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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지하 (139)화 (139/224)

139화

항주 성내.

잠수는 뜰에서 왔다 갔다를 벌써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그가 이렇게 초조하고 불안하니, 지켜보던 순우민이 참지 못해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잘 있을게요. 종들과 할멈도 있잖아요.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서 일 봐요.”

“순우 아가씨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무슨 할 일이 있다고요. 대공자께서 제게 아가씨를 잘 보호하라 하셨으니, 절대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잠수는 급히 예의를 차렸다.

“원 포쾌, 그 사람들 걱정하는 거죠?”

순우민이 짐작으로 물었다.

말이라도 안 하면, 그런대로 참고 있었겠지만, 순우민이 언급하자마자 잠수는 화가 잔뜩 솟았다.

“대공자께서 그들에게 객잔에서 기다리라 명하셨는데, 잘 됐다면서 도망가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대공자 돌아오셔서 절 찾으시면 뭐라 설명해요.”

“내 기억으론 원 낭자가 한 번만 보고 돌아온댔어요. 동성문은 멀어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 거겠죠.”

“그 계집애가 언제 사실대로 말한 적 있나요. 말은 동성문 가서 한 번만 본다고 해 놓고, 아마 서호 구경 갔을 겁니다.”

순우민의 생각에 잠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 육역과 잠복이 원으로 들어왔다.

“누가 서호 구경을 갔어?”

잠복이 웃으며 물었다.

“원…….”

잠수는 어물거렸다.

“원 낭자와 양악 형제가 나갔어.”

“그들이 서호 구경을 갔느냐?”

육역도 어렵게 항주에 왔으니 짬을 내 금하와 서호를 둘러봐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빠져나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건 아닙니다. 그들은 성문 밖을 가본다고 했는데, 이유도 없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육역이 미간을 찌푸렸다.

“언제 나갔지? 넌 왜 그들을 막지 않았나?”

“그들은 제가 말먹이를 주러 갔을 때를 틈타 나갔습니다.”

잠수는 매우 억울해했다.

“……그들은 대공자께서 먼저 나가시자마자 바로 빠져나갔어요.”

육역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그를 본 잠복이 온화한 말로 이유를 설명하여 달랬다.

“항주성에 온 것이 처음이고, 또 나이가 어리다 보니 새롭고 번화한 것이 좋았을 겁니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때를 잊는 것도 예삿일이고요. 제가 당장 가서 찾아볼 테니, 대공자께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육역은 금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도화림에서 목숨을 잃을뻔한 경험을 하고서도, 그녀는 바로 이어 그 위험 안으로 재차 뛰어들었다.

지금 만약 성 밖에서 단서라도 발견했다면, 금하는 분명 그 길로 추적해나갈 터였다. 유일한 위안이란 다행히 양악이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만약 위험에 처하더라도, 서로 도울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잠복, 나와 동성문으로 간다.”

육역은 담담하게 분부 후,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순우민과는 무슨 얘기도 할 틈이 없었다.

잠복도 탓하는 눈빛으로 잠수를 한 번 노려보고는 서둘러 따라갔다.

* * *

“금하야!”

되돌아온 양악이 동양도를 막아내고 금하를 부축했다.

암기 위에는 독이 담금질 되어있을 것이다. 양악은 몹시 초조해졌고, 그 사정을 아는 금하 역시 자신의 사지가 점점 마비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적은 저리 많고, 지금 또 그녀는 다쳤으니, 양악과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양, 날 내려놓고, 얼른 가서 보고해.”

금하의 어조는 급했다. 하지만 양악에겐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금하를 등에 업은 그는 몸을 숙여 휘두른 칼을 피하고, 두 사람을 발로 찬 후 베어 죽이려 했다.

“네가 계속 날 업고 있으면, 우리 둘의 목숨은 여기서 끝이야.”

하지만 칼을 꽉 움켜쥔 양악은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 사이 단도에 날아와 부딪친 암기의 ‘따당’하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동양 낭인의 얼굴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움켜쥔 장도를 양악을 향해 곧장 휘둘러 들어갔다.

―― 칼날이 양악에게 아슬아슬 닿으려던 찰나,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대나무 장대 몇 개가 연이어 사람들을 펑펑펑 때려눕혔다. 물론 동양 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양악이 상황파악을 할 틈도 없이 마차 한 대가 그의 옆으로 질주해 왔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빨리 올라와!”

당장 여러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양악은 금하를 업은 채 마차 위로 뛰어올랐고, 연이어 금하는 놀람과 기쁨이 교차하는 환호성을 질렀다.

“아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두 손으로 고삐를 꽉 쥔 개숙은 그들과 한가히 인사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기에 큰소리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잘 앉아!”

개숙은 꽉 쥐고 있던 돌 몇 개를 마차를 막으려는 이들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 마차는 포위를 뚫었다.

동양인 몇이 마차를 향해 암기를 쏘려 했을 때였다. 급하게 막아선 소두목이 미친 듯이 날뛰며 마구 소리쳤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 내 아내와 아이가 마차에 있단 말이다!”

* * *

양악은 흔들리는 마차 한쪽에 금하를 내려놓았고, 그녀는 심 부인을 향해 힘겹게 웃어 보였다.

“이모, 또 뵙게 돼서 정말 좋아요.”

옆에는 아이를 꼭 끌어 앉은 촌부가 앉아있었다. 아이는 희고 포동포동한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넌 언제 또 이모가 생겼어?”

“그런 건 상관 말고, 얼른 우리 이모께 인사드려.”

금하는 창백한 안색으로 웃어 보였다. 의아해하던 양악도 공수로 인사했다.

“구해주신 두 분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심 부인은 싱긋 웃어 보이고, 우선 금하의 다리 상처를 살폈다. 그녀는 재빠른 솜씨로 초리검 두 개를 뽑고는 바로 이어 환약을 손에 들었다. 먹는 것, 바르는 것……. 마차의 흔들림도 그녀의 치료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모, 누구예요?”

물을 마신 금하가 촌부를 입술로 삐죽 가리키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심 부인이 말했다.

“마을 사람이야. 어제 저니 아이가 뱀에 물렸어. 마침 내가 여길 지나는 바람에 남아서 아이를 치료했지. 그런데 오늘은 이리도 우연찮게 이 일로 너희를 만나게 되네.”

뒤쪽에서 마차를 뒤쫓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양악이 마차의 발을 조금 걷어 올리자,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 드러난 그 소두목이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따르는 다른 무리는 전혀 없이 그 홀로 따라오고 있었다.

심 부인도 슬쩍 보고는 촌부에게 말했다.

“아이 아빠가 쫓아왔군요. 걱정 마요. 성문 근처까지 가게 되면, 당신들을 내려줄게요.”

촌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은 간청하는 빛이 가득했지만, 무슨 말도 하지는 못했다.

“이 아이의 목숨은 무사해요. 이 환약을 챙기고, 매일 반 알씩 갈아서 상처에 덮어줘요. 상처의 붓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게 해요.”

심 부인이 그녀에게 작은 포장의 환약을 건넸고, 촌부는 거듭 고마워하며 받아들었다.

금하는 부상을 입은 몸이었지만 여전히 강한 호기심은 감추지 못했다.

“아주머니, 마을에 있던 남자들은 왜구예요. 알고 있었어요?”

“몇 년 전부터 그들은 마을 밖으로 나가 먹고살 일거리를 찾았어요. 처음에는 그 사람들도 말이 없었고, 우리도 대체 무슨 일로 벌이를 하는지 몰랐어요. 그저 들어오는 돈이 많다는 것만 알았죠. 그러다 나중에야 왕 주인님을 따라 바다에 나간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건 정말 목이 날아갈 큰일이라, 어느 집도 감히 다른 곳에 말할 수 없어 다들 자기네 집 남자는 밖에 장사하러 다닌다고만 말하고 있어요.”

“그럼 저들이 하정을 납치한 것도 다들 알고 있어요?”

촌부는 낮은 목소리로 얘기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정이 누구예요?”

옆에 있던 양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집에는 일 얘기를 안 했을 거야.”

개숙은 성문 멀지 않은 곳에 마차를 세웠다. 뒤를 쫓아오던 소두목도 차마 가까이 오지 못한 채 먼 곳에서 말을 멈췄다. 그는 그렇게 마주 서서 오랫동안 이쪽을 바라보았다.

“관병이 곧 들이닥칠 거예요. 당신들 여자와 아이들은 숨을 수 있다면 최대한 숨는 게 낫겠어요.”

촌부가 마차에서 내릴 때, 금하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충고했다.

조금 놀란 듯했으나, 촌부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안고 말에서 내렸다. 그녀는 심 부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자신의 남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소두목이 그들을 맞이해 말 등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마차 쪽을 뚫어지라 바라보고는 이내 말을 채찍질해 그곳을 떠났다.

* * *

마차 안, 금하는 애써 몸을 지탱하고 앉아서 양악에게 탄식하고 있었다.

“촌락 남자 전부가 왜구가 됐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우린 오늘 정말 도둑놈 소굴에 떨어졌던 거야.”

돌이켜 생각하니 양악도 전신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또 딱 한 번만 보겠다고 해봐라. 그땐 나도 더는 너 안 믿는다.”

두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선배님, 혹시 금하를 보셨습니까?”

금하는 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눈을 콱 감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깊은 잠에 빠진 척했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힐끔 본 양악이 마차의 발을 걷어 올리고 뛰어나가 예를 올렸다.

“육 대인, 저희 여기 있습니다.”

육역은 마차 안에 있는 금하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말투의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심 부인이 양악 대신 얘기를 시작했다.

“다리를 좀 다쳤으나, 다행히 근육과 뼈는 다치지 않았어요.”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육역은 양악을 바라보았고, 어조에 문책의 뜻이 충분히 담겼다.

“저희는, 저희는 단지…….”

“내 조카딸이 피를 흘리고 자칫하면 목숨도 잃을 뻔했는데, 넌 이리 험상궂게 심문할 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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