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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57)화 (157/224)

157화

금하가 와르르 말을 쏟아내니, 아예는 끼어들어가 말을 할 틈이 전혀 없었다. 가까스로 그녀가 말을 끝내서 그도 뭔 말을 하려는데 바로 사소가 옆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나가서 먹을 것 좀 사 올게. 너희는 뭐 먹고 싶냐?”

사소가 건성으로 물었다.

강을 건넌 후로 사람들 모두 먹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별원의 주방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온기 하나 없이 황량했다. 항아리에는 먹을 게 하나도 없었고, 지금 당장은 주방을 쓸 수가 없었다. 내일이 되어 쌀과 면, 식재료들을 제대로 갖춘 후에야 밥을 짓고, 요리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우리 아저씨, 이모랑 순우 아가씨 다들 배가 고플 거야.”

금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빠, 거리로 나가서 훈툰 매대를 찾아 그 매대를 갖고 오라 해. 그럼 우리는 여기서 바로 먹는 거지. 신선하고, 따끈따끈하고. 어때, 좋겠지.”

사소는 일리 있다는 생각으로 재빨리 뛰어나갔다. 그때 머리를 내민 개숙이 금하를 불렀다.

“조카딸, 네 이모가 부르신다.”

“갈게요, 가…….”

금하는 부랴부랴 그쪽으로 가려다가 아예가 아직도 기둥처럼 서 있는 걸 보고는 그에게 당부했다.

“이 방에서 묵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요. 이따가 우리 이모가 침놓으러 오실 텐데, 정말 아무데나 돌아다니지 마요.”

그 사이 또 개숙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하는 무슨 중요한 일일까 싶어 급하게 뛰어갔고, 아예는 그렇게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금하가 그에게 배정한 방은 바로 상관희의 옆방이었다. 이건 금하의 고의일 수도 있다. 그 의도를 의심한 아예는 한동안 묵묵히 섰다가 걸음을 옮기려 했다. 바로 그때 상관희의 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 아금 아우님이죠?”

아예는 멍하니 굳었다. 앞으로 두어 걸음 걸어 다가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어렵사리 답했다.

“예, 저예요. 오늘, 오늘…….”

그는 말을 잇지 못하는데, 상관희의 말이 바로 들렸다.

“오늘은 내가 추태를 부리고, 무례한 점이 많았어요. 아금 아우님은 마음에 두지 말아요.”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아예가 연이어 부인했다.

“제가 나쁜 겁니다. 아가씨를 휘말리게 해 다쳤잖아요.”

“내 재주가 미숙한 것을 어떻게 아우님 탓을 해요.”

잠시 멈췄던 상관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심 부인께서 의가 출신이라고 들었어요. 의술에 매우 뛰어나셔서 내 다리도 그분이 치료해 주시고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맞아요. 그분이 계시니, 아가씨는 반드시 아주 빠르게 완쾌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편히 요양하면 돼요.”

아예는 창 밖에서 얘기하고, 창 안의 상관희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

“그분이 계시니, 아우님 상처도 좋아질 거예요.”

“맞아요. 저도 알아요.”

좋아질 거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돌려 말하면서도 결국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아예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들었고, 이렇게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속에는 따뜻한 것이 졸졸 거리며 흘러가는 듯했다.

물론 그는 지금 상관희가 자신이 바로 아예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본능적으로 그녀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위로를 전해줬으니, 당연히 그는 그녀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상관 아가씨, 편히 쉬세요. 저는 먼저 방으로 갑니다.”

그는 창 안의 따뜻한 불빛을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용기를 끌어 올렸다.

“제, 제 방은 바로 옆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거나 벽을 두드리세요. 제가 대신 심 부인을 불러드릴게요.”

“좋아요. 고마워요.”

아예는 아쉬움이 남은 눈빛으로 창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상에 기대 누웠다.

며칠 전만 해도 이번 생에는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와 이렇게 벽을 맞대고 마주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 그의 행운은 참으로 정점에 이른 게 아닐까.

* * *

금하는 개숙이 한바탕 불러대며 재촉해서 심 부인에게 무슨 중요한 일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었다. 급한 마음에 심 부인의 방으로 달려갔는데, 심 부인은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모습으로 마침 연자줏빛 저고리의 섬세한 주름을 펴고 있었다.

“이모, 무슨 일로 찾으셨어요?”

“이리 와. 이 저고리가 맞는지 입어봐.”

심 부인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크거나 작으면 내가 저녁에 다시 고칠 거야.”

망설이며 다가간 금하는 탁자 위의 바느질 상자와 침대 위의 보자기까지 슬쩍 훑었다. 방에 들어온 심 부인이 보따리 정리도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옷부터 바느질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금하는 감동도 감동이지만,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도 했다. 요즘 심 부인이 그녀에게 잘하는 것은 어딘지 정도를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게 이 일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개숙을 바라보며 한 마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개숙이 콜록콜록 두어 번 기침을 했다.

“또 있지. 너희 대양한테 내가 배고프다고 좀 말해.”

“여기 먹을거리가 없어서 대양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아저씨는 그냥 계속 배고픈 채로 있으세요.”

그녀는 두 팔을 양쪽으로 활짝 펴보였다.

“너 이 양심도 없는 자식.”

개숙이 그녀의 이마를 찌르는 몸짓을 했고, 금하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내가 필요할 때는 말끝마다 아저씨, 아저씨하며 아양 떨며 불러놓고, 지금은 내가 죽든 말든 상관 없다 이거지. 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어떻게 일러바치나 보라고.”

금하는 헤헤 웃으며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제 말씀은요. 조금 더 참으시면 된다고요. 사가 오빠가 그 일로 나갔어요. 이따 아저씨께는 훈툰을 매대째 가져다드릴게요. 그때 파, 새우, 김까지 아저씨는 전부 2인분 드릴게요.”

“파, 새우, 김 같은 걸 2인분 주면, 내 이 틈새에 다 끼잖니. 훈툰을 2인분 주란 말이야.”

개숙이 한창 불평하며 따지는데, 심 부인이 가볍게 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들어오지 마요.”

심 부인의 말에 개숙은 끽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꽉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건들거리며 양악을 찾아갔다.

먹을 거리가 없다해도 부엌의 양악은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선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와 물항아리를 깨끗이 닦았고, 다시 물을 길어와 가득 채웠다. 그런 후 솥을 닦고, 아궁이 안의 재를 청소했다. 다행히 땔감이 조금 남아서 불을 피워 물을 끓였다.

“여기 아이들 중에 네가 가장 부지런하구나.”

개숙이 장작 두 개를 가지고 들어와 말을 거니, 양악이 바라보며 웃었다.

“선배님, 온종일 피곤하셨을 텐데 왜 쉬지 않고 나오셨어요?”

“내가 무슨. 네가 힘들지.”

개숙이 장작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장작불이 비쳐 새빨개진 양악의 얼굴을 곁눈질로 보면서 짐짓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금하 그 아이는 옷 입어보라고 이모한테 불려갔지. 내가 이따가 너 도와주라고 잡아 오마.”

“괜찮습니다. 여긴 할 일 없어요.”

양악이 재빨리 말했다.

“선배님도 가서 쉬세요. 물 끓으면, 제가 가져갈게요.”

“괜찮아, 괜찮아. 나도 한가해.”

개숙은 부뚜막 가 한쪽에 기대 앉았다. 전혀 갈 생각이 없는 눈치였으니, 아무리 둔한 양악이라도 무슨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떠보듯이 물었다.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응……, 너는 정직한 아이지. 하는 말마다 엉터리인 금하 그 아이 같지 않아.”

개숙은 우선 양악의 칭찬을 한바탕 하고서야 은밀하게 물었다.

“네 이모가 너와 무슨 얘길 한 적이 있니?”

“제 이모요?”

양악은 어리둥절해 졌다.

“어…… 심 부인 말씀이시군요. 근데 저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대요?”

양악은 그가 물은 의도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답답한 개숙은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넌 그니가 특히 금하에게 잘해준다는 걸 못 느꼈니?”

“아, 잘해주시죠.”

양악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금하는 말을 아주 잘하고, 사람을 정말 즐겁게 해줘요. 별로 특별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

진짜 이 돌대가리.

개숙이 내심 이를 악물었다.

“심 부인이 네게 물어본 것이 없어? 아니면 금하에 관한 것도?”

아궁이 안으로 땔감을 집어넣던 양악은 미안한 눈빛으로 개숙을 바라봤다.

“몇 마디 했지만,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이라 저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기억도 안 나요.”

“넌…….”

개숙은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이 어떻게 육선문의 포쾌가 될 수 있었나 대체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녀석 아버지가 포두였다. 어쩐지. 일시에 더욱 불만이 쌓인 개숙은 홱 돌아서 가버렸다.

양악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여전히 침착하게 불을 때고 있었다.

한참 후, 금하가 훈툰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뜨거울 때 얼른 먹어. 한 그릇으로 부족하겠다. 한 그릇 더 가져올게.”

“잠깐만.”

금하를 부른 양악은 우선 그녀가 입고 있는 연자줏빛의 저고리를 살펴보았다.

“심 부인께서 네게 옷을 만들어 주셨어?”

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 옷에 부엌의 재가 묻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에게 미간을 찡그려 보였다.

“넌 그분이 내게 잘하시는 게 어딘지 정도를 벗어나는 느낌 안 들어?”

“이상한 게 나만은 아닌가 봐. 네 아저씨도 날 찾아오셨어. 심 부인이 내게 뭔가 알아봤는지 물으시더라.”

양악이 말했다.

“넌 어떻게 말했는데?”

“나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 너랑 다시 얘기해 보려고 그분에겐 대충 말해 넘겼어.”

금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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