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육역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지도를 가져와 점검했다.
“조금 전의 갈림길까지 돌아간다. 그 후 동남쪽으로 가고, 다시 앞쪽으로 가면 바로 현음관에 도착해.”
“우리 도관으로 가나요?”
금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해 빼꼼 고개를 빼들고 참견했다.
“현음관은 원래 도관이었지. 참배객과 오가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산기슭 아래에 점점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마을도 현음관이라 부른다.”
육역이 고개를 갸웃 기울여 그녀를 보다가 갑자기 웃어 보였다.
“선무당, 덕담 한마디 들어볼까.”
방긋 웃던 금하는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말해 버렸다.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자리에 오르시고, 하루빨리 득남하시길!”
금하가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 못하여 육역도 멈칫 굳었다. 하지만 뒤이어 호탕하게 웃고 연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좋은 말이군.”
잠복과 잠수는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형제는 원래 육가의 가생자家生子(*집안 노비의 자녀.)로,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육역은 그저 대공자였다. 그들이 아는 그는 진중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이렇게 통쾌하게 웃는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잠깐 시선을 마주쳤다. 한 사람은 상황을 똑똑히 깨달았고, 한 사람은 여전히 어리둥절하며 생각이 서로 달랐다.
순우민은 육역을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이번 동행 전에는 육역이 외조모를 방문할 때, 한두 번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것이 많았다. 그러니 그의 문무 재략이 어찌어찌 출중하고, 일 처리는 반듯하고, 성정 또한 보기 드물게 진중하여 보통 관료의 자제들이 제멋대로 날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모두 그녀는 알고 있었다.
육역은 이번 여정에 그녀에게도 매우 신경을 써줬다. 그의 말과 행동 또한 온화하고 예의가 있었으나, 그녀는 두 사람 사이의 서먹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 육역이 호탕하게 웃고 있으니, 순우민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매우 환하게 빛났고, 평소의 절제된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순우민의 시선이 어느새 육역의 옆에 있던 금하에게 시선이 멎었다. 그녀는 다른 쪽을 바라보며 밝게 웃고 있었다. 순우민은 문득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 의아해졌다.
혹시…….
* * *
현음관으로 바꾼 길은 지도상에선 비록 조금 멀게 돌아가도 길 자체는 오히려 훨씬 좋아졌다.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도 경쾌하게 여정의 속도가 매우 빨라진 것이다.
길을 따라 계속 가다 보니 갈수록 오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황혼이 다 되어 현음관에 가까워졌을 때는 그야말로 인파에 둘러싸여 앞으로 나아갈 정도였다.
사방을 둘러 보던 금하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옆에서 빠르게 걸어가던 뚱뚱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도 현음관으로 가세요?”
오래 걸어온 탓에 얼굴이 발그레해진 아주머니는 숨이 차 헐떡거렸다. 말을 건 이와 한가하게 얘기할 여유도 없어서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우린 같은 길로 가고 있군요. 마차에 올라와 숨 좀 돌리시겠어요?”
금하가 그녀를 불러 끌채에 앉으라 했다. 잠수가 그녀를 흘겨보았으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잠시 망설이다가 큰 덩치를 움직여 마차에 올라앉았다. 땀을 훔치면서도 금하에게 감사를 잊지 않았다.
“고마워요. 아이고, 그래도 아가씨네 마차가 편하네. 아가씨도 치료받으러 가죠?”
“치료받아요? 누가 치료하는데요?”
금하는 의아해했고, 아주머니도 어리둥절해 했다.
“아가씨는 현음관으로 도사님 찾아가는 길 아니우?”
금하가 전혀 사정을 모르자, 아주머니는 큰 선심을 쓴다는 듯 그녀에게 알려줬다.
“내일이 곡우잖아요. 이틀 동안 마을에는 임시로 시장이 선다우. 그리고 능력이 아주 출중한 도사님 한 분이 현음관에 오셨는데, 도관 밖에도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의 운수를 보고, 액막이를 해주시거든. 주변 이웃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 왔지. 시장에 온 사람들 몇 빼고는 아마 거의 다 이 도사님한테 온 걸 거요.”
“도사? 점쟁이요?”
“점치는 것뿐 아니라, 치료도 하고, 궁합도 보는데, 매우 신통해요. 작년에 그분을 만나 내가 언제 시집갈 수 있냐고 봐 달라고 했거든. 그런데 점 본 게 정확했잖우. 그래서 올해는 내가 언제 아들을 낳을 수 있을지 봐 달라고 찾아왔지요.”
듣다 보니 금하의 마음도 조금 동했다.
“그렇게 신통하다니, 저도 점이나 보러 가야겠어요. 언제 승진하고, 봉급이 오르나 봐달라고요.”
이 말에 잠수는 경멸의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 도사님 명호가 어떻게 되세요?”
금하가 서둘러 물어보자, 아주머니는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 도사님은 정말 재주 많은 분으로 오가는 것도 전광석화처럼 나타났다 사라져요. 이름조차 남긴 적이 없다우.”
금하는 포쾌가 되어 일한 몇 년 동안 아문 안에서 귀동냥한 것들이 많았다. 또한 그녀가 만났던 재주 많은 명인 열에 아홉은 사기꾼이었다.
그녀는 침묵한 채 곰곰이 생각했다.
강호를 떠도는 사기꾼이라 이름도 못 남기겠지. 어쩌면 사채업자에게 쫓기고 있을지도 몰라.
머지않아 황혼 무렵에는 현음관이 있는 산 아래의 작은 마을에 들어섰다. 시장이 섰기 때문인지, 원래도 넓지 않은 거리는 수많은 사람으로 온통 북적거렸다. 산 위 도관으로 통하는 돌계단 길도 수많은 인파로 덮였다.
마을의 객잔 전부는 거의 만원이었다. 잠복은 어렵사리 빈방이 두 개 남은 객잔을 찾았고, 돈을 더 얹어주고서야 간신히 육역과 순우민을 들여보냈다. 남은 이는 마차에서 아쉬운 대로 하룻밤 지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잠복은 육역의 짐을 방으로 옮기고 여러 상황의 점검을 끝냈다. 육역의 심중을 깨달은 이후로 줄곧 신경을 쓰던 잠복은 그가 내내 말이 없자 넌지시 떠볼 수밖에 없었다.
“대공자, 원 낭자 쪽은 소관이 다시 주인에게 방을 하나 비워줄 수 있는지 상의를 해보겠습니다.”
육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되었다.”
* * *
객지에서 풍찬노숙하며 고생하는 것쯤이야 금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한번은 숙소를 지나쳐 들판에서 대충 둘둘 말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육역과 순우민이 객잔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타고난 신분에 대한 생각으로 한숨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오래 마음에 담지 않았다. 바로 객잔에서 멀지 않은 곳에 펼쳐진 노점상 매대로 시선이 쏠렸는데, 그곳엔 갖가지 좋은 물건이 가득 놓여 있었다.
사람이 마차에서 쉬었기에, 마차 위의 짐들을 전부 내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일은 많이 줄어 시간은 남았고, 게다가 잠수는 그녀를 지독히 싫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금하는 차라리 자리를 피했다.
양악에게는 주위 상황을 살펴보겠다는 말로 둘러대고 그녀는 골목길을 따라 계속 걸어 다녔다.
비록 포쾌의 신분으로 온종일 칼과 몽둥이를 휘두른다지만, 금하의 속은 어디까지나 어린 아가씨였다.
매끄럽게 윤이 나는 섬세한 작은 도자 인형이며, 작고 깜찍하게 대나무로 엮은 마차 등등 매대에 놓인 작은 물건들을 보고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허리를 굽혀 하나하나 자세히 보고, 값을 묻고,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 그런 후 연달아 다음 것을 구경하고…….
이렇게 매대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산 위의 도관으로 향하는 돌계단 아래에 이르렀다.
주위는 화려한 불빛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어보니 산 위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돌계단 길에도 등롱을 든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불빛은 그 사이에서 무수히 많은 빛으로 반짝거려 그것은 또 하나의 장관을 이뤘다.
산으로 가는 행렬을 바라보던 금하는 자신도 따라가 도사에게 점을 볼까 생각하면서도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니 망설여졌다.
어쩌면 복채도 내기 어려울 수 있어.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쥔 커다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멈칫했던 금하가 바라보니 바로 육역이다. 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육역은 태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설핏 보았을 뿐이었다.
“이렇게 넋이 나가 돌아다니다니. 식사시간 지난 건 알고 있나?”
금하는 지금 막 꿈에서 깬 것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후회의 표정이 떠올랐다.
“……다들 벌써 다 먹었어요?”
밥때를 맞추지 못했다는 건 자신이 돈을 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하에게 이것은 인생에서 절대 용납지 못하는 잘못이었다.
육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복 쪽도 양악도 모두 먹었다.”
금하는 약간의 기회가 남았다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그녀가 눈빛을 빛냈다.
“대인은 아직 안 드셨죠?”
육역은 답하지 않았다. 담담한 시선으로 그녀를 슬쩍 보고는 고개 들어 등불이 가물가물하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산길을 바라봤다.
“잘 됐어요. 제가 함께할게요. 혼자 밥 먹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인데요.”
금하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보았다.
“대인 뭐 드시고 싶으세요?”
“넌?”
육역이 그녀에게 반문했다.
“전 뭐든지 다 먹어요. 하늘에 나는 것, 땅에 뛰는 것, 물속에 헤엄치는 것, 끓여 익히기만 하면 제가 못 먹는 건 없어요.”
금하는 꽤나 호탕하게 말했다.
“미처 몰라보고 실례했군.”
“별말씀을. 육선문의 지도가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육역은 금하가 겸손한 태도를 만들어 보인 것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육역은 앞을 향해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곳은 자고새가 매우 유명하다지. 고기가 연하고 맛이 좋다는데, 기왕 왔으니 맛을 한 번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