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당연히 가르쳐주셨죠.”
금하가 잠시 머뭇거리고는 덧붙였다.
“다만……, 제 머리로는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림을 그다지 잘 못 그려요. 평소에 그릴 기회도 적고요.”
“문제없다. 그려낼 수 있으면 돼. 아예가 말하길 너희가 이전에 동양어를 할 줄 아는 한인汉人을 잡았는데, 또 빠져나갔다고 했다. 너는 아직 그 사람의 용모를 기억하나?”
육역이 잠복에게 먹을 갈라고 눈짓했다.
그날 배 위의 정경이라.
금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그 사람이 뱃머리에서 살려달라고 빌던 모습을 곰곰이 회상했다.
그 생각을 하며 그녀는 먹물을 묻힌 붓을 들어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필 일 획, 그녀의 모습은 매우 진지했다.
육역과 잠복은 옆에서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꼬박 밥 한 끼 먹을 만큼의 시간이 흘러서야 금하는 붓을 놓았다. 그래도 미심쩍어 붓을 다시 가져와 덧칠을 한 후에야 그녀는 드디어 몸을 일으키고는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 그렸어요.”
육역이 서탁을 돌아와 보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금하의 머리를 몇 번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돌아가던 상황을 보던 잠복도 서탁을 돌아왔다. 그림을 본 순간, 그는 바로 얼이 빠졌다.
“……이게 야차죠?”
종이 위의 인물은 매우 섬세히 그려진 편이었다. 코는 코, 눈은 눈이었으나, 애석한 것은 코가 비뚤어지고, 눈이 사시라는 점이었다. 생김새 어디 하나 제대로 된 곳이 없어 삼정오안(*사람의 얼굴 길이와 넓이의 표준 비율.) 전부 완전 난리가 났다.
“말도 안 된다. 어디 이리 못생긴 야차가 있더냐.”
육역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외형만 보지 말고요, 풍기는 느낌을 보세요. 제 생각에 사람을 그리는 데 있어서 모양은 그다음이고, 가장 중요한 건 묘사가 생생해야 해요.”
금하의 어조는 당당하고 차분했다. 그러고 잠시 후 주저하며 말을 보탰다.
“아니면, 제가 몇 획을 더 그릴까요?”
“되었다. 밤에 악몽 꾸겠구나.”
육역이 그녀를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종이를 깔았다.
“네가 얘기하면, 내가 그리마.”
“그림도 그리세요?”
육역은 어쩔 수 없이 놀란 금하를 슬쩍 보았다.
“적어도 너보다는 괜찮을 거야. 넌 말만 하면 돼.”
“이 사람의 얼굴형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아요. 양의 눈에 동공 사방으로 흰자가 보이고, 볼에는 길이 짧은 담황색 수염에, 코는 날카롭고 뾰족하고, 인중이 짧게 생겼어요.”
금하는 설명을 하면서도 고개를 기울여 육역이 그리는 그림을 보았다.
그의 솜씨는 상당한 수준으로 대단히 놀라웠다.
“정말 잘 그리시네요? 대장보다 잘 그리세요.”
잠복이 옆에서 웃으며 끼어들었다.
“다른 건 차치하고, 인물 그리기로만 얘기하면, 경성 안의 많은 화가가 우리 대공자를 따라올 수가 없습니다. 안타까운 건 대공자께서 공무처리 하실 때나 한번 그리실 뿐이고, 다른 때는 붓에 손도 대질 않으시죠.”
육역이 시선도 들지 않고 그림을 그려가며 입을 열었다.
“종일 가야 너희 큰 남자들 몇만 옆에 있잖나. 보는 것도 지겨운데, 어디 그릴 흥미가 나겠느냐.”
금하가 다가와 알랑거리며 웃었다.
“대인, 경성으로 돌아간 후, 틈날 때 저로 그림 연습하시는 건 어때요? 우리 엄마가 새 옷 만들어 주시기로 하셨거든요. 분명 예쁘겠죠.”
육역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보았다. 빙긋 웃었을 뿐 대답 없이 계속 이어 초상을 그려나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승낙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금하는 그를 한껏 뚫어지게 보았다.
육역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마지막까지 그리고는 붓을 놓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떠하냐, 그와 닮았나?”
“대략 오 할 정도 비슷하네요. 눈이 조금 더 작아야 하고, 눈썹이 다소 성기고, 콧방울이 조금 더 크고, 입꼬리는 아래쪽으로 조금 더 휘어야 하죠.”
금하의 대답에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종이를 가져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옆에 있던 금하는 그가 붓을 들고 집중하는 것을 보고는 잠복을 슬며시 끌어당겼다. 아주 작은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진짜 그 댁 대공자도 못 하는 게 있어요?”
잠복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어쩜. 지금에야 대공자께 수많은 장점이 있는 걸 발견했어요?”
“우리 대양은 밥도 할 줄 알아요. 대인은 분명 못 할걸요.”
“군자는 부엌과는 멀지요. 대공자께서 어찌 그런 것을 배우셨겠습니까.”
“오라버니, 날 놀리지 마요. 금의위 어디에 군자가 있어요.”
금하는 잠복이 미간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보충 설명했다.
“요즘 세상에는 군자가 돼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에요.”
잠복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피하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육역을 흘끔 보았다. 그가 고개도 들지 않은 것을 속으로는 다행으로 여겼다.
“다 그렸다. 와서 보아라.”
육역이 문득 금하를 불렀다.
금하는 다가가 보자마자 기뻐하며 말했다.
“그 사람이에요. 그때 그! 정말 똑같아요. 성벽에 붙은 공고문도 대인 그리신 것보다 못해요.”
육역은 먹물이 마른 후 그림을 잠복에게 건네주며 분부했다.
“이 사람은 동양어를 할 줄 알고, 분명 오랜 시간을 연해 이 일대에서 지냈을 것이다. 네가 가서 그의 신분을 조사해. 빠를수록 좋다.”
잠복이 그림을 잘 챙기고 명령을 받아 떠났다.
“왜 갑자기 그를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양주에서 조사하지 않고 오히려 절강에 와서 조사하다니. 금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예는 엄세번의 배에서 이 사람을 보았다고 했다.”
금하는 상당히 놀라워했다.
“아예가 중독된 동양인의 독이 설마 그자에 의한 것이었을까요?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줄은 생각지 못했어요. 설마 그는 그날 배에서 붙잡힌 것을 복수하려고 그랬을까요?”
“내가 걱정하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라…….”
육역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아예는 이건 올가미고, 누군가 대인을 해치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그 누구는 엄세번을 가리키는 건가요? 그럼 이 사람이 엄세번과 관계가 있나요?”
관료 사회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위험도 더 커지기 마련으로 육역은 이 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있었다. 하물며 지금은 상황 또한 명확지 않았으니, 그는 그녀가 너무 일찍 이 일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에는 차츰 밝혀질 것이다.”
그는 분명하게 밝혀 말하지 않았다. 금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의 표정을 세심히 살폈다.
“왜. 설마 내게 뭔가 의심스러운 것이 있나?”
육역이 그녀를 훑어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금하가 무슨 말을 하기 전, 마침 양악이 문을 두드리고 해장탕을 들고 들어왔다.
육역이 그에게 분부했다.
“너는 가서 저 두 아가씨를 살펴봐라. 그들에게 비용은 모두 내가 정산할 것이니, 춥거나, 배고프면 얼마든지 주인과 얘기하라 해.”
양악은 비록 속으로는 의심이 들어도 더는 묻지 못했다. 금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지시를 받아 나갔다.
“오라버니, 저 아가씨들은 내일 돌려보낼 거예요?”
“왜 돌려보내야 하지?”
그녀의 물음에 육역이 눈썹을 세웠다.
“호 총독은 후의를 보였고, 어쨌든 그의 체면을 깎는 것은 좋지 않아.”
“그럼 정말 받아들이실 건가요, 대인……, 아예가 이건 올가미라고, 호종헌이 보낸 것들을 받지 말라고 한 말 잊지 마세요.”
금하는 미간을 찡그렸다.
“설마 저 두 아가씨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돌려보내기 아까우세요?”
육역이 그녀의 가까이 다가와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너, 질투하고 있나?”
“나는……, 아니거든요.”
금하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어도, 속으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이든, 몸매든 모든 것에서 자신은 저 두 아가씨에게 전부 미치지 못한다.
다음 순간, 육역은 바로 그녀를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어조에는 만족스러움이 충분히 담겼다.
“네가 질투를 할 줄 알아 다행이다. 오늘 나는 네가 말끝마다 언니라 부르는 걸 보고 있으며, 네가 나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은 줄 알았다.”
금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벗어나지 못했다. 이내 그녀도 편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제가 질투한다 치고요……. 음,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가 그 여자들 방으로 가시진 않겠죠?”
육역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편안하게 그녀의 어깨에 묻었다. 그러다 이 말을 듣고는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도 웃는 바람에 육역은 등까지 들썩거렸다.
“왜 웃어요? 내 말이 맞았죠?”
금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살짝 떼어냈다.
“한밤중에 다른 사람 방으로 몰래 들어오길 좋아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너일 텐데.”
그가 머리를 슬쩍 들고 그녀를 보며 웃었다.
“제가 언제…….”
반 정도 말을 하던 금하는 지난번 적란엽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한밤중에 몰래 그의 방을 더듬어 들어간 적이 있다.
금하는 멋쩍게 말을 멈춰야 했고, 육역은 끝까지 물고 늘어졌다.
“찔리는 게 있지?”
“뭐가 찔려요. 저는 그때 정당한 사유가 있었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도 다른 수가 없었어요. 그건…… 큰일 하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구애받지 않아요!”
금하의 언사는 당당했지만, 얼굴은 붉게 변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 의도가 있었지?”
육역이 그녀를 놀렸다.
금하는 얼굴이 온통 새빨개져서는 힘을 다해 그를 밀었다.
“그런 일 없어요! 오라버니, 과음하셨군요. 얼른 해장탕 드시고, 일찍 쉬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방문을 나섰다.
육역은 탁자에 기대어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안도의 숨을 삼켰다.
오늘 밤은 금하를 적당히 넘겨 겨우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저렇게 총명하고 또 철저히 따지는 성격이라 얼마나 오래 끌 수 있을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거무칙칙한 관 하나가 동성문에서 열 장이 안 되는 곳의 길 한 가운데 놓여있었다. 그 역시 재수 없는 물건이라 비록 길 가운데를 막고 있었으나, 왕래하는 백성 누구 하나 감히 그것을 옮기려 하지 않고 다들 돌아서 다녔다. 그러다 어떤 눈 밝은 사람이 관 주변의 먼지가 전부 피에 젖어 새까매진 것을 발견하고서야 누군가 달려가 관에 보고했다.
“그 뒤론요?”
삼선 만두를 씹던 금하는 점원을 응시했다.
“관짝을 비틀어 열었는데, 세상에, 안에 있던 게 누구게요?”
점원은 땀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주위 다른 손님들이 놀랄까 두려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듣기로는 호 도독의 양자 하정이랍니다. 조각조각 잘린 것이 전혀 사람 모양이 아니었대요. 호 도독이 직접 달려와 관을 관저로 운송해 갔다죠. 경험 있는 입관 전문가들을 온 성에서 불러들였는데, 시신을 꿰맨 다음에야 매장해야 한대요.”
옆에 앉은 순우민은 처음 들어 본 말에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육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분명히 왜구의 복수였다. 호종현은 왜구의 우두머리인 왕직 부자를 참했고, 그래서 왜구도 그의 양자를 잔인하게 토막 내 죽인 것이었다.
“잠복, 넌 부조금을 준비하여 나와 호 도독의 부로 간다.”
그의 분부에 금하도 급히 말했다.
“저도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