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의지하 (143)화 (143/224)

143화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산을 오를 때보다 걷는 것이 더욱 느렸다.

“어머니, 여기서 잠시 쉬시지요.”

회색 저고리의 부인이 바위를 찾아 옷소매로 깨끗이 털고, 조심스럽게 백발 노부인을 부축하여 앉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이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완두콩 떡에 빨간 점을 찍었네, 장님이 먹고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먹고 목발 버리고, 대머리가 먹고 머리털 나고…….”

백발 노부인이 멍하니 듣다가 갑자기 얘기를 꺼냈다.

“다섯째도 완두콩 떡을 좋아하지. 집에 없으니, 내가 가서 사줘야 해……. 집으로 돌아가야겠어.”

“네. 우리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요.”

회색 저고리의 부인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휘주로, 흡현으로 돌아가자.”

“……어머니.”

회색 저고리의 부인은 백발 노부인이 이렇게 말할 줄 전혀 생각지 못해 얼이 빠졌다.

“이 몇 년 동안 널 많이 서운하게 했지.”

백발 노부인의 마른 손이 회색 저고리를 입은 부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다섯째가 쓸데없이 그리 큰 장사를 하니, 너도 누려야 할 복 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했어.”

“어머니,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마실 물 좀 찾아볼게요.”

회색 저고리의 부인이 급히 등을 돌렸다. 백발 노부인에게 보일까 두려워 얼른 눈물을 지우고 앞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대여섯 걸음 걷지 않았는데, 뒤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부인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두 명의 복면인이 들고 있던 예리한 검을 노부인을 향해 휘둘렀다.

“어머니!”

부인이 기겁하여 크게 소리쳤다.

노부인의 눈은 보이지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며느리의 비명 소리를 듣고는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다. 그런데 노부인은 놀라거나 피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얼굴에는 웃음기가 드러나기까지 했다.

그렇게 검 끝이 노부인을 찌르던 순간이었다. 옆에서 돌연 가늘고 긴 대나무 가지가 검과 노부인의 사이를 찔러 들어왔다. 위쪽으로 아직 푸른 댓잎이 달린 가지는 보기에는 약해 보였으나, 두 자루 장검을 충분히 막고 있었다.

남색 저고리를 입은 사람이 춤을 추듯 빙글 휘돌아 옷자락을 가벼이 펄럭이며 노부인 앞으로 내려앉았다.

그가 복면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두 분 성함이?”

“어디서 온 돌팔이 도사냐, 꺼져!”

복면인은 당연히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장검을 휘두르자마자, 무수한 검기가 흩뿌려져 남도행을 공격해갔다. 장검은 은처럼 하얗게 빛났고, 대죽 가지는 푸른빛을 발하며 죽엽이 분분히 날렸다.

잠시 후, 그들이 서로 떨어졌을 때 두 복면인의 가리개는 대죽 가지에 잘려있었다.

“아직도 안 가고 계십니까?”

남도행이 웃어 보였다.

“내가 충고 한마디 하지요. 얼굴은 상관없어도, 만약 허리띠가 잘려나가면, 그거야말로 정말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닐 겁니다.”

잠깐의 겨루기로도 이미 복면인은 자신들이 결코 남도행의 적수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서로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한 그들은 돌아서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어머니, 어머니…….”

회색 저고리의 부인이 백발 노부인에게 달려들어 연거푸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백발 노부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습에 다친 곳은 없다지만, 그 사이 노부인의 숨은 이미 끊겼다. 회색 저고리 부인의 애끓는 외침이 산길을 울렸다.

남도행이 돌아서 노부인의 맥을 짚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천수가 다하였습니다. 시주께서도 너무 슬퍼하시지 마십시오.”

남도행이 노부인의 시신을 등에 메고, 산 아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회색 저고리의 부인은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 * *

객잔 소원의 내당.

잠복이 급하게 다가왔다. 금하가 뭐라도 좀 먹으라고 그를 부르기 전, 잠복은 잔뜩 굳은 얼굴로 빠르게 내당을 꺾어 돌아 육역의 방으로 곧장 향했다.

“분명 사고가 일어난 거야.”

다리가 불편한 금하는 양악을 부추겨 도청하러 가자고 했지만, 그는 줄곧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싫어.”

잠시 후 잠복이 나오자 금하는 밥을 먹으라고 재빨리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온 정성을 다해 그에게 밥을 담아다 주었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그녀는 은근히 정성스럽게 샤오마이 접시를 통째로 밀어줬다.

잠복은 그녀를 흘끔 보았지만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조문화 알죠?”

“공부상서 조 대인, 모를 수가 있나요.”

잠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 대인이 정양루 건축 건이 순조롭지 못하다 하여, 서민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정양루?”

금하는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성상의 새 건물이잖아요. 작년에 착공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다 짓지 않았던 거예요? 어쩐지 성상께서 한껏 조바심을 내시더라니. 그런데 엄 대인은 왜 중재도 안 하셨대요? 수양아들을 도와야죠?”

엄숭을 의부로 삼은 조문화는 엄당의 주요 인물로 조정에서 몇 년간을 자기 뜻대로 행동하던 사람이다. 비록 작년에 성상께 백화주를 몰래 진상해 엄숭의 노여움을 샀으나, 의부 쪽에도 다시 성대한 예물을 보내 다행히 그들 사이는 다시 회복되었다.

설마 엄숭의 마음에 여전히 뭔가가 남아 고의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은 거야?

아니면 이건 엄세번의 뜻이야?

“오라버니네 대공자께서는 이 일을 들으시고 뭐라 하셨어요?”

금하가 잠복에게 물었다.

“대공자께선 말씀하셨죠……. ‘아’라고.”

“그렇게만요?”

“그렇게만요.”

잠복은 이미 샤오마이를 먹기 시작했다.

금하는 옆에서 줄곧 정신이 나가 찐빵 뜯어 먹는 것조차 잊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몇 가지 가능성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백화주 건에서 엄세번은 분명 조문화의 다른 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엄숭은 옛정을 생각하여 조문화를 용서했겠지만, 사소한 원한도 반드시 보답하는 엄세번의 성격으로 어찌 그를 가볍게 놓아줄 수 있을까.

금하와 마찬가지로 홀로 방 안에 있던 육역 역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 아예의 말대로라면, 조문화 좌천 건은 엄세번의 계획일 것이고, 이건 그의 첫 번째 수가 될 터였다.

조문화는 호종헌의 조정 후원자였다. 그가 좌천되었으니, 호종헌은 조정에 줄을 댈 사람이 사라졌다. 그러니 그는 일단 탄핵당하면, 특히 왜구와 내통하는 등의 대죄로 걸린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것이 엄세번의 두 번째 수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세 번째 수는…….

아예가 경고했던 것처럼 자신이 만약 호종헌을 돕는다면, 왜구와 내통한 그의 죄명이 밝혀졌을 때 자신 또한 한몫을 차지하게 되고, 호종헌의 죄명이 확실해지는 그땐 자신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그의 아버지도 해명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육역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엄세번은 왜 그가 분명 호종헌을 도울 거라고 생각했을까?

절강으로 온 이래, 그가 조사한 증거는 전부 호종헌에게 불리한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는 호종헌과 아무런 친분이 없어 호종헌을 도와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 * *

깊은 밤, 하얀 포를 헐렁하게 걸친 육역은 불을 밝힌 채 탁자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어느 순간 대나무 가지가 격자창을 두드렸다. 그가 일어나 창을 여니 남도행의 신형이 휙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멀지 않은 곳의 용마루에 서서 육역을 기다리고 있었다.

육역은 옷을 잘 갖추어 입고 불을 껐다. 그대로 그는 창밖으로 뛰어올라 남도행을 뒤쫓았다.

두 사람 모두 대단한 경공의 소유자로 뛰어오르듯 달리는 것이 몹시 날쌨다. 그들은 달그림자처럼 흔적 하나 없이 움직였고, 항주성 안의 외진 고택에 이르러서야 남도행이 멈췄다.

“왕직의 어머니가 오늘 아침 세상을 떴습니다.”

남도행의 간단한 말에 육역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남도행이 보충하여 설명했다.

“생각하시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천수를 다했을 뿐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인께서 생각하신 것도 맞았습니다. 확실히 누군가 이들을 죽이려 합니다.”

“여긴 어디인가?”

“여긴 호종헌이 작년에 왕직의 모친을 특별사면한 뒤, 그들 고부 두 사람이 살도록 특별히 마련해준 집입니다.”

남도행이 육역의 눈빛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집은 이미 폐쇄된 지 오래되었죠. 아무리 호종헌이라 해도 그들이 감히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겁니다……. 가시죠. 제가 그 부인을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 * *

등불을 켜지 못하는 집 안은 칠흑처럼 어두웠고, 희미한 달빛만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왕직의 처, 왕양 씨는 이화목으로 만든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녀는 육역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놀라 허둥대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미 이 세상에는 이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게 할 일이 없는 듯했다.

“남 도사님은 좋은 분입니다. 시어머니 관을 마련해 주시고, 어머니를 잘 묻어 평안을 얻게 해주셨지요.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사님 말씀이 누군가 제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시다 하셨는데, 당신이신가요?”

왕양 씨의 물음에 육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묻고 싶으신가요? 말씀하세요. 저는 내일 돌아갈 겁니다.”

육역이 이화목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살짝 훑자 엷은 먼지가 묻어났다. 그는 잠시 침음한 후에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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