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금하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뭔가 또 이상하여 버럭 화를 냈다.
“분명 저 놀리는 거죠? 왜 또 제 소원을 이뤘다고 말씀하세요!”
육역은 웃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때, 금하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를 끌어당기고, 까치발을 한 채 그의 입술에 거듭 입을 맞췄다.
이렇게 금하는 온 세상을 얻은 듯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작은 짐을 들고 재빨리 문을 나섰다.
방 안, 육역은 먼저 미소가 스미고, 뒤이어 큰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웃음은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대공자, 마차가 모두 준비되어 출발할 수 있습니다.”
육역을 부르러 온 잠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대공자. 기분이 좋으십니까?”
웃음소리를 억누른 육역이 미소를 머금으며 밖으로 나갔다.
“보물 하나를 얻었지……. 가자, 출발한다.”
* * *
어제의 일로 양악이 아예와 다시 충돌할까 염려하여, 잠수는 양악과 마차를 바꾸었다. 잠수가 선물과 아예를 실은 마차를 책임지게 되었고, 양악이 계집종과 할멈이 탄 마차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금하는 수레의 채에 앉아 앞쪽 육역의 모습을 내내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은 흐뭇해졌다.
한참을 가다가 옆에서 마차를 몰던 잠수는 결국 참지 못하여 그녀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넌 대체 뭘 그렇게 바보같이 웃어?”
“산 좋고, 물 좋고. 어르신이 보기에 기쁘다는데, 뭐가 잘못됐나요?”
금하는 재치있게 그의 말을 일축했다.
“명색이 아가씨가 온종일 ‘도련님, 어르신.’ 입에 달고 살면 지겹지도 않냐?”
잠수는 그녀를 눈에 매우 거슬려 했다.
“그게 뭘. 내가 나가서 사건처리 하면 사람들은 내가 아가씨란 거 상관없이, 관원 나리, 관원 나리라 부르는데.”
금하는 잠수의 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게다가 육선문 안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다 할 수 있어요. 그들과 비교해 봐요, 내 실력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나.”
금하가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앞쪽 조금 멀리 떨어져 가고 있던 육역이 그녀를 흘끔 돌아보았다. 눈에는 웃음기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금하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어제 정도였다면, 잠수와 껄끄러운 게 생겨도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이젠 육역의 체면을 보아 잠수와 소소한 얘기를 할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운 상태였다.
“오라버니, 어제 그 장풍, 대단히 용맹스러웠어요. 무슨 무공 배웠어요?”
“말해도 넌 모를 거다.”
잠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먼저 말을 해야 내가 정말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있잖아. 안 그래요?”
잠수는 흥, 소리를 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금하는 그가 어떻게 나오든 처음부터 전혀 상관하지 않았으니, 바꾸어 또 물었다.
“그 댁 대공자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배웠어요?”
잠수는 그녀를 흘낏 쳐다보고는 경계심을 드러냈다.
“대공자 뒤는 캐서 뭐 하려고?”
“하, 참. 우러러본다는 ‘앙모’란 말도 몰라요! 전 대공자를 앙모한 지 오래됐다구요.”
금하는 온통 진지한 얼굴이었다.
“흥, 내가 왜 너한테 얘기해줘야 해?”
잠수는 정말 남의 얘긴 조금도 듣지 않는 사람이었다.
“경성에 우리 대공자를 앙모하는 이는 많아. 내가 무슨 시간이 남아서 하나하나 따라다니며 말해주겠냐.”
금하는 고개를 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설마 내가 뭐 직접 못 물어 볼까 봐? 너희 대공자의 성격이 너보다 훨씬 좋다!
마차가 요동치는 사이, 마차 안 아예의 기침 소리가 몇 차례 들려왔다.
금하는 잠수가 움직이기 전, 먼저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독이 깨끗이 가시지 않은 탓일까. 아예는 몸의 상처가 이미 아물었고, 짓무를 조짐도 없건만 깨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사지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음식을 씹는 것조차 매우 힘들어했으나, 육역이 그의 맥을 짚어봐도, 맥이 허약한 것 외에는 다른 이상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아예라는 사람 자체에 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양악을 격분케 한 그날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음식을 먹여 주면, 그는 멍하니 받아먹었다. 만약 먹여 주는 이가 없으면, 그도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는 내색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누워 있었다. 눈 감고 자거나, 눈을 뜨면 허공의 어느 한 점을 똑바로 보고 있을 뿐으로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 이가 없었다.
예전의 아예가 수시로 쓸 수 있는 잘 벼린 칼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단지 흙 속에 반쯤 묻혀있는 썩은 나무토막이었다.
금하가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고 보니, 아예의 모습은 한 시진 전과 똑같이 아주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물 마시고 싶어요?”
금하가 물었으나, 마치 그녀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처럼 아예는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고 마차의 지붕만 응시했다.
그러니 그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금하도 강권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상흔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상관 언니가 그쪽 지금 모습을 본다면 알아볼까 모르겠네.”
금하가 상관희를 언급하자, 기어이 아예의 눈동자는 살짝 움직였다. 금하도 이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돌아가 만나고 싶죠?”
그녀는 일부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참 안타깝네. 지금 그쪽이 폐인 같은 모습이라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굳이 말할 필요도 없어. 양주에 돌아간다 해도 언니는 볼 수 없으니까.”
이 말에 아예의 눈이 재빠르게 그녀를 향했다. 마주친 눈빛에는 강렬한 원망이 서렸다.
“그분, 그분이……, 어떻게 되셨는데?”
아예의 음성은 모래에 쓸린 듯 거칠고 가늘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온몸의 기력을 다 쓴 것이었다.
바로 답하지 않은 금하가 적당한 속도로 그에게 얘기해 줬다.
“상관 언니가 원래 남소림의 속가제자라는 걸 나는 이제 알았는데, 그쪽 알고 있었어요?”
금하는 아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연해 일대는 왜구가 흉포하게 날뛰죠. 지난번에는 양주까지 들어왔잖아요. 참, 그때 그쪽도 만났죠. 게다가 상관 언니를 위해 다치고……. 그쪽이 지금 중독된 것도 동양인의 독이에요. 누구한테 당했어요?”
아예는 매섭게 그녀를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쪽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예상할 수 있어요. 비록 그쪽이 적 낭자를 죽였지만, ‘그 사람’ 눈에는 당신과 적 낭자가 그다지 다를 게 없죠. 적 낭자는 바둑으로 따지면 버리는 돌이었고, 당신 역시 버리는 돌이에요.”
금하의 말을 여기까지 들은 아예는 이를 꽉 물어 아래턱이 미세하게 튀어나왔다.
“하, 상관 언니가 절강에서 왜구랑 싸울 때, 매우 위험할지도 모르겠다. 언니가 만약 당신처럼 되면 정말 좋지 않겠죠. 나 노려봐서 뭐하려고요?”
“넌 그분을 감히 저주할 수 없어!”
갈라진 목소리건만, 한 자 한 자 더없이 또렷했다. 금하는 이때서야 정색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호 총독이 남소림의 스님들에게 하산하여 왜구와 싸워달라고 했고, 방장이 속가제자에게 편지를 써 그들에게 서둘러 절강으로 가 왜구와 맞서라고 했죠. 상관 언니뿐 아니라 사소도 있었고, 사가에서 송별회도 했어요. 상관 언니가 어떤 사람이란 거 설마 당신이 몰라요? 언니가 하는 일은 당신도 다 했잖아. 당신이 여기서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면, 그게 언니한테 쓸모가 있어요? 당신은 언니를 위해 칼이나 검도 막을 수 있잖아요!”
아예는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의 눈 속에는 궁금증도, 주저함도 분명 떠올랐지만,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제의 큰비로 도로는 질척거렸다. 길을 가는 속도는 매우 느렸고,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다리를 멈추고 쉴 가게는커녕 다관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행 중 육역, 금하 같은 이들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흔들리는 것이 익숙해 별생각이 없었으나, 순우민 쪽은 다들 지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육역은 조금 마른 곳이 나타나자 그들을 마차에서 내려 쉬게 했고, 그사이 잠복은 육역의 명으로 먼저 앞쪽 길을 살피러 갔다.
육역의 마음을 확인한 금하 또한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 말과 행동에 있어선 조금도 경솔할 수 없었다. 육역을 보는 것마저도 다른 이가 눈치챌까 너무도 걱정되어, 오히려 겉으로는 그에게서 더욱 멀어지고 있었다.
“원 낭자, 저희 아가씨께서 낭자께 가져다드리라 하셨어요.”
계집종이 쟁반에 물 한 잔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아가씨께 감사해요. 하지만 저는 물주머니가 있습니다.”
“이건 장미 진액을 섞은 찬물이에요. 정신이 나고 머리를 맑게 하는 데 도움을 주죠. 아가씨께서 특별히 저를 불러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어요.”
금하는 사양했지만, 말주변 좋은 계집종은 계속 권했다.
“아가씨 말씀이 어제 원 낭자 앞에서 추태를 부리셨대요. 사람들이 원 낭자를 오해할 뻔했다는 걸 들으시고는 아가씨가 매우 부끄러워하십니다. 그리고 원 낭자께 용서를 청한다고 하셨어요.”
“아니에요. 피 보고 혼절했잖아요. 전 그런 병증을 아는데, 아가씨 탓이 아니에요.”
금하가 급히 말했으나, 계집종이 여전히 공손하게 쟁반을 받쳐 들고 있자, 어쩔 수 없이 물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순우 낭자가 이렇게 교양과 사리를 갖춘 이상, 그녀도 자신의 넓은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금하는 순우민에게 다가가 웃으며 말했다.
“주신 물 감사히 마셨어요. 어제의 일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 낭자 얼른 앉으세요.”
순우민이 아름답게 생긋 웃었다. 서둘러 계집종에게 화려한 무늬의 걸상을 가져오게 하여 금하를 앉으라 했다.
금하가 보기에 순우민의 안색은 창백했다. 아마 산길에 마차가 매우 흔들렸기 때문일 터였다.
“순우 낭자는 바깥에 자주 나오시질 않나 봐요?”
“우스운 모습을 보이네요.”
순우민이 부끄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비가 내린 탓인지, 마차가 조금 흔들렸어요. 포쾌면 평소 밖에서 사건조사를 하잖아요. 이렇게 거센 비바람도 자주 만나고, 분명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금하는 손을 내저었다.
“거센 비바람이야 만난다 해도 결국은 지나가죠. 가장 두려운 건 길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 정도는 돼야 재수가 없다고 해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잠수는 금하의 말을 듣고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데 옆에 있던 육역이 숲을 바라보며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잠수는 육역의 시선을 따라 수풀 안쪽을 줄곧 기웃거렸다. 별다른 것 하나도 없으니, 그로서는 참으로 육역의 웃음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오래지 않아 돌아온 잠복은 근심 띤 얼굴로 말에서 내려 급하게 육역에게 보고했다.
“대공자, 앞쪽으로 2리를 못 간 곳의 길이 무너져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린 되돌아가거나,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너져!
금하는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뭘 이런 게 다 말한 대로 되냐.
잠수는 언짢은 기색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눈 속에 담긴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놈의 방정맞은 주둥이, 정말 싫다!