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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47)화 (147/224)

147화

“그자는 내게 원한을 품고 있어. 나는 이미 오랫동안 그자의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자네가 어찌 이 초상을 갖고 있나?”

나문룡의 신분은 육역의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엄세번은 호종헌을 처리하기로 한 이상, 반드시 호종헌과 매우 잘 아는 사람을 찾아야 했을 터였다. 그래야 증거수집이든, 가짜 증거를 만드는 것이든 일 처리 전부가 쉬워진다.

“제가 알기로 이 사람은 지금 엄세번과 함께 있습니다.”

육역은 호종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가 있던 호종헌은 정신이 듦과 동시에 큰 재난이라도 닥친 듯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자가 엄세번의 옆에 있다고? 설마 엄세번을 부추겨서 내게 호된 맛을 보이려 하는 것인가? 엄가의 세력이 저리도 대단하거늘, 나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도독 잊지 마십시오. 엄가의 세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 천하는 성상의 한 마디로 결정됩니다.”

육역은 선의를 갖고 그의 생각을 일깨웠다. 그리고 호종헌은 그의 말 속에 담긴 속뜻을 알아들었다.

“아우님의 말뜻은?”

육역이 웃었다.

“도독께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시죠. 아마도 좋아질 여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참, 며칠 전 도독께서 보내신 두 아가씨와 물건 몇 상자는 제가 전혀 건들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보아 사람들에게 가져가라 하시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남에게 틈을 보이거나, 뒷공론이 나오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앞서 호종헌이 미녀와 재물을 선물한 것은 육역을 매수하여 상소에 그에 대한 좋은 말을 쓰게 하려 함이었다. 그러나 지금으로 봐선 만일 이 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되면, 육역은 뇌물을 받았다고 의심받게 될 것이고 그 자신의 결말은 더욱 비참해질 테니, 그야말로 돌을 옮겨 제 발을 찍게 되는 격이다.

호종헌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바로 사람을 보내 일을 처리하겠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육역이 공수하여 호종헌에게 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제가 육 대인을 배웅하지요.”

서위는 빠른 걸음으로 육역을 뒤쫓았고, 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진 육역은 걸음을 늦춰 그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걸었다.

“제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 제 아버님께서 선생께 일을 도와달라 청하셨지만, 선생은 거절하셨지요. 어찌하여 선생은 호 도독의 청은 승낙하셨는지요?”

육역이 서위에게 물었다.

“저는 절강 소흥인입니다. 고향인 이 절강 땅에 왜구가 횡행하는데, 제가 어찌 수수방관하겠습니까.”

서위의 답에 육역이 미소 지었다.

“선생의 숭고한 신념은 명리에 있지 않으시군요. 감복할 따름입니다.”

“도독은 양절에 오랜 세월 계시며, 왜구에 대비하여 병마를 훈련 시키고, 수하로 능력 있는 용장을 적지 않게 두었습니다.”

서위가 말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단지 도독의 관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양절의 총독이 바뀌는 겁니다. 그리되면 군은 반드시 대규모로 물갈이가 될 것이고, 우리가 수년간 심혈을 기울인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왜란을 평정하겠습니까.”

서위가 걸음을 멈추고, 육역을 향해 돌아서 깊게 절을 했다. 육역이 급히 부축하려 했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가 올린 절은 도독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양절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으니 반드시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육역이 그를 일으키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 * *

심 부인에게 두 번 침을 맞은 후, 아예의 병세는 이미 뚜렷한 호전을 보였다. 아직은 비록 침상서 내려와 걸어 다닐 수는 없으나, 스스로 수저를 들고 밥을 먹을 수도 있어 잠수의 번거로움을 많이 줄였다.

오늘도 심 부인은 하던 대로 아예에게 침을 놓고 진료 꾸러미를 챙겼다. 또 금하를 불러 약을 갈았다.

“오늘 이 약은 왜 달라요?”

금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상처에 약을 잘 펴 바른 심 부인은 면포로 싸는 것도 세심하게 싸맸다.

“약 성분 하나를 더했어. 아물면 흉터가 거의 남지 않을 거야.”

“와. 제겐 이모가 세상 최고예요!”

금하가 웃으며 말하자, 하품하던 개숙이 고개를 저으며 말참견을 시작했다.

“최고인 건 당연한 거지. 그거 저니가 하도 성화를 해서 내가 날도 밝지 않았는데 성을 나가 캐 온 약초다. 사방을 샅샅이 뒤져서 겨우 찾았어.”

“정말 오늘 캔 약초라고요?”

금하는 심 부인이 개숙에게 약초를 캐오라 했을 줄 생각도 못 했다. 그녀는 심 부인의 과분한 애정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모, 이렇게 번거롭게 하실 필요 없어요. 제 상처는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흉터가 남아도 보는 사람 없어요. 괜찮아요.”

심 부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넌 아가씨야. 어디에도 흉터가 있으면 안 되지. 참, 네 손에 이건……, 모기한테 물린 거니?”

금하는 별생각 없이 여기저기 긁적거렸다.

“네. 제가 유달리 모기를 타요. 방안에 저만 있으면, 쑥을 태우는 것보다 효과가 좋죠. 그래서 우리 아문 사람들은 여름에는 저랑 함께 있는 걸 다들 좋아해요.”

그녀의 말을 듣던 심 부인은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어 보였다. 눈 깊은 곳에는 물기가 고인 채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정말 언니와 같구나…….”

“음? 누구와 같다고요?”

금하는 의아해했다.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심 부인은 정신을 수습하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전에도 이런 상황을 본 적이 있었어. 나중에 약초를 캐서, 몸에 지닐 향낭을 만들고 바르기 좋은 약도 배합해 줄게.”

“많이 번거로우실 텐데요?”

“번거롭지 않아.”

일어선 심 부인은 돌아서 눈가를 훔치고는 재빨리 그곳을 나갔다.

금하는 제자리에 앉아 심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개숙에게 감탄하며 말했다.

“아저씨, 우리 이모 정말 마음씨가 보살만큼 고우시죠. 제가 모기 몇 방 물렸다고 저렇게까지 슬퍼하시는 거 봐요!”

개숙도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날도 밝지 않았는데, 너 약해준다고 약초를 캐오라 하고, 캐왔더니 찌고, 빻고 해서 약을 만들더라. 내가 오랫동안 뒤척거리며 잠을 잘 못 잘 때도, 내게는 이렇게 신경 쓴 적이 없었어. 봐라, 네 그 쬐깐한 상처가 이 정도까지 해야 할 거나 되냐?”

“아저씨, 질투하는 거 아니죠?”

금하가 의혹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맞아. 나 질투해.”

개숙은 당당하게 인정했다.

“저니는 요즘 하루가 온통 너를 중심에 두고 돌아가. 네 면포 갈고, 약 짓고……. 좀 한가해지면 말야. 내가 데리고 나가서 서호 구경이라도 하려는데, 저니는 옷감을 사러 갈 생각뿐이야. 네가 온종일 아가씨답지 않은 옷을 입는다고, 이렇게는 안 된다면서 네게 옷 몇 벌을 만들어 줄 거래.”

금하는 말문이 막혔다.

“이모, 이모가 제게 옷을 만들어 주신다고요?”

“그래. 네가 보기에도 지금 그니 머릿속에는 온통 네 일로 가득 차 있지 않니?”

개숙은 상당히 섭섭해했다.

“내 신발이 해졌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야.”

“줘보세요. 제가 대양에게 아저씨 신발 수선해드리라 할게요.”

금하는 개숙을 위로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미심쩍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돌연 밖에서 잠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앗, 오셨다!”

육역이 돌아온 걸 안 금하는 재빨리 그를 찾으러 뛰어나갔다. 개숙만 홀로 남아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딸은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이라더니, 진짜 옛말 하나도 틀리질 않아.”

* * *

육역은 잠복에게 지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내일 일찍 잠항으로 떠날 것이다. 네가 내 행장을 준비해. 이번은 군으로 가는 것이기에 짐은 적을수록 좋다.”

“호 도독이 대인을 왜 군으로 가라 해요?”

금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뛰어오다가 의문을 갖고 물었다.

“내가 제안한 거야. 군을 가 보는 것이 연해 왜구의 형편을 자세히 알기가 좋아.”

잠수도 맞이하러 나왔다.

“대공자, 군으로 가신다면, 제가 함께 따라가겠습니다.”

“필요 없다. 군대는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나는 잠복만 데려간다. 너는 내일 순우 아가씨를 모시고 신하성으로 제를 지내러 가라.”

육역이 분부하자, 금하가 급하게 물었다.

“저와 대양은요?”

“너희는 관도로 신하성으로 가라. 며칠 뒤 내가 가서 너희와 합류할 거다.”

육역은 말을 마친 후, 우선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사람들이 흩어졌지만, 금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미간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녀를 개숙이 다가와 끌어당겼다.

“계집애, 헤어지기 아쉬우냐?”

“뭐가 아쉬워요?”

금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개숙을 바라봤다.

“내 착한 손자랑 떨어지기 아쉬워한다는 게지.”

개숙에게 눈을 흘긴 금하는 이제 상관하지도 않고 육역의 방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대인, 호 도독한테 설마 도와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금하는 문을 두드릴 여유도 없이 직접 문을 밀고 들어가 물었다.

일상복을 걸친 육역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물었다.

“넌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군대로 가시는 건 반드시 호 도독의 동의가 필요해요. 바꿔 말해서 그가 대인에게 군대에 가도록 허락한 이상, 당연히 그는 대인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믿을 거고요.”

금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오늘 아침, 그가 대인을 부로 초대한 것이 협박하기 위해서였어요? 아니면…….”

육역은 온화하게 웃었다.

“계속 추측할 필요 없다. 모두 아니야. 그는 결코 나를 협박하지 않았어. 단지 지금 내가 연해 왜구의 상황을 상세히 알아보고 싶은 것뿐이다.”

금하는 의혹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대인, 그가 왜구와 사통한 건은 조사 안 해요?”

“군대로 가는 건 바로 그 일 때문이야. 만약 그가 왕직을 뭍으로 유인할 계략을 짜고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면, 그건 왕직이 죽기 전에 한 말과 충분히 상응하게 돼. 나는 이 점을 입증하고 싶다.”

“입증?”

금하의 대단한 총명함은 즉시 그 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대인께 직접 자신이 왕직에게 계략을 꾸민 거라고 말했다고요?”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 여우!”

그녀의 어조는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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