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 집은 호종헌이 당신들이 살 수 있도록 마련한 것이었지요. 이 의자 하나만 보더라도, 그때 그는 당신들에게 성심을 다한 것 같군요.”
왕양 씨의 어조는 말의 높낮이 하나 없이 일률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매우 잘했지요. 그는 우리 어머니를 옥에서 마중해줬어요. 의원을 불러 눈 진료를 받게 해줬고, 많은 약재를 보내 어머니 몸보신을 하게 해 줬어요. 그때 저는 생각했죠. 성상께서 해금(*명청 시대에 시행됐던 항해에 관한 금령.)을 해제한다고 결정하신 걸까? 우리 남편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여러 해가 되었죠. 관부는 그의 현상금 공고를 곳곳에 붙여서 남편은 육지에 오를 수도 없었어요. 참수 전 마지막으로 남편을 본 것이 이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왕양 씨가 반쯤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회상에 잠긴 듯했다.
“호종헌은 내내 우리 어머니를 달랬어요. 남편이 곧 돌아올 거라고, 금방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을 거라고요. 우리 어머니는 또 한동안 좋아하셨죠. 눈이 안 좋으신데도 신을 몇 켤레를 마련해 남편에게 보내셨고, 그가 돌아오길 학수고대하셨어요.”
“남편은 편지를 한 적이 있습니까?”
“있었죠. 이 집으로 이사한 후, 남편의 편지가 잦아졌어요. 편지에도 줄곧 우리를 보러올 거라고 말했어요. 어머니 모시고 함께 새해를 맞자고도 했고요.”
왕양 씨의 손이 허공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화퇴(*중국식 햄.)랑 절인 고기를 준비해 저기에 매다셨어요. 설 쇨 때 남편에게 먹으라 주시겠다고 하셨죠.”
“정말로 남편이 쓴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호종헌이 다른 이에게 대필시켜 고의로 당신들을 속일 수도 있을 텐데요?”
육역이 물었다.
“그럴 수 없어요. 제 남편은 금기가 있어서 어떤 글자들은 쓸 줄을 몰라요. 만약 다른 사람이 편지를 썼다면, 이 금기를 이해 못 해 보자마자 알았을 겁니다. 편지는 진짜였지만, 알고 보면 우리 남편도 호종헌에게 속았을 뿐이에요.”
왕양 씨는 평온하게 얘기를 해나갔다. 이때 이미 슬픈 모습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에 당신들은 왜 이 집을 떠났습니까?”
“작년 중추절이 막 지났을 때죠. 온 거리마다 우리 남편이 잡혔다는 소리가 들렸어요. 전 원래 믿지 않았던 것이 호종헌도 여전히 보약을 보내오며 우리에게 밖에서 들리는 근거 없는 소릴 듣지 말라고 했죠. 소봉의 편지를 받고서야 저는 호종헌이 태도를 바꾼 것을 알았습니다. 소봉은 호종헌이 우리에게 해를 입힐까 걱정해 저와 어머니를 배로 데리러 왔어요. 하지만 어머니가 가시려 하지 않아서 소봉은 우리를 우가촌에 살게 해 줬지요.”
“소봉은…….”
육역은 그가 누군지 설핏 기억이 났다.
“모해봉입니까?”
그는 왕직의 양자이자, 하정이 보내졌다던 그 주산에 있다던 자였다.
왕양 씨는 멍해져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겨우 답했다.
“소봉은 지금 잠항에 있다고 들었어요. 호종헌은 아마 그 아이도 죽이려 할 테죠……. 전 공자가 관가 사람인 것을 압니다. 당신은 호종헌을 만날 수 있으시죠?”
“가능합니다.”
“그럼 다행이에요. 죄송하지만, 그에게 말 좀 전해주세요.”
잠시 멈췄던 왕양 씨는 한 글자, 한 문구 무겁고 느리게 말을 뱉어냈다.
“하늘의 도리가 살아있다면, 반드시 응보가 있을 것이야!”
집 밖에 서 있던 남도행이 이 말을 듣고는 돌아서 왕양 씨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육역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꼭 전하겠습니다.”
왕양 씨의 얼굴에 온화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일어섰다.
“남 도사님, 피곤하네요. 돌아가 쉬어도 될까요?”
남도행이 육역을 바라보았다. 육역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이젠 물어볼 말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부축해 모셔다드리죠.”
“괜찮습니다. 이 공자님이나 배웅 잘 해주세요.”
왕양 씨는 비틀거리며 내당으로 들어갔다. 등불 하나 없는 곳, 하지만 이 공간이 매우 익숙한 여인은 더듬더듬 앞을 향해 걸어갔다. 밤의 정적 안에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 * *
달빛이 교교하게 내리는 밤.
느릿한 걸음으로 중정中庭으로 나온 육역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인을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남도행이 물었다.
“비록 왕직의 처라 해도…….”
육역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이 이왕 집으로 돌아가고자 마음을 먹었으니, 자네는 사람을 구해 그녀를 휘주로 보내주게.”
남도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다만 호종헌 쪽에서 여인을 꼭 놓아줄 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제 추측대로라면, 오늘 그 두 명의 살수는 호종헌의 수하입니다.”
“그는 사람을 보내 나도 지켜보고 있다네. 아마 내가 너무 많이 아는 것을 근심하고 있겠지.”
육역의 마음에 문득 의혹이 생겼다.
“그는 왜 지금 와서야 저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지금까지는 모해봉이 저들을 잘 숨겨서 호종헌도 줄곧 찾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저도 만약 공동묘지에서 밤을 지새워 지키지 않았다면, 저들 둘을 찾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군.”
육역이 미간을 찡그렸다.
왕양 씨의 말에 의하면 호종헌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들을 속였다고 했는데, 이렇다면 왕직을 잡자마자 저 고부 두 사람도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호종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계속 보약까지 보내 저들을 위로했다. 그 외에…….
“왜 그러십니까?”
남도행이 물었다.
“왕양 씨의 말이 비록 사실이라 해도, 자신이 그간 겪어온 일들 때문에 말이 편파적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이 사실은 본인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네.”
육역이 말했다.
“그녀의 남편, 아들 모두 호종헌의 손에 죽었어. 지금은 시어머니도 죽었고, 양자는 토벌당하는 중이니, 그녀는 분명 호종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치고, 그를 비열한 소인으로 여기고 있어. 그런 까닭에 내게 그런 말을 전해달라고 한 것이지.”
“대인은 호종헌이 잘못했다 생각하십니까?”
“자네 잊지 마. 그도 양자가 죽었네.”
육역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정의 시신을 보내온 그 날, 자네도 호종헌을 보았다면, 하정의 죽음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알았을 게야.”
그는 조문할 때 본 호종헌을 여전히 기억했다. 그는 꼼짝도 않고 목관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나 관 위를 쓰다듬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세상의 도리라는 것 전부가 누군가의 아들보다 빨리 죽어가고 있군요.”
남도행이 탄식했다.
“호종헌이 만약 왕양 씨 말대로 그들을 속인 나쁜 놈이라면, 적어도 그는 왜구와 결탁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대인 말씀처럼 그와 왕직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면, 이 일은 위까지 모조리 화가 미칠 일로 바로 가산을 뺏기고 멸문당하는 대죄가 됩니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제가 보기에 호종헌은 이 양절 총독이란 지위를 어렵게 얻은 것이니, 그는 결코 자리를 옮기려 하지 않을 겁니다.”
육역이 그에게 웃어 보였다.
“자네도 조심하게.”
말을 마친 그는 나는 듯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발끝으로 몇 번 가볍게 차니 사람은 이미 먼 곳으로 가 있었다.
홀로 중정에 서 있던 남도행은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왕양 씨의 방을 지날 때, 그는 잠시 귀를 기울여 안의 동정을 세심히 들었다. 그런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왕양 씨가 평안하게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피 묻은 가위가 들려있었고, 목덜미 쪽에서 선혈이 솟구쳐 회색 저고리를 검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당신이 말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었다니…….
남도행은 눈을 감고 오래도록 서서 길게 탄식했다.
* * *
밤은 깊어 조용하고, 북 옆에는 북, 징 옆에는 징, 달님 곁엔 사라수, 견우직녀는 은하수를 마주 보고 섰네…….
심 부인은 자애로운 얼굴로 금하의 발을 이불로 덮어주고 있고, 개숙은 세상 미운 얼굴로 코를 골며 자는 양악을 걷어찼다. 그리고 또 한 명, 무표정하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는 아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밤이다.
사방은 고요하고, 무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달은 밝고 별은 희미한 밤, 육역은 늘 그렇듯 창문을 통해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막 바닥에 착지한 그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자마자, 강한 바람이 좌우에서 밀어닥쳤다.
육역은 반응이 매우 빨랐다. 두 발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고, 머리를 뒤로 젖히는 동시에 허리를 낮췄다. 그 사이 장검 두 자루가 그의 눈썹 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그는 무기도 없이 정확한 보법에 의지해 장검 두 자루 사이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수초 후 빈틈을 발견한 그가 손바닥을 뒤집어 내리친 기세로 장검 하나를 빼앗았다.
육역이 빙글 돌아서 몸을 우뚝 세웠다. 안정적으로 검을 뽑은 그는 달빛에 드러난 손님을 살폈다.
문밖에선 싸우는 소리에 놀란 잠수가 급히 달려왔다.
“대공자,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두 분이 오셨다.”
육역은 말을 하면서도 손목을 가볍게 뻗었다. 힘차게 뻗어 나간 장검이 그중 한 사람의 어깨를 뚫고 나가 격자창에 못 박았다. 그 사람의 처절한 비명이 사방으로 울렸다.
또 다른 사람은 상황이 불리함을 파악하고는 검을 든 채 도망가려 했다. 그때, 문을 부수고 들어온 잠수가 이것을 보고 수춘도를 뽑았다. 도검이 서로 부딪혀 불꽃이 튀고, 챙챙 부딪히며 싸우는 소리가 격렬하게 들렸다.
그렇게 잠수에게 상대하게 맡겨둔 육역은 여유로운 얼굴로 더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문밖에선 잠복이 급히 달려왔고, 금하도 절뚝거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대공자, 괜찮으십니까?”
잠복이 다급히 말했다.
“괜찮다.”
저 앞에서 금하가 껑충껑충 뛰어오자, 달려가 그녀를 부축한 육역이 담담한 어조로 나무랐다.
“넌 정말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는군.”
금하는 육역이 다치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머리를 쑥 빼고 창에 못 박힌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예요?”
“네 생각에는?”
창 쪽으로 다가가 그 사람의 복면을 잡아당긴 육역이 반대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금하는 상당히 즐거워하며 등불을 켰고, 벼르기라도 하는 듯 손을 비비며 앞으로 나섰다.
“뭐 초면이긴 해도, 몸을 수색하면 알 수 있겠죠.”
이쪽에서는 잠수가 잠복의 도움을 받아 나머지 흑의인을 재빨리 제압했다. 그는 그자의 면건을 힘껏 잡아당겼다.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이자는 호종헌이 데리고 있는 부관입니다.”
잠복은 보자마자 알아보았다.
육역이 두 사람을 쓱 훑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놀란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너희는 줄곧 용마루에 엎드려 나를 지켜보고 있지 않았던가? 오늘은 무슨 흥이 나 내방까지 온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