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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55)화 (155/224)

155화

숨도 쉴 수 없는 아픔이 밀려들어 그녀는 땅에 반쯤 무릎을 꿇었다.

아, 안 돼…….

감출 수 없는 후회가 뼈저리게 밀려들었다. 아예는 그녀가 다친 것에 분노하며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자신의 공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음도, 왜구를 막을 수 없음도 분명 알고 있었다.

지켜보던 금하는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다리 부상이 이제 막 나은 터라 그녀는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았다. 심 부인마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강한 힘으로 붙들고 있어 금하는 그녀의 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안 돼. 넌 못 가!”

심 부인은 당신의 팔이 부러져도 손을 놓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나 상관희와 순우민 모두 다치자, 금하는 견딜 수 없이 초조하고 다급해졌다.

“이모, 저 좀 빨리 놓아주세요!”

“안 돼! 난 다시는 널 죽게 할 수 없어!”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은, 사람을 두렵게 하는 외모에 분노까지 더해진 아예의 모습이 보는 것만으로도 동양인의 속을 덜덜 떨게 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예가 그들을 상대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마침내 광담 홀로 왜구 둘을 처치하고 아예를 도우러 달려들었다. 때마침 사제들도 도착하여, 긴 장대가 어지러이 허공을 휘저었다. 더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왜구는 기어이 다친 이는 다친 이대로, 죽은 이는 죽은 이대로 꼼짝 못 하고 붙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심 부인은 이때서야 금하를 놓아줘, 그녀는 튕기듯 뛰어나갔다.

“상관 언니 어떠세요?”

금하게 애타고 절박하게 물었다. 마침 사소도 다급히 달려왔다.

“누나!”

광담이 먼저 지혈을 위해 상관희의 혈도를 눌렀다. 안색이 창백해진 상관희가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찰과상에 불과해요. 넷째야, 별것 아닌 일에 너무 놀라지 마.”

그러나 금하는 조금 전 뼈가 보일 만큼 깊이 팬 상처를 분명히 보았다. 결코 찰과상이라 할 수 없었고, 칼에는 독이 발려 있을 수도 있었다.

“이모, 이모……. 오셔서 상관 언니 좀 봐주세요.”

금하는 돌아서 심 부인에게 간청했다.

심 부인도 지금은 거절하지 않았다. 의료꾸러미를 들고 다가와 웅크리고 앉아 상관희의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비록 상관희가 그들의 사매였으나, 그래도 여자였다. 광담 등의 무승들은 쓸데없는 오해를 피해 등을 돌렸다. 오로지 사소만이 지대한 관심으로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광담이 잡아끌고서야 그는 뒤늦게 깨달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또 한 명, 아예는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 그는 말없이 삿갓을 주워 쓰고는 살짝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원 낭자, 여기!”

잠수가 소리를 높여 금하를 불렀다. 금하가 재빨리 달려가니, 그는 순우민의 계집종을 일으키고 있었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순우민은 그 아래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죽었어.”

잠수가 계집종의 목 부분에 손을 댔다. 이미 맥박은 뛰지 않았다.

“그럼 순우 낭자는?”

금하는 긴장한 눈빛으로 피를 흠뻑 뒤집어쓴 순우민을 바라봤다. 그녀가 어디에 상처 입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금하도 그녀에게 감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만약 순우 낭자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대공자에게는 어찌 말해야 하나.

미간을 잔뜩 찡그린 잠수는 우선 순우민의 맥박을 살폈다. 그리고 순간 한숨을 돌렸다.

“아직 살아 있어.”

금하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며칠을 함께 지내온 순우민은 다소 여린 면이 있어도 성격이 매우 좋았다. 게다가 그녀는 육역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으니, 정으로나 도리로나 그녀는 순우민을 잘 챙겨줘야 했었다.

“상처라도 입었나, 원 포쾌가 좀 봐.”

아무래도 확인이 어려운 잠수는 일어나 등을 돌렸다. 대신 금하가 순우민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세심히 확인했다.

“몸에는 상처가 없고, 옷도 찢어진 곳이 없어요. 아가씨한테 묻은 피는 전부 계집종의 피가 분명해요.”

“그럼 아가씨는 왜…….”

의아함이 서린 금하의 말에 잠수도 돌아섰다. 대화를 하는 사이, 그들은 거의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순우민은 피를 보면 혼절하는 병이 있다. 게다가 과도하게 놀라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분명 혼절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한꺼번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인중을 꼬집으면 깨울 수 있어.”

잠수가 금하에게 눈짓했으나, 금하는 망설였다. 옆에 있는 계집종의 시신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잠수와 다시 얘기를 나눴다.

“이번에 깨우면, 아마 또 기절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잠시 더 기절하게 두죠.”

“아니…….”

잠수는 방법으로는 그다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으나, 금하의 말이 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 *

물 샐 틈 하나 없을 것 같이 사람으로 빽빽하던 나루터는 다들 뒤죽박죽으로 엉켜 도망쳐 이젠 텅 비어 버렸다.

남소림의 무승들은 부상자를 처치하고, 죽은 자를 질서정연하게 묻었다. 심지어 왜구의 시신마저도 같은 모습으로 적절히 매장했다.

그들을 다 묻은 후, 광담은 사형제들과 함께 무덤 앞에서 경을 읽어 기도를 올렸다.

“왜구한테까지 경을 읽어줘야 해?”

이해할 수 없다는 금하에게 사소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사형은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됐다……. 나도 이해 안 가.”

심 부인은 상관희의 상처를 치료하고 단단히 묶은 후 재차 당부했다.

“상처가 매우 깊어 며칠 정양이 필요해요. 그리고 땅을 밟지 않아야 경맥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상관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저는…….”

이때 경 읽기가 끝난 광담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상관 사매, 우리가 절로 데려다줄게. 아니면, 양주로 돌아가고 싶나?”

“저 한 사람 다친 건데요. 어찌 사형들께 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상관희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왜란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으니, 저는 당분간 양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 혼자서 이 부근에서 지낼 수 있어요. 상처가 나으면 사형들을 찾아가겠습니다.”

듣고 있던 금하가 제안했다.

“상관 언니, 강을 건너면 바로 신하성이에요. 우리와 함께 신하성으로 가는 건 어때요? 사형들도 안심하실 텐데요?”

광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매우 좋지. 신하성은 척 장군의 군대가 주둔하는 곳이야. 적절한 훈련으로 성 내에 질서가 잘 잡혀 있다고 하더군. 사매는 거기 남아서 요양하고 있어. 며칠이 지나면 우리도 사매를 찾아올 수 있을 거야.”

이리저리 생각을 해 봐도 가장 적당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상관희도 사형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되었으니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사소가 광담에게 말했다.

“대사형, 제가 누나와 신하성에 남겠습니다. 돌보는 이가 있는 게 낫죠.”

“넷째야…….”

상관희는 사소가 남겠다고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단 사소의 성격은 사나운 불같았고, 또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요즈음 사형들을 따라다니며 왜구들을 소탕하다 보니, 그는 말할 필요도 없이 활력이 넘치고 기개가 늠름해졌다.

사소는 상관희가 하려는 말을 막았다.

“난 누나 잘 보살펴야 해. 만약 잘못이라도 생겨 봐. 우리 아버지가 분명 내 다리를 부러뜨리실걸. 이번엔 내가 같이 남는 거로 정해.”

그래. 어르신의 꾸짖음을 걱정하는 거였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씁쓸함이 떠올라 상관희는 엷게 웃었다.

* * *

순우민이 아득한 느낌으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품이 넓은 겉옷을 두른 채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시선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심지어 평온하기까지 했다. 그리 많던 피난민들은 사라지고, 무승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금하 같은 이들은 나룻배 위로 행장을 옮기고 있었다.

설마 조금 전엔 한바탕 헛꿈을 꾼 거야?

그녀는 천천히 몸을 바로 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순우 아가씨, 깼군요. 마침 배를 탈 때가 됐어요.”

양악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 오라버니…….”

순우민은 좌우를 둘러보며 자신의 계집종과 할멈을 찾으려고 했다.

“그들은요?”

양악은 난처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가씨의 계집종은 왜구에게 죽었어요. 할멈은 우리도 찾지 못했고요. 아마 조금 전 혼란할 때 엇갈린 듯해요.”

“왜구에게 죽어요!”

순우민의 머릿속은 여전히 멍멍했다.

그럼 일어난 모든 일들이 꿈이 아니다. 왜구가 달려든 것은 사실이고, 칼로 베인 것 역시 사실이고, 계집종 벽아의 몸에서 피가 흩뿌려져 그녀의 온몸에 쏟아진 것, 이 전부가 사실이었다.

“벽아가 죽었어…….”

흔들거리던 그녀의 몸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양악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내 재빨리 손을 거뒀다.

“우리가 이미 그녀를 잘 묻어줬어요. 숲 가이고, 표시도 해 놔서 그녀의 가족이 나중에 데리고 가고 싶다 해도 찾을 수 있어요……. 금하야, 얼른 와!”

마지막 한 마디는 배 옆의 금하를 향해 소리친 것이었다.

순우민이 깬 것을 본 금하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순우 아가씨, 깨났군요.”

순우민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슬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벽아가 묻힌 곳에 내가 가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금하는 순우민을 부축하고 숲 가로 갔다. 그녀는 처음 있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무덤을 가리켰다.

“바로 여기에 묻었어요. 옆쪽의 나무에 표시를 새겨뒀고요. 남소림의 사형들께서 그녀에게 경을 읽고 제도도 해주셨어요.”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금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순우민은 무덤을 향해 무릎을 꿇고 단정하게 절을 올렸다.

금하는 정신이 멍하니 바라보았고, 조금 떨어져 있던 양악도 순간 말문이 막혔다. 따지면 순우민은 주인이고, 벽아는 종이다. 설령 벽아가 죽어도 주인집은 그 정분을 생각해 그 가족에게 후한 상을 내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주인이 직접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하는 일은 이들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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