 은침을 3개나 숨겼었죠.”
금하는 정성스럽게 척 부인을 위한 걸상을 가져다주어 그녀가 편히 앉아 왜구를 심문하도록 했다.
“넌 누구냐? 어디서 왔지? 신하성에 와서 뭘 했지?”
척 부인은 동양어를 써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구는 동양어를 듣더니 넋이 나가 입을 벌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중얼중얼 말을 꺼냈다.
호기심이 생긴 금하가 물었다.
“그가 뭐래요?”
척 부인은 손짓으로 금하를 제지했다. 동양어로 계속하여 왜구에게 물었고,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해 나갔다. 금하와 잠수는 한쪽에 우뚝 서 있지만,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여 매우 초조해졌다.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척 부인의 미간은 점점 더 일그러지고, 눈빛이 점차 날카로워졌다.
왜구가 천천히 한마디 말로 말을 끝낸 후, 돌연 척 부인이 벌떡 일어섰다. 옆에 있던 나무 장대를 들고는 왜구의 정면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척 부인이 이렇게 불같은 성미일 거라고는 잠수마저 결코 생각지 못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급히 출수하여 척 부인을 막았다.
“간신히 잡은 사람입니다, 부인. 결코 쉽게 때려죽일 수는 없습니다.”
금하가 잠수의 뒤를 이어 설득시켰다.
매섭게 장대를 팽개친 척 부인이 노여움을 터트렸다.
“이자가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으니, 피 좀 보여줘야 해요!”
“그렇다면 부인, 제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잠수가 그 참에 비수를 뽑아 들었다.
“전 우선 이자의 다리 인대를 끊죠. 그래도 말하지 않으면, 바로 그의 손목 인대를 끊어 버리고…….”
“아주 좋군요!”
여러 해를 왜구와 싸워오며 척 부인의 왜구에 대한 원한은 골수에 사무쳤다. 냉소하던 그녀는 왜구를 향해 돌아서 잠수의 말을 전했다.
왜구의 안색은 당장 확 변했다. 그는 무술을 익힌 사람이었고, 손발의 인대를 자른 후에는 자신이 폐인이 될 거라는 것을 당연히 알았다. 매일 걷고, 먹는 생활의 모든 것 또한 문제가 된다.
잠수는 불필요한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단단히 묶인 왜구는 숨을 곳도 전혀 없었다.
잠수는 왜구에게 다가가 그의 발을 들었다. 한쪽 신발을 벗긴 그가 날카로운 칼날을 왜구의 발뒤꿈치에 대고는 사선으로 바로 꽂았다.
돌연 왜구의 비명은 별원을 가득 채웠다. 지극히 처량한 소리가 듣는 이의 머리털을 바짝 곤두세웠다.
“됐어요.”
그제야 척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가 진실을 말하겠답니다. 모든 일을 다 말하겠다네요.”
비수는 이미 복사뼈까지 파고들었으니, 여차하면 발 인대를 끊어 버릴 수 있다. 잠수는 비수를 서둘러 뽑지 않고 고개 돌려 다시 물었다.
“정말 말하겠답니까? 아니면, 우선 하나 잘라버려서 겁 좀 줄까요?”
금하는 아무래도 아가씨였으니, 왜구의 얼굴 가득 떠오른 공포와 절망을 보고는 마음이 약해졌다.
“그러지 마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먼저 들어보죠. 만약 우릴 속이면, 다시 처리해도 늦지 않아요.”
척 부인도 금하의 의견에 동의했다.
“급할 건 없어요. 우선 얘기하게 하죠.”
잠수는 왜구를 두렵게 하려고 비수를 의도적으로 천천히 뽑았다.
주르륵 연신 흐르는 선혈에 왜구는 발 인대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깨달아 안도의 한숨을 한껏 내쉬었다. 이런 경험까지 하게 된 이상, 그는 감히 더는 숨길 수 없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윽고 그의 말을 다 들은 척부인은 안색이 무거워지고,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부인 그가 무슨 말을 했던가요?”
참다못한 금하가 다시 물었다.
“그가 말했습니다.”
척 부인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일전 태주를 급습했던 왜구가 며칠 내로 돌아와 신하성을 공격할 거랍니다. 동삼이 바로 성안에 있던 내부 첩자예요.”
역시 그랬구나.
금하가 급하게 물었다.
“성안에는 모두 몇 명의 왜구가 있는데요?”
“그의 말로는 동삼 수하로 대략 삼십여 명이 있다 해요. 이 사람들은 그도 알지 못하고, 동삼 혼자 그들과 연락한답니다.”
척 부인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신하성 안에 뜻밖에도 왜구 삼십여 명이 숨어 있었다. 성안의 구석구석 흩어진 그들은 동삼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지금 척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급히 태주로 갔다. 대군이 출발한 지 이미 수일이 되었고, 성안에는 약간의 근위병과 명군의 가족, 그리고 일반 백성만이 남았다. 지킬 능력이 전혀 없는 그들은 왜구가 공격해 오고 게다가 내부 첩자까지 있다면, 신하성을 손에 넣기란 매우 쉬운 일이 될 수 있다.
“이 일은 즉각 서신을 날려 반드시 장군께 알려야 합니다!”
척 부인이 고개를 돌려 계집종에게 분부했다.
“즉시 부로 돌아가자!”
일이 이리 위급할 줄은 생각도 못 한 채, 잠수는 동삼을 잡아 들여 그에게 패거리를 불라고 하면 일망타진이 쉽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금하만이 그 자리에 선 채 넋이 나갔다. 머릿속에는 그녀가 며칠간 신하성에서 본 이들의 모습만 반복하여 떠오르고 있었다. 노인과 부녀, 아이들, 그리고 한 떼의 패잔병…….
왜구는 대체 무슨 득이 있어 태주를 버리고 여길 공격하려 하지?
“동삼을 잡으러 가는 건 어때?”
잠수가 그녀에게 물었다. 금하는 그제야 깊은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어 척 부인을 쫓아갔다.
“부인, 잠시만요!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걸음을 멈춘 척 부인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부인, 외람되지만 감히 제 추측으로 이건 왜구가 쓰는 조호이산(*적을 유인해 내다.)의 수법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척 장군께서 돌아와 신하성을 구하게 하고, 그들은 그 틈을 타 태주를 공격하려는 거예요.”
금하의 말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졌다.
“지금 성안에는 명군의 가족이 매우 많고, 게다가 부인도 여기 계십니다. 여긴 바로 군대의 사기가 달린 곳으로 신하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바로 척 장군의 관심을 끌고 그분을 혼란케 하는 겁니다.”
이 말에 척 부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이것 역시 그대의 추측일 뿐이죠.”
“추측뿐만은 아닙니다. 부인, 태주를 공격한 왜구는 몇 명이었습니까?”
“이만여 명입니다.”
“지금의 신하성이라면 왜군 이만 병력으로는 열 개의 신하성이라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안팎으로의 협력을 위해 성안 곳곳에 첩자를 심어야 했었죠. 제가 감히 추측건대 신하성 공격을 위해 오는 왜구의 병력은 매우 적을 겁니다. 게다가 적군의 주력도 아닐 테고요.”
그녀의 말은 매우 일리가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척 부인은 돌아서 나뭇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녀는 왜구에게 연이어 몇 마디를 물었으나, 왜구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는 단지 동삼과의 연락만 맡고 있을 뿐으로 다른 상황은 모릅니다.”
척 부인이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비수를 꺼낸 잠수가 왜구에게 냉랭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자가 모른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쩌면 입이 굳어서 그런 걸 수도 있고요.”
잠수는 말하는 사이 이미 몸을 굽혔다. 칼날은 은광을 번뜩이자마자 왜구의 발목을 파고들었다.
도망가려 해도 왜구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연거푸 쉰 목소리로 울부짖을 뿐이었고, 눈물까지 펑펑 흘렸다.
“됐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자의 말은 진실입니다.”
척 부인이 말했다.
“군에 관련된 상황이라면, 가장 윗선의 장교들만 알고 있을 뿐 아마 그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잠수는 원래 그에게 겁만 주려고 했었다. 그러니 비수는 그의 발목을 얕지도, 깊지도 않게 상처를 냈을 뿐 그의 인대를 끊지는 않았다.
지금의 형세는 명확지 않았다. 마치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앞에 놓인 두 개의 길은 모두 단정 지을 수 없는 모호함이 있었다.
만약 척 장군에게 군대를 끌고 와 구해줄 것을 요청한다면, 왜구의 조호이산 계략에 정확히 걸려들어 태주가 함락될 가능성이 있었다.
또 만약 척 장군에게 군대를 끌고 와 구해달라고 요청하지 않는다면, 신하성은 함락되고, 백성은 곤경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성안 명군의 가족은 붙잡히거나 도살될 것이고, 그럼 군대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두 갈래의 길은 확실히 어려운 선택으로 금하도 매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금하의 고민과 달리, 잠수는 일행의 안전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는 만약 왜구가 정말로 성을 공격하면, 어찌 그들을 성에서 내보내야 좋을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 두 사람과 비교하여, 척 부인은 오히려 마음의 결단이 선 것 같았다.
그녀가 금하에게 물었다.
“동삼은 어디에 삽니까?”
“청박하 강변의 작은 골목이에요. 부인, 그의 주위에는 패거리가 있을 겁니다. 만약 경솔히 그를 붙잡으면, 섣불리 풀을 건드려서 뱀을 놀라게 하는 것과 같아 남은 삼십여 명은 붙잡기가 힘이 듭니다.”
금하가 그녀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린 동삼을 주도면밀하게 감시할 수 있습니다. 그가 소집령을 내리길 기다려서 그때 패거리를 일망타진하시죠!”
“이 계획도 매우 좋군요.”
잠수의 말에 척 부인이 동의했다.
“제 쪽에는 호위병 일부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잠 대인, 제가 그들을 그대에게 지원할 테니, 절대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반드시 전부 다 잡으세요.”
“소관 잘 알겠습니다.”
잠수가 공수하며 답했다.
“부인, 척 장군 쪽에는…….”
“전, 원 포쾌의 추측을 포함하여 사실대로 말할 겁니다.”
금하의 물음에 척 부인이 답했다.
“지원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선, 장군께서 스스로 결정하실 겁니다. 우리는 성안에서 성을 잘 지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성을 지킬 준비!”
잠수는 헉하며 한기를 들이마셨다.
“부인께서는 장군이 태주를 중히 여겨 지원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외람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조롭게 왜구의 첩자를 잡는다 해도, 지금 신하성의 병력으로 보아선 왜구 이천만 갖고도 신하성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선 성을 지키고, 성을 지키지 못한다면, 시가전을 벌일 겁니다. 집 하나하나 굳게 지켜나가야죠.”
척 부인의 어조는 결연했다.
“이 성안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명군의 가족입니다. 차라리 죽을지언정 절대 왜군에게 포로로 잡힐 수는 없는 일이죠.”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이런 단호함과 결연함을 금하는 지금껏 누구에게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녀는 넋이 나가 척 부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